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청조 멸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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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 전투
鴨綠江戰鬪
Battle of Yalu-River
날짜
1867년 12월 20일 ~ 1월 7일
장소
의주성, 압록강 하구 일대
교전 세력
대한국 청나라
지휘관
문조
도원수 김병오
평안도병마절도사 우순례
의주부사 겸 방어사 이원적
영장 김길문
아산보 만호 채수경
동치제
서태후
양람기주 아이신기오로 발리 †
우익기수 워이기야 양구리 †
제독 이혁성
병력
8만 5천여명 9만여명
피해 규모
513명 사망
120명 부상
8만 5천여명 사상
결과
청나라의 패배
영향
양무운동 중단
한국의 남만주 일대 진출 교두보 마련
한국의 대유럽 독자외교 개시

개요

압록강 전투는 한국이 내부적으로 칭제건원을 선포하자 이에 반발한 청나라가 정벌을 명분으로 침공하여 발생한 여러 전투를 아울러 부르는 명칭이다.

한국사 최초로 근대식 군대가 투입된 전투로,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한국은 청과의 조공군신 관계를 끊고 자주적 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배경

전개

1867년 12월 20일, 팔기군 양람기 기병대 2만명을 시작으로 청군이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양람기는 빠르게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남하하고 나머지 녹양군은 둘로 쪼개져 하나는 의주성을 포위하고 하나는 양람기를 따라 남하했다. 그러나 청군의 전략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한국측은 이미 압록강 부근에 9만명에 가까운 대군을 여러 부대로 쪼개어 배치하고 있었고 청군이 어떻게 움직일지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군이 선택할 수 있는 진격로는 크게 세 곳이었다. 첫번째는 내륙길을 따라 구성으로 가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피현을 지나 해안길을 따라 가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압록강을 따라 남하한뒤 용천을 통해 해안길로 향하는 길이었다. 청군은 정탐병을 보내 진격로를 설정하려 하였으나 내륙길은 다수의 보병과 포병대가 지키고 있었으며, 두번째 길에 보낸 정탐병은 돌아오지 않았다.[1] 두 곳 다 진격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양람기주 발리는 마지막 경로로 진격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이 의도한 대로였다. 내륙길에는 약 5천여명의 보병이 있긴 했으나 두번째 길은 천여명에 불과한 궁수와 조총부대가 지키고 있어 마치 상당한 군세가 있는 것처럼 청군을 기만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12월 21일 새벽, 양람기 기병대는 압록강을 따라 서진하기 시작했고 후위는 녹양군 보병대가 지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청군은 한국을 터무니없이 얕보고 있었다. 수도인 한성 정도를 지키고만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고 제1목표는 참제한 문조를 사로잡는 것이었고 실패하더라도 대동강 일대만 쑥대밭으로 만든 뒤 정신승리하고 돌아갈 심산이었다.

결과 및 영향

당태종을 물리친 고구려의 후손 삼한 태왕이 태후께 삼가 묻습니다. 무탈하십니까?
退唐太宗高麗之孫三韓太王敬問太后無恙
1868년 새해 문조가 서태후에게 보낸 서신 첫문장[2]

청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하였다. 안그래도 오랑캐라 깔보던 서구 국가들에게 패배를 거듭하던 청나라는 분위기를 환기하려 일으킨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절망적 분위기에 빠져들었으며 뚜렷한 멸망기로 접어든다. 게다가 서태후는 그녀를 지지하던 양람기의 주력 기병대가 전멸함으로써 국가적, 정치적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아들 동치제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곧바로 쫓겨날 뻔 했다.

  1. 주둔하고 있던 한군 부대에게 사살당했을 것이다.
  2. 흉노의 묵돌 선우가 한문제에게 보낸 서신을 차용한 것이다. 문조 황제는 고구려, 묵돌의 서신 차용 같은 중국 입장에서는 몹시 화날만한 요소를 서신에 넣어 패배한 서태후를 조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