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중 하나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관리자. 문서를 고치려면 이메일 인증 절차가 필요합니다. 사용자 환경 설정에서 이메일 주소를 입력하고 이메일 주소 인증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조선국 설정}} '''베이징 조약'''('''북경조약''', {{llang|zh|北京條約 Běijīng Tiáoyūe}})은 [[제2차 아편 전쟁]](阿片戰爭)의 결과로, 1860년 10월 18일에 [[청나라]]가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은 6개의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이 조약에 따라 청국은 [[영국]]에 [[주룽]](현재의 [[홍콩]] 중심부)을 내주었으며 [[조선국|조선]]이 청나라의 조공국 질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러시아에게는 [[연해주]]를 넘겨주었다. 이로 인해 [[러시아]]가 만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영국은 청나라의 각종 이권을 빼았아 갔으며, [[프랑스]]는 청국 영토 내에서 프랑스인의 우월함을 인정 받고 청국 영토내에서 [[천주교]] 전파 등 포교 활동의 자유를 인정 받았다. ==내용== 1860년 10월 18일, 청나라와 [[제2차 아편 전쟁]]을 치른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천단]], [[이화원]], [[원명원]] 등 베이징 주요 문화재와 주변을 약탈하고, 베이징의 [[자금성]]에 입성하였다. 전쟁에서 패한 청나라는 [[공친왕]](恭親王)을 대표로 내세워 영국 대표인 엘진 경과 프랑스 대표인 그로스 남작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교전 당사자가 아니었던 러시아까지 조약을 중재했다는 핑계로 조약 당사자로 끼어들었다. 영불연합군은 유럽인 죄수들에게 청나라 관원들이 부당한 대우를 했다는 구실로 자금성을 방화할 계획이었는데([[애로호 사건]] 참조), 조약체결 후 그 대신 [[이화원]]과 [[원명원]]을 불살랐다. 이 조약은 1860년 10월 24일에 자금성의 남쪽 건물에서 마무리되었다. 조약은 중국-영국, 중국-프랑스, 중국-러시아 간 조약의 형식으로 각각 맺어졌다. ==공통 조약== {{인용문|*청나라가 비준을 거부한 1858년의 [[톈진조약]] 내용을 비준한다. *톈진을 개항한다. *외교사절의 베이징 주재를 허용한다. *배상금 800만냥을 지불한다. *프랑스에 대해 몰수한 가톨릭 재산 반환을 인정한다. *청나라에 의한 자국민의 해외 이주 금지 정책의 철폐와 이민 승인}} ==개별 조약== {{인용문|'''영국'''<br>1. 주롱반도 남부를 할양할 것.<br>2. '''[[조선국|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서 인정할 것.'''<br><br>'''러시아'''<br>1. [[연해주]]를 할양할 것. }} ==결과== 청은 열강들에게 철도 부설권 등의 수많은 이권을 강탈당하고, [[상하이]] 등의 주요 개항장에는 울며겨자 먹기로 [[조차지]]를 내줘야 했다. 청나라 내부에서도 패전의 충격으로 중체서용(中體西用) 이란 구호아래 [[양무운동]]으로 내부 개혁을 시도하지만을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한편, 조선은 명목상으로나마 [[청나라]]의 조공 질서에 얽매였던 부분을 영국이 대신 해소해 줌에 따라 자체적인 서구화를 추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분류: 조선국 설정]]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Lang (원본 보기) 틀:Llang (원본 보기) 틀:알림 상자 (원본 보기) 틀:인용문 (원본 보기) 틀:일반 기타 (원본 보기) 틀:조선국 설정 (원본 보기) 모듈:Langname (원본 보기) 모듈:Langname/data (원본 보기) 베이징 조약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