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요약 없음 |
(→전개) |
||
50번째 줄: | 50번째 줄: | ||
= 배경 = | = 배경 = | ||
= 전개 = | = 전개 = | ||
==의주성 전투== | |||
==백마산성 전투== | |||
==빠르게 찾아온 공세종말점== | |||
==청군의 후퇴를 가로막다== | |||
= 결과 및 영향 = | = 결과 및 영향 = | ||
{{인용문7|'''당태종을 물리친 고구려의 후손 삼한 태왕이 태후께 삼가 묻습니다. 무탈하십니까?<br>退唐太宗高麗之孫三韓太王敬問太后無恙'''|1868년 새해 [[문조]]가 서태후에게 보낸 서신 첫문장<ref>흉노의 묵돌 선우가 한문제에게 보낸 서신을 차용한 것이다. 문조 황제는 고구려, 묵돌의 서신 차용 같은 중국 입장에서는 몹시 화날만한 요소를 서신에 넣어 패배한 서태후를 조롱하였다.</ref>}} | {{인용문7|'''당태종을 물리친 고구려의 후손 삼한 태왕이 태후께 삼가 묻습니다. 무탈하십니까?<br>退唐太宗高麗之孫三韓太王敬問太后無恙'''|1868년 새해 [[문조]]가 서태후에게 보낸 서신 첫문장<ref>흉노의 묵돌 선우가 한문제에게 보낸 서신을 차용한 것이다. 문조 황제는 고구려, 묵돌의 서신 차용 같은 중국 입장에서는 몹시 화날만한 요소를 서신에 넣어 패배한 서태후를 조롱하였다.</ref>}} | ||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안그래도 오랑캐라 깔보던 서구 국가들에게 패배를 거듭하던 청나라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절망적 분위기에 빠져들었으며 뚜렷한 멸망기로 접어든다. |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안그래도 오랑캐라 깔보던 서구 국가들에게 패배를 거듭하던 청나라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절망적 분위기에 빠져들었으며 뚜렷한 멸망기로 접어든다. |
2023년 11월 29일 (수) 13:19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
---|
청조 멸망사 |
[ 펼치기 · 접기 ]
|
압록강 전투 鴨綠江戰鬪 Battle of Yalu-River | |||||
---|---|---|---|---|---|
날짜 | |||||
1867년 12월 20일 ~ 1월 7일 | |||||
장소 | |||||
의주성, 압록강 하구 일대 | |||||
교전 세력 | |||||
대한국 | 청나라 | ||||
지휘관 | |||||
문조 도원수 김병오 평안도병마절도사 우순례 의주현감 겸 방어사 이원적 영장 김길문 아산보 만호 채수경 |
동치제 서태후 양람기주 아이신기오로 발리 우익기수 워이기야 양구리 제독 이혁성 | ||||
병력 | |||||
8만 5천여명 | 9만여명 | ||||
피해 규모 | |||||
5천여명 사상 | 8만여명 사상 | ||||
결과 | |||||
청나라의 패배 | |||||
영향 | |||||
양무운동 중단 한국의 남만주 일대 진출 교두보 마련 한국의 대유럽 독자외교 개시 |
개요
배경
전개
의주성 전투
백마산성 전투
빠르게 찾아온 공세종말점
청군의 후퇴를 가로막다
결과 및 영향
당태종을 물리친 고구려의 후손 삼한 태왕이 태후께 삼가 묻습니다. 무탈하십니까? 退唐太宗高麗之孫三韓太王敬問太后無恙 |
1868년 새해 문조가 서태후에게 보낸 서신 첫문장[1] |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안그래도 오랑캐라 깔보던 서구 국가들에게 패배를 거듭하던 청나라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절망적 분위기에 빠져들었으며 뚜렷한 멸망기로 접어든다.
- ↑ 흉노의 묵돌 선우가 한문제에게 보낸 서신을 차용한 것이다. 문조 황제는 고구려, 묵돌의 서신 차용 같은 중국 입장에서는 몹시 화날만한 요소를 서신에 넣어 패배한 서태후를 조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