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개화)

Peacemaker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4월 26일 (수) 13:21 판


대한민국
大韓民國 | Republic of Korea
국기 국장
대한독립만세
大韓獨立萬世
국가 애국가
국수 호랑이
국화 무궁화
국목 소나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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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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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한성부
북위 37.5642135° 동경 127.0016985°
최대 도시
면적 약 46만 km2
접경국 중국, 만주, 녹우크라이나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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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1억 7,650만 명
인구 밀도 280.4명/km2
출산율 1.62명
기대수명 83세
민족 구성 한민족 73%
화족 20%
기타 7%[4]
공용어 한국어
공용 문자 한글
군대 대한민국 국군
지방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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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제도 단일 국가, 지방자치제
광역자치단체 13개 부[5], 20개 도, 1개 특별자치도[6]
기초자치단체 317개 시, 186개 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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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민주공화제 (국민주권), 문민통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다당제, 성문법주의 (혼합법계)
민주주의 지수 8.21점 | 완전한 민주주의
대통령
(국가원수)
반기문
국가
요인
국무총리 정병국
부총리 김덕훈 / 재무부장관 겸임
중추원의장 유승민
대법원장 차명남
집권 여당
신임 공급
틀:새천년민주당 (개화)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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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명목)
$7조 3,424억 | 세계 3위
1인당 $41,600
GDP
(PPP)
$8조 6,485억 | 세계 4위
1인당 $49,000
무역 수입 $1조 2,257억
수출 $1조 3,592억
예산 세입 $1조 2,159억
세출 $1조 1,970억
외환보유액 $1조 3,037억
신용 등급 무디스 A1
S&P A+
Fitch A
통화 공식 화폐 대한민국 원
ISO 4217 KRW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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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도량형 SI 단위
통행 방향 우측 통행
시간대 GMT+09:00 (KST)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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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가입 1971년
수교국 198개 국가
ccTLD
.kr
국가 코드
410, KOR, KR
전화 코드
+82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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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민국(大韓民國 / Republic of Korea)은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1392년에 건국된 조선을 전신으로 하며, 개화와 함께 1889년 대한국으로 국명을 개칭했다가 1895년 아관파천의 여파로 공화정으로 전환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인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상징

국기

태극기
太極旗 | Taegeukgi
지위 대한민국의 국기
채택일 1883년 3월 24일[7]
1895년 12월 31일[8]
설계자 이응준[7]
박영효[8]
근거법령 대한국 국제[7]
대한민국 헌법[8]
비율 2:3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국기로, 대한민국 헌법을 통해 그 지위를 보장받는다.

1882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앞두고 미국 측이 조약체결을 위해 조선 측도 국기가 필요하다고 요구하자 이에 당시 협상 실무진에 속한 외교관이었던 이응준이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후 약간의 수정을 거쳐 1883년 태극기는 정식으로 국기로 선포되었다.

이후 1895년 입헌군주제를 명시한 대한국 국제(헌법)로 인해 권력이 크게 제약당한 고종이 전제군주제를 복원하기 위해 아관파천 사태를 일으키자 대한국 중추원은 공화국을 선포하였고 이와 함께 태극기를 수정하여 현재와 같은 형태의 태극기가 완성되게 되었다.

국장

대한민국 국장
大韓民國國章 | National Emblem of Korea
지위 대한민국의 국장
채택일 1918년 6월 11일
설계자 최재형
근거법령 대한민국 헌법

대한민국 국장은 대한민국의 국장이다. 동어반복 경기가 좋아지면 반드시 불경기에서 탈출할 수 있다

1918년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최재형이 설계하였으며 태극문양을 둘러싼 무궁화를 다시 청색의 리본이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현재의 국장을 채택하기 전까지는 태극기의 태극문양을 똑 떼어 그대로 국장으로 사용했다.

국가

무궁화 삼천리
대한민국 애국가
無窮花三千里 | Long Way of Sharon Roses

지위 대한민국의 국가
채택일 1896년 5월 15일[9]
1937년 6월 9일[10]
작사자 윤치호
작곡자 안익태
근거법령 대한민국 헌법

무궁화 삼천리는 대한민국의 국가이다.

대한국 시절에는 국가의 안녕과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대한국 애국가를 국가로 사용했으나 공화제 전환 이후 국가를 대한민국 애국가로 변경하였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민요인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애국지사 윤치호가 만든 가사를 붙인 대한민국 애국가는 1896년부터 1937년까지 약 40여 년 간 사용되었다. 하지만 외국 민요를 국가의 곡조로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비판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1937년 당시 총리였던 안창호의 요청으로 민족주의 음악가 안익태가 자신이 작곡한 한국환상곡의 곡조 일부에 윤치호가 만든 기존의 가사를 붙여 무궁화 삼천리라는 이름의 새 국가를 만들었고, 이를 중추원이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로 채택하였다.

저작권자는 대한민국 정부이다. 기존의 저작권자였던 안익태가 국가 채택과 함께 저작권을 정부에 이양했기 때문이다.

무궁화 삼천리
[ 가사 펼치기 · 접기 ]
1절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2절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 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3절 가을 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 없이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4절 이 기상과 이 맘으로 충성을 다하여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 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역사

개화

경성 거리 (1893)

1870년대, 서구 세계의 발전에 충격받은 조선은 고종온건개화파의 주도 하에 개화정책을 실시하였다. 서구와의 통상수교를 거부하며 쇄국 정책으로 일관한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비교하면 진일보한 방향을 잡은 것이었지만, 수구적 온건개화파의 주도로 실시된 개화정책은 적극적이지 못했고 정치적 개혁이 수반되지도 않았다. 이에 지식인 계층과 신흥 상공인을 중심으로 더 급진적은 개혁을 요구하는 목서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1884년, 더욱 급진적인 개혁개방을 원하던 급진개화파김옥균을 리더로 하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정변을 통해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집권한 급진개화파는 개화당을 창당하고선 본격적인 개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건다. 개화당의 개혁정책은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모든 것을 서구식으로!"였다. 개화당 정부는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제도를 유럽식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외교적으로 이전의 전통적인 사대교린 정책을 폐기하고 서구 국가들과 적극적으로 수교하였으며 또한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하였다.[11] 또 여전히 상하이 조차지에 대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던 영국에게 제주도를 조차지로 제공하는 대가로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사회, 경제적으로 천지개벽할 만한 변혁이 나타났다. 근대적인 인구조사와 토지조사가 실시되었고 서양식 교육제도와 의료기술이 전면 도입되었고 서구 국가들로 대규모 국비유학생이 파견되었다. 미국 기업과의 합작을 통해 경성제물포를 연결하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었고 정부 주도의 대규모 상공업 투자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는 머리를 단정하게 다듬는 일명 단발령이 내려졌는데, 정부 요인이었던 유길준이 직접 고종의 머리를 밀어버리기도 했다.(...)

군사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근대적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국민개병제가 계획되었으며 조병창의 건설로 신식 소총이 생산, 도입되었다. 또 영국과 독일로부터 후장식 대포를 대량으로 도입하였으며 제대의 편제와 훈련도 서양식으로 바뀌었다. 영국으로부터 여러 척의 구식 구축함과 경순양함을 값싸게 매입하기도 했다.

팽창

대한제국군 (1899)

적극적인 팽창을 시도한 조선은 청과의 간도 분쟁이 벌어지자 1894년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일본과 손을 잡고 청을 공격하였다. 한일 동맹군은 퉁화 전투와 서해 해전에서 각각 청나라 북양군과 청나라 북양함대를 격파하였고, 영국의 중재로 영국령 제주에서 제주조약을 맺어 강화하였다. 전쟁으로 한국은 간도를, 일본은 대만을 병합하였다.

1895년, 입헌군주였던 고종이 실권을 되찾기 위해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고, 분노한 중추원은 고종을 폐위시키고 공화정을 채택, 대한민국의 성립하였다.

의화단의 난 당시 러시아 제국은 의화단 진압을 명목으로 대규모 군대를 파병했고, 난이 진압된 이후에도 그대로 만주에 주둔시켰다. 안 그래도 아관파천으로 인해 러시아를 고깝게 보던 한국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자 않았음을 눈치채고 러시아의 확장을 막으려는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아 1904년 일본과 함께 러시아에 선전포고하였다.

러시아는 약 10만명의 병력만이 극동 지역에 배치되어있었기에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거기에다 육군 대장 이용익이 지휘하는 한일동맹군이 여순과 봉천에서 러시아 육군을 격파하면서 전세가 기울어졌고, 대한해협에서 도고 제독의 일본연합함대가 러시아 발트함대를 수몰시키면서 러시아는 굴욕적인 평화협정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중재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으로, 한국은 만주에 대한 러시아의 모든 이권을 양도받았고, 일본은 사할린섬과 쿠릴 열도를 할양받았다.

1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 초기 한국은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우방국이었던 영국으로부터 계속해서 참전 압박이 들어왔고 이승만 외무성장관을 중심으로 참전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된다는 의견이 내각 내에서도 다수를 점하면서, 1914년 말 협상국의 편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한국은 독일 제국 등 동맹국 국가들에 선전포고하였고 한국군이 독일령 교주만을 공격, 점령했다.

하지만 한국은 직접적인 참전보다는 다른 방법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일본, 스페인과 같이 협상국에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수출하여 엄청난 호황을 누린 것이었다. 훗날 총리를 역임하는 안창호는 이 때를 "거리마다 부와 행복이 흘러넘치던 시대"라고 회상했다. 당시 힌국 정부는 전쟁을 통해 얻은 부를 재투자, 재분배하도록 장려했고, 덕분에 이어진 대공황에서 일본에 비해 비교적 적은 피해를 입었다.[12]

전간기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한국은 북방 출병을 통해 연해주와 만주 북부로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소련 노농적군, 몽골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후 하바로우스크 조약을 통해 소련의 만주 진출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와 그 이북지방에 친한 성향의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을 건국하여 완충지대를 확보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하지만 소련의 시베리아 병합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의 친한 군벌들을 지원하던 한국은 소련의 위협이 커지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더 견고한 완충지대를 만들고자 하였다. 논의 끝에 괴뢰국보다는 친한 성향의 동맹국이 완충지대로서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 만주국 정부와 1927년 심양조약을 체결하여 만주국을 만주의 유일한 정부를 만주 유일한 국가로 인정하고 지원하는 대신 남만주를 할양받았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이 몰아닥치자 한국은 혼란에 빠졌다. 한성 주식시장은 붕괴했고 실업률은 두 자릿수를 넘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와 결속주의, 무정부주의 등 극단파가 득세하였으며 사회주의 성향의 한인사회당이 집권하기도 하였다.[13] 사회당 내각은 강력한 복지정책과 군바 축소로 경제위기에 대응하였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서 경제상황이 조금씩 호전되고 시작했고 민주당-국민회 연립내각이 수립되었다. 새 내각은 대한공산당민족단결연맹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선포, 헌법위원회 위헌정당심판을 통해 해산시켰다. 그러자 공산주의 운동과 결속주의 운동은 지하화되었다.

2차 세계대전

냉전기

냉전의 끝

현재

정치

대통령

중추원

틀:대한민국 중추원의 원내 구성 (개화) 대한민국 중추원은 대한민국의 입법기관이다.

중추원은 대한민국 헌법과 법률을 제정, 개정, 폐지할 수 있다. 법률안의 경우 중추원 의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 인원 과반수 동의가 필요하며 헌법의 경우 중추원 의원의 2/3 이상의 동의가 팔요하다. 또 중추원은 국무총리를 선출하거나 불신임할 수 있으며 국무원에 대한 국정조사, 국정감사를 실시할 수 있다.

의원의 임기는 4년이지만 의회 해산이 종종 있으므로 평균 임기는 이보다 짧다. 국무총리에게 중추원 해산권이 있으나 중추원이 재적 의원의 과반 찬성을 통해 자체적으로 해산할 수 있다.

대법원

국무원

국무원은 대한민국의 행정부이다. 국무원의 정책 결정기구는 내각이며 내각의 장은 국무총리이다.

내각

틀:대한민국 국무원의 내각 구성 (개화) 대한민국 국무원 내각은 국무원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이다. 국무총리, 부총리, 국무장관, 특임장관, 내각사무처장, 기타 국정운영에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자[14]가 내각원이 된다.

정책 통과를 위해서는 내각원 과반의 찬성이 필요하다. 내각원은 전원 국무총리에 의해 임명되며 언제든지 해임될 수 있다.

국무총리


대한민국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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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김옥균 이완용 황헌 김홍집 박영효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유길준 서재필 이승만 손정도 이상설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제15대
양기탁 이동휘 유동열 안창호 김창암
제16대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조만식 여운형 조봉암 윤보선 장면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김성주 장준하 김철 김영삼 김대중
제26대 제27대 제28대 제29대 제30대
이기택 홍숙자 이회창 박봉주 김문수
제31대 제32대
이인제 정병국

고구려 국상 · 고구려 대막리지 · 신라 상대등 · 고려 문하시중 · 조선 영의정 · 대한국 총리

국무총리는 대한민국 행정부인 국무원의 장이다.

국무총리는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부총리, 국무장관, 특임장관, 내각사무처장, 내각원, 헌법재판관 등을 임명, 면직할 수 있으며[15] 중추원을 해산할 수 있으나 중추원이 통과시킨 법률안을 거부할 수는 없다.

국무총리는 새 총선이 있을 때마다 총선 직후 중추원에서의 투표로 선출되며,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위 득표자와 2위 득표자 간의 결선투표를 실시한다. 중추원 의원의 과반수의 찬상으로 불신임돨 수 있으며, 이 경우 총리는 총리직에서 사퇴하거나, 중추원을 해산하고 새 총선을 치룰 수 있다.

부총리

지방자치

틀:대한민국의 광역자치단체 (개화)

도부평의회

경제

농수산업

제조업

광업, 에너지

교통, 무역

노동

사회

문화

군사

외교

한미관계

한일관계

한중관계

한러관계

한만관계

대한민국

역사

수교
한만수교기념식 (1932)[16]

한국과 만주는 만주의 건국 전부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만주를 포함은 중국 전역에서는 온갖 군벌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는데대군벌시대 한국은 만주에서 한국에 우호적인 몇몇 군벌과 단체를 재정적, 군사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중 하나가 장징후이가 이끄는 군벌이었다. 이후 한국이 장징후이 등의 친한파 인사들에게 만주에서의 독립국 건국을 종용했고,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복벽주의 지식인이었던 정샤오쉬와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가 이 움직임에 합류하면서 1927년 입헌군주제 국가인 만주국이 탄생했다.

한국과 만주의 정식 수교는 만주가 건국된지 한참 후인 1931년에야 이루어졌는데, 이는 한국 정부가 만주를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던 중화민국 정부의 눈치를 봤기 때문이다. 다만 정식 수교 이전에도 양국은 서로의 수도에 대표부을 설치해 대사급 대표를 파션한 상태였기에 사실상 대사급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의 시대
만주를 국빈방문해 만주 복식을 입은 한국 각료들 (1938)[17]

만주는 청나라를 계승하는 입헌군주국을 자처했기에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민중의 지지기반이 상당히 불안정하였다. 이로 인해 만주는 더욱 한국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었고 1934년에는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등 만쥬늬 대한 의존이 강화되었다. 반면 한국은 만주에서 자원과 인력을 값싸게 공급받고 한국의 공산품을 판매할 안정적인 시장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는 1930년대 중반까지는 무리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1936년, 이웃한 녹우크라이나에서 한국-녹우크라이나 동맹군과 소련군 사이의 대규모 무력충돌인 치올코우스키 전투가 벌어지자 한국과 만주는 다급해졌다. 그동안 먼 나라 이야기라고 여기던 전쟁이 이웃나라에서까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나라 모두 1930년대를 휩쓴 대공황으로 인해 강도높은 군축을 진행했던 터라 군사적 역량이 크게 감퇴하여 있었다. 특히 상황이 심각했던 만주는 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한국도 코가 석자인 마당에 마땅히 도움을 줄 방도가 없었다.

결국 1940년, 한국, 만주, 녹우크라이나 모두 전쟁에 대한 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다. 소련군과 일본군의 맹렬한 겅격 앞에 세 나라 모두 멸망의 위기에 놓였었지만 독일의 소련 기습침공으로 인해 소련이 앵커리지 평화조약으로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한국과 만주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18]

냉전

앵커리지 조약에서 소련은 한국에는 독소전 개입 금지 외에는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으나 만주에는 중입국 선언을 강요했다. 이로 안해 냉전의 시작과 동시에 한국은 자유진영에, 만주는 제3세계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만주는 강제적으로 중립 선언을 했을 뿐 실제로는 친한 친서방 성향이었는데, 한국이 냉전의 최전방으로서 미국 마셜 플랜의 혜택을 입으며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가 재건에 있어 많은 지원을 받았던 것과 달리 표면상으로나마 중립국이었던 만주는 특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로 인해 아주 조금의 원조와 자체적인 역량을 통해 1950년대 후반까지 전후복구를 해야만 했다. 다만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후복구가 완료된 한국이 만주에 대규모 지원을 퍼붇기 시작했고 만주의 잔후 재건도 1960년대 초반에 마무리된다.

앵커리지 조역으로 인해 양국 간의 동맹조약은 파기되었지만 소련의 침공을 경계하는 양국의 입장으로 양국은 군사 부문에서도 비밀리에 협력했다. 한국은 만주에 비밀리에 각종 무기를 지원했고 교관과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만주군 훈련을 돕기도 하였다. 또 1950년대 후반에 만주 다칭에서 엄청난 매장량을 지닌 다칭 유전이 발견되자 양국은 합자회사를 만들어 공동으로 석유를 개발하였다.

이렇듯 한만 양국은 냉전 시기 공개적으로는 평범한 국가간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물밑에서는 매우 친밀한 상태에서 다양한 협력을 하였다. 1970년대에는 데탕트 분위기에 힘입어 물밑에서만 이루어지건 한만 협력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하였다.

현대
멍훙웨이 수상과 반기문 대통령 (2021)

1980년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트 정책과 대외불간섭 정책으로 인근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를 기회로 한만 양국은 다시 공개적으로 밀착하기 시작했다. 1989년에는 과거 소련의 강요로 파기할 수 밖에 없었던 양국 간의 동맹조약을 한만상호방위조약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고 만주 영내에 한국군이 주둔하였다. 이빨 빠진 호랑이얐던 소련과 경재 개발로 먹고살기 바쁘던 중국은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1991년 소련 붕괴로 녹우크라이나가 독립하자 한만상호방위조약은 녹우크라이나까지 합류하여 극동조약기구 FATO로 발전하였다.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과 만주는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 중 하나로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다방면에서 협력을 거듭하며 공동번영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라고 한국 학자들은 주장한다.

양국 간의 협력

경제
창춘 외곽 한만국경지대의 무역기차역

한국과 만주는 경제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만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 한국이며 만주는 한국의 제5 무역상대국이다.

만주 정부의 주 수입원 중 하나인 다칭 유전은 개발 단계에서부터 한국측과 만주측이 지분을 50 대 50으로 나눠가져 현재까지도 공동운영하고 있으며 수익금도 나누어 갖는다. 한국은 다칭유전의 석유 등 만주로부터 매년 많은 양의 석유를 공급받고 있으며, 과거에는 석탄 역시 만주가 한국에 대량으로 수출했지만 한국이 친환경 정책의 일환으로 석탄 수입량을 줄이고 있다.

만주의 넓은 평야에는 한국 식품기업들이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며 각종 농작물과 가축들을 기르며, 농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한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또 만주는 낮은 인건비를 바탕으로 경공업 제품을 생산하여 한국에 수출한다. 반면 한국은 만주에 자본집약적이며 발달된 기술이 필요한 전자제품, 자동차 등 각종 공업제품과 반도체 등의 첨단제품을 수출한다.

1999년 한국과 만주 사이에 체결된 비자협정으로 양국 간의 왕래에는 별도의 비자가 필요 없어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고, 많은 만주인들이 한국으로 건너와 일을 한다. 이들은 보통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 업종에 종사한다.

만주의 몇몇 시민단체들은 만주의 경제가 한국 경제에 종속되어있다고 비판한다. 이들에 따르면 만주 경제는 한국 경제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한국의 경제상황이 좋은지 나쁜지에 따라 만주 경제도 같이 요동친다. 또 한국의 정부와 기업이 만주의 대한 경제적 의존을 무기 삼아 만주의 정치·경제·외교정책 수립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한만 양국 정부는 부인하지만 여러 경제학자들로부터 일정 부분 사실이라고 인정받고 있다. 반면 이것이 순전히 일반적인 국가 간 관계에서 나타나는 경제적 상호의존이리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도 있다.

외교·안보
악수하는 양국 외교수장[19]
문화

외교공관

한오관계

틀:한오관계 (개화)

각주

  1. ~ 1905년 2월
  2. ~ 1920년 5월
  3. ~ 1944년 or 1945년
  4. 여진족, 몽골족, 일본인, 슬라브족 등
  5. 한성, 동래, 평양, 심양, 인천, 함흥, 대연, 대구, 의주, 남포, 광주, 연길, 대전
  6. 제주특별자치도
  7. 7.0 7.1 7.2 구 태극기
  8. 8.0 8.1 8.2 현 태극기
  9. 구 국가
  10. 현 국가
  11. 만국박람회에서 Korea라는 표기가 확립되었다.
  12. 한국도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일본 등 타 국가에 비해서는 피해가 적었다.
  13. 다만 당시 사회당 소속 총리였던 양기탁은 온건한 수정주의자였다.
  14. 국무총리가 최대 8인까지 지명.
  15. 헌법재판관은 임명만 가능하고 면직은 불가능하다.
  16. 기념식에 참석한 강덕제와 한만양국의 각료들의 사진이다. 저중에 누가 푸이인지는 사진을 올린 쿠리오 본인도 모른다고 한다
  17. 앞줄 중앙이 방문단 단장이었던 부총리 겸 내무성장관 이동녕.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2년 후 전시수상을 맡게 되는 당시 국가안전성장관 김창암
  18. 하지만 녹우크라이나는 평화조약 협상 과정에서 미국의 종용으로 소련에 병합되었다.
  19. 좌측이 당시 한국 외무성장관 김홍균, 우측이 훗날 만주 수상을 역임하는 당시 만주 외무대신 우다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