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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아이누인의 왕국이 등장한 것은 [[아테루이]]가 일본 조정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때이다. 787년 6월, 일본 간무 천황의 명으로 정동장군에 임명된 키노 코사미(紀古佐美)가 아테루이의 본거지였던 [[이사와]]를 공격했다. 그러나 조정군은 아테루이가 이끄는 아이누 전사들의 반격으로 하세츠카베노 요시오사(丈部善理)를 비롯한 25인의 지휘관이 전사하고 1,000명이 넘는 군사가 익사해 패퇴해야했다. 787년 9월, 간무 천황은 에미시에게 대패하고 패주한 키노 코사미를 교토로 불러 크게 질책했다. 그 후로 801년까지 수차례 아테루이의 아이누인 왕국을 정복하기 위한 군사를 보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802년, 간무 천황은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와 정이대장군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를 필두로 한 토벌군을 재차 출정시켰다. 무려 4만 명 규모의 조정군은 이사와 근교에 성을 세우고 공성전을 유도했다. 그러나 아테루이는 성을 우회해 일본 조정 치하에 있던 여러 마을을 약탈하며 조정군을 성 밖으로 유인했다. | |||
===동북아 대침공=== | ===동북아 대침공=== | ||
===가마쿠라 막부의 용병=== | ===가마쿠라 막부의 용병=== |
2021년 12월 18일 (토) 01:09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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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누모시르 공화국(아이누어:アイヌモシル, 일본어: アイヌモシリ共和国, 러시아어: Республика Айны-Мосир), 약칭 아이누모시르(아이누어:アイヌモシル)는 동북아시아 오호츠크 해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아이누모시르 공화국은 아이누모시르 섬, 카르 푸트 섬, 쿠르 열도와 그 부속 도서로 구성되어 있는 군도 국가이다. 국토의 총 면적은 166,419.02km²이며, 인구는 약 8,630,000명으로 동북아시아에 위치한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인구 밀도를 가진 국가이다. 러시아, 일본과 해상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두 국가의 언어를 모두 공용어로 채택할 정도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은 아이누이고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삿포로이다. 아이누모시르 섬 남부의 일부분을 제외하면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냉대 습윤 기후에 속하는 매우 추운 국가이다. 이러한 기후 덕분에 아이누모시르 공화국은 눈과 얼음에 관련된 관광 산업이 주요 산업 중 하나이며, 스키와 아이스하키 같은 동계 스포츠의 인기가 많다. 또한 아이누모시르는 최고의 복지 제도를 자랑하는데 덕분에 '아시아의 북유럽'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국명
국명인 아이누모시르(アイヌモシル)는 아이누어로 "인간의 땅"이라는 의미로 아이누모시르 공화국의 영토를 구성하고 있는 아이누모시르 섬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아이누모시르 공화국은 아이누인의 영웅인 아테루이가 아이누 부족들을 통합해 아테루이 우타리를 세우기 전까지 공식적인 국명이 존재하지 않았다. 789년 일본 조정의 원정군을 물리친 후, 아테루이는 "동포"라는 뜻의 "우타리"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웠고 그 후로도 계속 "우타리"나 "아이누"로 불렸다. 아이누모시르를 국명으로 처음 채택한 것은 아이누 해방군이다. 보신 전쟁 당시 아이누모시르 섬에 있던 에조 공화국이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 합병된 후, 아이누 해방군이 1920년 일본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독립 선언문에 국명으로 "아이누모시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배해 독립하면서 아이누모시르는 임시 정부에 의해 정식 국명으로 채택 되었다.
역사
아테루이의 등장
최초의 아이누인의 왕국이 등장한 것은 아테루이가 일본 조정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때이다. 787년 6월, 일본 간무 천황의 명으로 정동장군에 임명된 키노 코사미(紀古佐美)가 아테루이의 본거지였던 이사와를 공격했다. 그러나 조정군은 아테루이가 이끄는 아이누 전사들의 반격으로 하세츠카베노 요시오사(丈部善理)를 비롯한 25인의 지휘관이 전사하고 1,000명이 넘는 군사가 익사해 패퇴해야했다. 787년 9월, 간무 천황은 에미시에게 대패하고 패주한 키노 코사미를 교토로 불러 크게 질책했다. 그 후로 801년까지 수차례 아테루이의 아이누인 왕국을 정복하기 위한 군사를 보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802년, 간무 천황은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와 정이대장군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를 필두로 한 토벌군을 재차 출정시켰다. 무려 4만 명 규모의 조정군은 이사와 근교에 성을 세우고 공성전을 유도했다. 그러나 아테루이는 성을 우회해 일본 조정 치하에 있던 여러 마을을 약탈하며 조정군을 성 밖으로 유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