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나 정권

리반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4월 9일 (화) 19:36 판 (새 문서: {{아시나 정권}} '''아시나 정권'''({{llang|ja|葦名政權}})은 1495년부터 1680년까지 히사시 지방(檜差地方)에 존속했던 독립 정권이었다. 도읍...)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葦名政權
葦名國, 葦名皇國
아시나 정권
아시나국, 아시나 황국
14951580
아시나 가문 가몬(家紋)
독립 정권(1495~1535) / 사칭 황실(1535~1580)
수도 히라타쿄(平田京)
정치
공용어 중세 일본어
정부 형태 무가정권(1495-1535)
전제군주정(1535-1680)
신황(新皇)
1495-1526
1526-1530
1530-1537
1577-1580

1대 아시나 잇신
2대 아시나 잇켄
3대 아시나 겐이치로
8대 아시나 겐부
역사
 • 국가 찬탈의 난 1493년 ~ 1495년
 • 황조 선언 1535년 7월 15일
 • 헤이랴쿠 전쟁 1533년 ~ 1535년
기타
국교 아시나 신토, 기독교[1]
  1. 1550년 이후 전래됨.

아시나 정권(일본어: 葦名政權)은 1495년부터 1680년까지 히사시 지방(檜差地方)에 존속했던 독립 정권이었다. 도읍은 히라타쿄(平田京)이다. 본래는 에미시(蝦夷)로 여겨지던 소수민족, 아시나야토(葦名人)가 거주하면서 일본 열도(日本列島)와는 고립되어 독립성을 갖추던 이 지방이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오슈 후지와라씨(奧州藤原氏) 정벌에서 공을 세운 타무라씨(田村氏)가 히사시 섬(檜差島) 최남부 지역에 가와라다 진야(河原田陣屋)를 설치한 것이 이른바 찬탈 시대(簒奪時代)의 시작이었다.

이후 타무라씨오닌의 난(應仁の亂)과 함께 센고쿠 시대(戰國時代)가 개막하면서 히사시 지방을 영지로 삼고 모리노헤 성(盛戸城) 건설 과정에서 아시나야토를 수족으로 부리는 등 전횡을 일삼자, 이에 아시나 잇신(葦名一心)이 국가 찬탈의 난(國家簒奪の亂, 1493-1495)을 일으켜 타무라씨를 몰아내어 독립 정권을 탄생시켰다. 아시나 잇신은 스스로 '료슈'(領主)에 올라 히사시 개조(檜差改造) 정책을 실시했으며, 그의 손자였던 아시나 겐이치로(葦名弦一郎)는 '신노'(新皇)라는 직함을 만들어 일본과의 종속적 관계를 차단하고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때부터 아시나 정권은 일본 열도와의 교류 대신, 기독교(基督敎)를 직접 공인하고 니라토(韮門)를 통해 포르투갈(ポルトガル) 및 네덜란드(荷蘭) 사람들과 교역을 시도했다.

1680년, 아시나 신토(葦名神道)의 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받던 일족, 미코카미(御子神) 출신의 에이코 신노(英弘新皇)[1]아시나야토의 진실된 황실로 추대하자는 여론에 의해 아시나 겐부(葦名弦部)가 황실을 '사칭'한 것[2]에 대해 형식적으로 사과를 구하는 한편, 미코카미의 허락을 받아 쇼군(將軍)에 임명되면서 아시나 막부(葦名幕府)가 창건되었다.

각주

  1. 본래 휘(諱)는 미야와 히토(宮和人)
  2. 이때문에 사서(史書)에서 이 시기를 '사칭황실 시대'(詐稱皇室時代)라고 부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