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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3일 (월) 20:13 기준 최신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만국 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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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국 초대 영도인
대만국 초대 총통
대만국 2대 국무총리
대만성 민정장관
양진숙
梁眞肅
화식 독음 량전수 (liáng zhēnsù)
직업 정치가, 관료
출생 1893년 8월 19일
청나라 푸젠성 대만부
사망 1947년 1월 5일 (53세)
대한국 북강성 평흥 평성감옥
학력 국립한성대학 법학과
가족관계 배우자: 송안명
슬하 1남 2녀
재임
대만성 민정장관
1936년 2월 8일 ~ 1938년 7월 15일
대만국 총통
1938년 7월 20일 ~ 1943년 1월 17일
대만국 국무총리
1940년 1월 6일 ~ 1943년 1월 17일
대만국 영도인
1940년 4월 7일 ~ 1943년 1월 17일

개요

대만성 한화계 출신의 한국의 정치인, 관료이자 괴뢰 대만국의 우두머리를 맡았었던 독재자.

한국의 중앙정부가 실시한 대만동화정책의 일환으로 대만성 화계 출신으로서 본토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고 민정장관을 역임하는 등 유능한 인물이었지만 권력욕으로 인해 아시아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제국에 적극 협조하여 대만인들의 강제징집, 징용을 묵인하였으며 반대파를 학살한 죄, 반역죄를 물어 전후에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생애

1893년 8월 19일 대북부(臺北府, 현 송안)에서 태어났다. 자영농이었던 아버지 양화진(梁華㻸)은 농부였는데 의화단 운동 이후 대만이 한국령으로 편입되자 희귀한 과일들을 대량 재배하여 총독부에 납품하며 점차 부를 쌓기 시작했다. 1900년대 중반부터 대북은 한국 중앙정부에 의한 개발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는 이에 편승하여 부동산과 건설업에 투자, 1920년대 초에는 대만섬 내의 화계 주민 중에서도 손에 꼽는 갑부가 되어있었다. 여담으로 현재 대만성에서 가장 거대한 금융지주회사인 오산(五山)이 바로 양화진이 세운 회사이다.

양진숙은 장남이었고 후에 밑으로 1명의 남동생과 3명의 여동생이 더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자였던 것과는 별개로 부자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매일 어머니를 내팽개쳐두고 여자를 끼고서 술을 마시고 노름하는데 돈을 흥청망청 쓰며 가족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은 어느정도 지켰는지 사업은 계속 유지, 확대되었고 어머니와 가족들은 모자랄 것 없는 삶을 이어나갔다. 그 덕에 양씨 형제들은 한국의 신식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양진숙은 성적이 가장 우수했는데 그덕에 국립한성대학 법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1943년 1월 7일 한국군이 기륭시에 상륙하여 대북으로 남진하자 곧바로 대남으로 천도를 선포하고 항전을 주창하였으나 일본제국이 대만섬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에 공허한 구호였다. 1월 13일 대남에서 그는 전열을 가다듬고 2천명의 군인을 모으는데 성공했지만 물자가 부족했고 당연히 5만명이 넘는 한국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괴뢰정부내 많은 인사는 항복, 강화로 기울었고 양진숙도 이에 수긍하여 곧바로 투항으로 선회하였다. 하지만 1월 17일, 그를 축출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덜 수 있다고 생각한 괴뢰정부내 일부 세력이 수십명의 군인과 정변을 기도하여 양진숙의 영도인 자격을 박탈했다. 그는 죽림에 감금되었고 그해 6월 자치정부가 해산되자 곧바로 한국 본토로 압송되어 심양에 위치한 심양감옥(현 심양서부교도서)에 수감되었다. 그는 자기변호에 집중하며 여러 서적을 쓰는등 집필 활동을 했지만 결국 모두 출판금지 처분을 받았다.

1946년 5월 도쿄군사재판이 열리자 검사단은 한국 정부에게 양진숙이 법정에 출석하도록 도움을 달라 요청하였으나 한국 정부는 자국민이라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 외환과 내란의 죄목으로 기소했고 1심부터 모두 사형을 언도받아 이듬해 평성감옥(현 영강교도소)으로 이감된 뒤 처형되었다. 민간인 신분이었던 지라 원칙대로라면 교수형에 처해졌어야 하나 교수대가 공사중이었던 탓에 형집행인이 그대로 공터로 끌고가 총기로 형을 집행했다. 향년 53세. 유해는 반역자라는 이유로 고향으로 보내지지 않고 아직까지도 영강교도소 터에 자리한 공동묘지에 매장되어있다.

양진숙 체포 이후 그의 아내 송안명도 3개월간 한성중앙감옥에 갇혀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고 곧바로 자녀 3명과 함께 유구부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그나마 중앙정부가 양진숙의 오산에 대한 재산권 일부를 인정하여 그의 처형 이후 아내에게 상속될 수 있게했고 덕분에 대단히 풍족한 삶을 살았다.

1974년 송안명 사후 장남 양효걸이 전후에 출판을 금지당한 양진숙의 회고록에 송안명의 수기와 회고, 일기와 주석을 추가하여 <양진숙 회고록: 아내의 편지>이라는 제목으로 재출판을 신청하였고 출판이 허가되었다. 양효걸은 모친의 서문을 빌려 양진숙의 행동을 옹호하거나 변호하려는 것이 아니라 전쟁 당시의 그의 행동 기록을 남기자는 취지에서 출판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송안명의 서술에 따르면 당시 양진숙의 행동에 대해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재출판한 뒤 송안명의 양진숙에 대한 옹호적 서술은 거의 없었던데다가 밀도있고 현장감있는 서술로 전시 사료로써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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