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로마와 동지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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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와의 휴전으로 여유가 생긴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제국의 영토에 정착해 살던 제국 서방의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침공하였고, 성과를 거두어 아바르족을 제국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인해 피폐해졌던 이탈리아 지역 영토에 행정 기구를 설립하고 라벤나ㆍ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을 각각 총독령으로 만들었다. 이 정책이 훗날 속주같은 제도를 대체하게 된 동로마 제국 테마 제도의 기반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 시기에는 서방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마우리키우스에게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4세를 징계하라고 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
페르시아와의 휴전으로 여유가 생긴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제국의 영토에 정착해 살던 제국 서방의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침공하였고, 성과를 거두어 아바르족을 제국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인해 피폐해졌던 이탈리아 지역 영토에 행정 기구를 설립하고 라벤나ㆍ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을 각각 총독령으로 만들었다. 이 정책이 훗날 속주같은 제도를 대체하게 된 동로마 제국 테마 제도의 기반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 시기에는 서방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마우리키우스에게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4세를 징계하라고 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치세 동안에는 전임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2세의 낭비 때문에 재무정책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예산 절감을 위해 긴축 정책을 펼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588년의 제국 군대 폭동과 599년 아바르족의 포로학살은 모두 마우리키우스의 긴축 정책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결국 602년 제국 군대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새로운 황제인 포카스를 추대하여 마우리키우스는 폐위당했다. 반란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시민들은 이를 지지하였고, 포카스는 원로원과 교회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쫓겨난 마우리키우스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혀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치세 동안에는 전임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2세의 낭비 때문에 재무정책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예산 절감을 위해 긴축 정책을 펼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588년의 제국 군대 폭동과 599년 아바르족의 포로학살은 모두 마우리키우스의 긴축 정책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결국 602년 제국 군대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새로운 황제인 포카스를 추대하여 마우리키우스는 폐위당했다. 반란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시민들은 이를 지지하였고, 포카스는 원로원과 교회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쫓겨난 마우리키우스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혀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포카스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제국을 노리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야만족들의 칩입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해 제국의 쇠퇴를 자초하였다. 결국 포카스도 재위 8년만에 이라클리오스에게 폐위되고 만다.


===정치===
===정치===
바실레우스라 불리우는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국가 원수로써 제한된 실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입헌군주제 개혁 이후 제국의 사실상 실권은 원로원에서 선출되는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ref>개혁 이전 로마 제국 집정관은 황제의 실권에 밀려 그저 공화제적인 유산의 일부로써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안습의 처지였으나, 입헌군주제 개혁이 시행되면서 국가 통치 전반에 옛 로마 집정관의 권한이 부활한 것이다.</ref>
바실레우스라 불리우는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국가 원수로써 제한된 실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입헌군주제 개혁 이후 제국의 사실상 실권은 원로원에서 선출되는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ref>개혁 이전 로마 제국 집정관은 황제의 실권에 밀려 그저 공화제적인 유산의 일부로써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안습의 처지였으나, 입헌군주제 개혁이 시행되면서 국가 통치 전반에 옛 로마 집정관의 권한이 부활한 것이다.</ref>

2021년 7월 7일 (수) 08:0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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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Ῥωμαίων 바실레아 로마이온[*],(라틴어: Imperium Romanum 임페리움 로마눔[*], 혹은 비잔티움 제국(그리스어: Βυζαντινή Αυτοκρατορία 뷔즈단티네: 아우토크라토리아[*]은 발칸 반도 남부, 그리스와 아나톨리아 일대에 위치한 입헌 군주정 국가이다. 유럽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로마 제국이 395년 분할된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혹은 (라틴어: Nova Roma 노바 로마[*]를 수도로 한 동방의 제국을 일컫기도 한다. 서부 유럽의 교황을 위시한 가톨릭 국가들은 과거 노바 로마의 이름이었던 비잔티움(그리스어: Βυζάντιον 뷔잔티온, 비잔티온[*], 라틴어: Byzantium 비잔티움[*])으로 하여금 서유럽 중심의 역사 사관을 위해 비잔티움 제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국은 서쪽으로 세르비아를, 동쪽으로는 아르메니아, 조지아, 이란을, 남부로는 지중해를 접하고 있다.

역사

동로마 제국의 역사는 통일 로마 제국이나 그 이전 공화국 시절의 찬란한 번영도 존재하지만 무엇보다도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열됨으로써, 즉 제국 동부를 기준으로 시작한다. 제국 서쪽과 동쪽 모두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인 호노리우스[1]와 아르카디우스[2]가 받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로마 제국 최후의 장군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야만족 출신의 장군 스틸리코는 충분히 양 제위의 찬탈을 시도할 수 있었지만 테오도시우스 1세의 유산을 두 어린 황제에게 공정히 배분하여 훗날 "마지막 로마인 장군"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호노리우스가 이어받은 서로마 제국은 불과 476년 이민족에 의해 멸망 당했으며, 동부 로마 제국 역시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이민족의 침공을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존립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2세의 긴 재위기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테오도시우스 삼중 성벽이 세워지고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마르키아누스는 제국의 국방력을 증진시켰으며, 레오 왕조의 제노 황제의 2번째 재위 시기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등 혼란을 겪었으나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납세의 기준을 현물이 아닌 화폐로 통일시키는 등의 정책을 펼치면서 제국은 다시 안정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 1세 사후 제위는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유스티누스 1세에게로 넘어갔는데, 유스티누스 1세 황제는 본래 싸움만 하던 무인이라 무식하였다. 유스티누스 1세는 유능하고 똑똑했던 조카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Flavius Petrus Sabbatius)의 도움을 받아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으며 그를 양자로 삼았다. 제국은 유스티누스 1세 재위 후반에는 동고트인들과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다시 한번 위기를 맞게 되었고, 그 와중 건강상태가 악화된 유스티누스 1세 황제는 조카이자 양자인 플라비우스 페트루스 사바티우스를 공동 황제로 삼고 이듬해 사망하여 조카가 그 제위를 이어받았는데, 그가 제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 중 하나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 대제이다.

삼촌(양부)인 유스티누스 1세 사후 제위에 오른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북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고 불가르족이나 슬라브족의 침공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했으며, 로마 제국 영토 복원에 큰 사명감을 가지고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 등의 유능한 장군들을 여럿 등용하여 옛 제국의 영토인 이탈리아 반도 등의 지역을 회복하는 등 정복 정책에 주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황실의 부정 부패를 일소하고 귀족들을 견제하여 황권을 강화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법령 편찬이나 신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3차례에 걸쳐 로마법을 집대성하고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했으며, 단성론에 대하여 정교회와 갈등하였으나 교회 교리와 이론을 정리하였고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비하여 하기아 소피아를 건축하는 등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벌였다.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사후 정교회로부터 시성됨과 함께 '대제' 칭호를 받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현재 동로마 제국 국민들에게도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제위는 그의 조카인 유스티누스 2세에게 넘어갔다. 유스티누스 2세는 9년간 재위했는데, 그의 재위기간은 아바르ㆍ롬바르드족의 침입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쟁으로 힘든 시기가 계속되었다. 578년 유스티누스 2세가 죽자 단독 황제로 즉위한 장군 출신 황제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는 단성론 기독교 탄압을 중지하고 재정을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국가 경영을 방만하게 하여 실패했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도 평화 조약을 맺고자 시도하였으나 연이어 실패하고 아바르족에게도 매년 공물을 바쳤으나 영토를 내주는 등 외교적 실패도 계속되었다. 582년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하면서 유능한 장군으로 티베리우스 2세에게 후계자로 지명받았던 마우리키우스가 제위에 올랐다.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우위를 점했고, 마침 페르시아에서 내전이 일어나 페르시아 황제 호르미즈드 4세가 암살당하고 그 아들 호스로 2세가 제국으로 피신하자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이를 기회로 보고 호스로 2세를 지원하여 제국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전쟁을 매듭지었다.

페르시아와의 휴전으로 여유가 생긴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제국의 영토에 정착해 살던 제국 서방의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침공하였고, 성과를 거두어 아바르족을 제국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또한 롬바르드족의 침입으로 인해 피폐해졌던 이탈리아 지역 영토에 행정 기구를 설립하고 라벤나ㆍ북아프리카 카르타고 지역을 각각 총독령으로 만들었다. 이 정책이 훗날 속주같은 제도를 대체하게 된 동로마 제국 테마 제도의 기반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 시기에는 서방 교회와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마우리키우스에게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네스 4세를 징계하라고 하였으나 황제는 이를 거부했다.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치세 동안에는 전임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2세의 낭비 때문에 재무정책에 큰 어려움을 겪었고 예산 절감을 위해 긴축 정책을 펼치면서 시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588년의 제국 군대 폭동과 599년 아바르족의 포로학살은 모두 마우리키우스의 긴축 정책으로 인해 일어난 일이다. 결국 602년 제국 군대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고 새로운 황제인 포카스를 추대하여 마우리키우스는 폐위당했다. 반란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시민들은 이를 지지하였고, 포카스는 원로원과 교회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쫓겨난 마우리키우스는 소아시아 지역으로 피신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잡혀서 자신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포카스는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제국을 노리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제국과 야만족들의 칩입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해 제국의 쇠퇴를 자초하였다. 결국 포카스도 재위 8년만에 이라클리오스에게 폐위되고 만다.

정치

바실레우스라 불리우는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제국의 국가 원수로써 제한된 실권을 행사한다. 그러나 입헌군주제 개혁 이후 제국의 사실상 실권은 원로원에서 선출되는 집정관이 맡게 되었다.[3]

  1. 둘째 아들.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였다가 12살의 어린 나이로 부황 사후 제국 서부를 상속받아 서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2. 테오도시우스 1세의 장남으로 부황 사후 제국 동부를 상속받아 동로마 제국 황제가 되었다.
  3. 개혁 이전 로마 제국 집정관은 황제의 실권에 밀려 그저 공화제적인 유산의 일부로써 명예직이나 다름없는 안습의 처지였으나, 입헌군주제 개혁이 시행되면서 국가 통치 전반에 옛 로마 집정관의 권한이 부활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