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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국 의정대신
희종시대
1844-1856
역대 영의정
1대 2대 3대 4대
박규수 김좌근 유홍기 윤자승
역대 의정대신 (헌종시대)

조선국의 개화공신

개화공신 수훈자
開化功臣 受勳者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강위 윤자승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유길준 서광범
김윤식 김홍집 어윤중 탁정식 이동인
유정수 김양한 신헌 이범윤 조병세

역대 조선국 의정대신
歷代 朝鮮國 議政大臣
의정부
개화 정권
수구 정권
제149대
이상황(李相璜)
제1대
박규수(朴珪壽)
제2대
김좌근(金左根)
박규수
朴珪壽
인물 정보
환경(瓛卿)
환재(瓛齋)
본관 반남(潘南)
시호 문익(文翼)
재임 기간 1844년 6월 5일-1845년 9월 11일

박규수(중국어: 朴珪壽, 1807년 ~ 1877년)는 조선국의 관료이자 학자로서, 초대 의정대신으로 임명되었다.[1] 또한 연암 박지원의 손자이며, 명문 거족 반남 박씨이긴 하지만 권력의 중심에 있던 가계는 아니다. 연암 때부터 소위 북학파로서 당쟁을 거부하는 탕평을 모토로 하는 노론 계열의 일파에 불과했다.

약관의 나이에 천재로서 소문이 자자했기에 그는 효명세자와도 친분이 깊었으며, 효명세자는 순조의 대리청정을 하면서 강력한 왕권을 세워 세도 정치를 견제하고자 했는데 그에 딱맞는 젊은 인재로서 중용됐다. 이후에 로드 암허스트 통상 요구 사건조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영국에서 특명전권대사로서 허머트를 파견하자 희종이 이에 대한 답례로서 외교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승낙, 1842년에 그를 전권대신(全權大臣)[2]으로 임명하고 그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영란사(英爛使)를 파견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그는 서양의 기술 및 제도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문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북학파개화파를 합세한 북화개항파라는 정치 세력권을 형성하여 노론에 대항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발맞춰 노론 역시 개항에 반대하는 유생들과 고위 관료들을 주축으로 한 수구파를 형성하였다. 한편, 서양의 통치제도를 모방할 것을 희종에게 건의하였으며, 유생들과 함께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같은 기존 기득권 계층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의정부 체제에서 아문 체제로 변경하고 기존 삼정승 체제를 폐기, 내각의 총책임자인 의정대신(議政大臣)의 1명으로만 두었으며, 이를 국왕이 직접 임명토록 하였다.[3]

그러나 궁내부를 설치하는 것[4]에 대해 분분한 의견 끝에 결국 박규수는 내각 해산을 선언하면서 의정대신을 사임하였으며, 이후에는 희종에 요청에 따라 평안도 관찰사로서 관료 생활을 유지하였다. 이때 그는 근대적 의미에 학원으로서 그의 호에서 따온 헌재학당(獻齋學堂)을 세우고서 개화파 인재 양성에 힘을 쓰게 되었다. 그의 개화 교육은 과거 북학파실용주의가 기반에 깔려있었으며, 과거 북학파들은 청나라로 왕래하는 사신들을 통해 베이징에서 서양 문물들을 접했는데, 이런 연결고리는 박규수에게까지 이어져 내려와 박규수 또한 서양의 정세와 문물에 정통했다는 것을 반증하게 한다. 역관 출신의 오경석, 의관 유홍기 등이 박규수와 함께 했던 개화사상의 선구자로 꼽힌다.

이후에 오경석과 유홍기 등을 필두로 한 북화개항파가 1856년에 병진반정(丙辰反正)에 성공하면서 정권의 주도권을 차지하면서 박규수를 다시끔 의정대신으로 앉히려는 시도를 보였으나, 이에 그가 거절함에 따라 무산되었다. 1860년에는 완전히 관직에서 사임을 표하였으며 헌재학당에서 명목상의 총장을 역임하여 사상 정리에 나서게 되는데, 그의 제자들이 유신식 개화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도 같은 입장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많으나, 실상 그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했고, 그는 서양법(西洋法)에 대한 동양 학문과 도덕성의 우월함을 확신했던 유학자로, 북학파 사상의 연장선상에서의 개국통상론자였다. 그는 서양의 물질 문명 역시 우수하나 아편 전쟁이나 포함 외교 등을 미뤄봤을 때 분명 서양의 것을 답습해선 안된다는 인식이 있었다. 동양의 정신을 지키면 서양 역시 배울 점이 있고 개선될 점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였다.

각주

  1. 인민(人民)에 의한 의정대신 선출은 1850년대에 이르러 본격화 되었다.
  2. 나라를 대표하는 권한을 위임받아 파견하던 외교 사절을 일컫는 직책
  3. 이는 희종의 주도로 이루어진 이른바 을사개혁(乙巳改革)의 정치 변혁 중 일부였다. 자세한 내용은 을사개혁 참조.
  4. 궁내부(宮內府)를 설치한다는 것은 국왕과 정부를 분리시키겠다는 점에서 왕권 약화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민감한 소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