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의원
여당 (241)
사회민중당
197석
한국 공산당
44석
신임과 보완 (16)
녹색바람
14석
탐라대중당
2석
야당 (243)
민주당
165석
신민당
35석
이북명단
24석
자유당
14석
무소속
5석
사회민중당

로고
약칭
사회당, 사회민중, SPP (영문)
영문명
Socialist People's Party
창당
1981년 6월 3일 (39년전)
대표
노회찬 魯會燦 (국무총리)
부대표
김문수 金文洙 (전 경기도지사)
원내대표
황교안 黃敎安 (서울 서초을)
사무총장
심재철 沈在哲 (경기 안양 동안갑)
정책의장
박형준 朴亨埈 (부산광역시장)
중앙당사
대한민국 세종특별자치시
당가
사회민중당가 社會民衆黨歌
표어
다 함께 미래로
당색
금색 (#FFCC00)
녹색 (#006838)
민의원
197 / 500 (39%)
도지사
14 / 30 (47%)
도의회
632 / 1,703 (37%)
이념
사회민주주의
민주사회주의
좌익민족주의 (반미)
사회적 시장경제
사회진보주의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익
당원수
증가 180만명 (책임당원 93만명)
국제조직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웹사이트
www.socialist peoples party.co.kr
대한민국 제2공화국
대한민국의 정당
대한민국의 선거

사회민중당(한국어: 社會民衆黨, 영어: Socialist People's Party)은 대한민국사회주의, 진보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1981년 민주당의 독주 체제에 불만을 품은 권영길과 동료 사회주의자들이 창당하였다. 이후 김문수, 차명진, 이재오, 박형준, 노회찬 등 젊은 운동권 대학생들이 참여하면서 인기가 높아졌다. 초반에는 노동법 개악에 반대하며 전투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1990년대 제도권 정당 진입 이후 온건한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선회하였다. 1995년 처음으로 권영길이 총리에 취임하면서 여당이 되었고 현재까지 민주당과 양당 체제를 이루고있다. 총리 노회찬이 속해있는 정당이므로 이 정당은 현재 여당이다. 사회민중당은 녹색바람, 탐라대중당, 한국 공산당 등의 진보정당과 연합을 맺고있다.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되어있다.

노선

기본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미국으로부터의 자주독립도 표방한다. 당 강령 1조를 보면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사회주의로의 노선 전환은 역사의 필연이다'라는 내용이 나와있고, 3조에는 '사회민중당은 미국과 일본을 포함한 모든 제국주의 성향의 국가와의 타협을 거부하며, 독자노선과 민족적 노선을 추구한다'라고 나와있다. 그러나 한국 공산당과는 달리 급진적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성향을 띄는것은 아니며, 1995년 이후로는 자본주의도 일정부분 수용하는 사회민주주의적인 면모를 많이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의 운동권 정당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로 반자본주의와 반미주의 정신은 당 강령 안에 포함시키고 있다.

세부적으로는 당내 사회민주주의 파벌과 민주사회주의 파벌, 그리고 좌익 민족주의 파벌이 존재한다. 혁명보다는 개혁을 주장하는 사회민주주의 파벌은 평등파라고 불리며, 노회찬과 심상정 등의 인사를 포함한다. 민주사회주의 파벌은 사회민주주의 파벌보다 더 급진적이다. 이들은 대체로 반자본주의적인 면모를 띄고, 민주노총과 연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주요 인사로는 김문수, 황교안, 차명진 등이 있다. 좌익 민족 파벌은 민족해방파라 불리고 반미주의를 반자본주의보다 더 앞세우는 파벌이다. 이 외에도 농민들을 중심으로 하는 전농파, 사회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자유파 등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와 미국 중심 헤게모니 체제를 비판하는 입장이기에 미국과는 자주 갈등을 빚는다. 사회민중당은 일정 부분에서는 북유럽 사민주의 정당보다도 더 급진적이라는 평가를 듣지만, 당내 주류는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극좌정당이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역사

1950년대 - 1970년대 적공대 시대 :

한국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승만 정부는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 정당을 탄압하였다. 온건한 사회주의자였던 조봉암은 1956년 대선에 출마해 30% 가량의 득표를 얻었으나, 진보당 사건이라고 불리는 사법 살인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60년대 민주화 혁명으로 사회주의 운동은 합법화되었으나 여전히 반공 정서가 깔려있던 한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고 이끌 지도자도, 지지할 국민들도 없는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고자 1964년 8월 1일 일부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남조선 사회주의 결성대를 조직해 한국 정부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름에서 보여지듯이 이 조직은 남한의 체제를 부정하고 친 김일성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지지 기반이 적었지만, 경상도 일대의 빨치산들에게서 지지를 받으며 점차 세를 불려갔다. 이들은 적공대라는 이름이라 불리며 일본의 적군파와 대조될정도로 큰 조직을 결성했다. 그러나 1972년 정부의 회유책과 강경책으로 인해 적공대는 와해되었고, 조직원들은 모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1970년대 : 남한 사회주의 연맹 시대

1970년대 온건한 민주사회주의자들이 창당한 남한 사회주의 연맹, 줄여서 남사련은 무장투쟁 노선을 포기하고 온건한 유럽공산주의와 민주사회주의 노선으로의 전환을 당 강령에 명시하였다. 하지만 1973년까지는 과격한 노동주의적 성향을 버리지 못해 당 외연 확장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1972년 가혹한 노동 현실에 항의하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을 기린다는 의미로 정당 연구소인 전태일 열사 연구소가 차려졌고, 동시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의 설립으로 든든한 지지 기반이 생겨났다.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저항문학의 등장과 친일 잔재의 청산 등으로 좌파 운동이 크게 부흥하였다. 68혁명의 영향으로 여성주의, 진보주의 운동도 활발해져 남한 사회주의 연맹은 점차 노동자와 사회적 소수자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1973년 이후에는 전국적인 지지도 높아져 전국정당으로서 부상하였다.

남한 사회주의 연맹은 1978년 공식적인 정당으로서 출범하였다. 당명은 민중연합이었고, 그해 치뤄진 총선에서 11.63%를 득표해 2석을 확보하였다. 1979년 민주노총에 이어 한국노총도 민주당 지지를 철회하고 민중연합 지지를 표명하였다. 당원 수는 1980년 10만명을 돌파해, 당원수로는 신민당을 추월한 2위의 당세를 기록했다.

1980년대 창당 : 야당으로서의 사회민중당

1981년 민중연합을 이끌던 이재오 의장은 사회주의 정당의 확산을 위해서 좌익 민족주의 단체와 협력할 의지를 피력하였다. 이에 따라 남한 민족대회와 사회민주연선 등의 반미주의 급진단체가 민중연합에 참가하였다. 당대 민족주의 정당으로서는 가장 당세가 컸던 사회민주연선과 민중연합이 합당해 두 당의 이름을 따와 신당의 이름은 사회민중당으로 정해졌고, 1981년 창당되게 된다. 초대 대표는 문익환 목사였고, 초대 부대표는 이재오였다. 사회민중당은 창당 직후 지지율이 잠시 주춤했지만 민주당의 노동법 날치기 논란으로 지지율이 폭등해 1984년 총선에서 38.55%를 얻어 제1야당으로 발돋움하였다. 1987년 총선에서는 40%대 지지율을 돌파했고, 지속적으로 지지율이 상승해 경상도 지역에서는 도지사직까지 탈환하기에 이른다.

당시 민주당의 일당우위 체제에 피로를 느낀 국민들은 사회민중당을 적극 지지했다. 사회 문인들과 지식인들도 사회민중당 지지 성명을 발표했으며 대표적으로 최인훈과 김수영이 사회민중당을 지지하였다. 민주당은 사회민중당의 급추격이 당황하며 당 노선을 온건화해 자유주의 노선을 표방하겠다고 밝혔지만, 노동자들간의 단결을 통한 사회민중당을 막을수 없었고, 1993년 총선에서는 급기야 당 득표율에서 사회민중당이 민주당을 추월하는(42.56% vs 42.11%) 이변까지 일어났다.

1990년대 : 여당으로의 발돋움

1994년 터진 외환위기로 조순의 민주당 내각은 위기에 처했고, 연일 지속되는 반정부 시위 속에서 민주당의 지지율은 급락하였다. 1995년 조순 내각총리는 조기 총선 실시와 의회 해산, 총리직 사퇴 등을 내걸며 민심을 수습하려하였으나, 1995년 총선에서 사회민중당은 59.32%에 달하는 압도적인 득표율을 받아 단독과반을 차지했다. 단독과반을 차지한 사회민중당은 곧바로 집권했다. 총리직에 오른 권영길은 김일성의 사망과 뒤이은 쿠데타로 붕괴된 북한 지역에 대한 신탁통치 협상, 그리고 과감한 노동 개혁 등을 내걸며 지지율을 높였다. 이러한 노력 끝에 대한민국은 IMF를 조기 졸업하였다. 한국 측의 권영길과 미국 측의 빌 클린턴, 러시아 측의 보리스 옐친, 중국 측의 강택민, 그리고 일본 측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모인 1 + 4자 회담에서 2006년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신탁통치령을 대한민국에 양도한다는 협의가 채결되어 권영길의 지지율은 더욱 올라갔다.

1998년과 2001년 총선에서도 연임에 성공하며 권영길은 김대중 이후 최초로 3선 내각 총리가 되었으며, 2004년 퇴임때까지 50%대를 넘는 높은 지지율을 누렸다. 2004년 총선에서는 단독과반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공산당과 연정해 과반을 확보했고, 운동권의 황태자라고 불렸던 급진 사회주의자 김문수가 총리로 재임하였다. 그러나 김문수는 2006년 통일 이후 혼란을 잘 수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 2007년 총선거에서 민주당에게 권력을 내줘야했다.

2000년대 이후 : 현대 양당 체제

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