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를 위하여 - 대한

멜로비니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9월 14일 (화) 17:38 판 (→‎역사)
대한
大韩 | Korea
제국 1845~1950 민국 1950~현재 국장
守护东方的白虎之国
동양을 수호하는 백호의 나라
상징
국가 여명의 시대
국화 오얏꽃 → 무궁화
역사
• 칭제건원 1845년
• 보신전쟁 개입 1869년
• 제국선포 1870년
• 한러전쟁 1904년~1905년
• 신해혁명 개입 1911년~1912년
• 1차 세계대전 1915년~1918년
• 적백내전 개입 1918년~1922년
• 한일우호조약 체결 1925년
• 2차 세계대전 1942년~1945년
• 민본국정 선언 1950년
• 국공내전 개입 1951년~1953년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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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2,815,400 km2
수도 서울
최대도시 심양 - 1492만 8250명(2020)
접경국 러시아 • 중화연방 • 몽골 연방 공화국
일본 민주 공화국 • 아이누 공화국 • 유구 공화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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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전체 인구 365,125,500명(2020)
민족 구성 한국인 95%
일본인 2.5% • 러시아인 1.5% • 중국인 1%
인구 밀도 129.68명/km2(2020)
언어 모국어 한국어
외국어 영어 • 일본어 • 러시아어
종교 국교 없음
무교 45% • 불교 25%
개신교 21% • 기독교 9%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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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조선식 입헌군주제1845~1950
의원내각제 • 양원제 • 다당제 • 성문법주의
황제 이청
정부 요인 총리
국가원수
김구초대 → 박동호현재
상원의장 이승만초대 → 김사헌현재
하원의장 신익희초대 → 최진철현재
대법원장 김병로초대 → 김안수현재
전략사무국장 이범석초대 → 홍현현재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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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목 GDP 전체 GDP 12조 8520억$(2020)
1인당 GDP 35,198$
GDP (PPP) 전체 GDP 15조 7550억$(2020)
1인당 GDP 43,149$
화폐 공식 대한민국 원(₩, WON)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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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유엔 상임이사국
법정연호
서력기원
시간대 UTC+9 (대한민국 표준시)
도량형 SI 단위계
운전석
(통행방향)
왼쪽(우측통행)
ccTLD
.kr, .한국
국제 코드
410, KOR, KR
국제 전화 코드
+82
위치

개요

대한(大韓)은 1845년 6월 6일부터 1950년 6월 25일까지 사용된 조선의 국명이다.

조선의 23대 국왕인 혜종이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변경하였다. 즉 조선에서 그대로 이어진 나라다.

한국사의 마지막 제국이며 민본국정 이후 제국에서 민국으로 현재까지 이어진다.


2차 조청전쟁에 승리한 조선은 청나라와의 봉신관계를 끝내고 자주적인 나라로 변모하였으며 동시에 1차 • 2차 조청전쟁에 대한 반대파들을 숙청에 성공해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이듬해 1850년 6월 6일 청나라 베이징 자금성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1950년 2차 세계대전 종전 5주년에 대한제국의 7대 황제인 광무제(고종)가 민본국정을 선언하고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전환되어 현재까지 이어진다.

국호

국명은 대한(大韓)으로, 대한은 삼한을 일컫는 다른 말로써 한반도 전역을 이르는 말이다.

현대인들은 삼한이 마한 • 진한 • 변한이란 걸 알고 있지만, 삼국시대 후반 당시에는 의미가 변형되어 고구려 • 백제 • 신라를 삼한이라고 불렀고, 이후 남만주를 차지한 조선이 옛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했다하며 전국에 소식을 전할 당시에 "삼한일통"이라 적어 보내었기 때문에 '한'은 한민족의 영역 전체를 의미하는 별칭으로도 쓰인다.

그 후 영의정 권돈인이 칭제건원에 대한 안건을 올렸으며 이는 조정뿐만 아니라 전국각지로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혜종은 칭제건원을 결심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이라 정했으며 "동양"이라는 연호을 사용하게 된다.

국기

대한제국 시절에 사용된 국기는 청천광명삼한기(晴天光明三韩帜)이고 "대한의 백성들이 세상을 빛나게하리"라는 뜻이며

대한민국부터 사용된 태극기(太极旗)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대한제국군의 최고명예훈장에서 디자인을 따와 만들어진 국기이다.

사실 태극기는 일본내전부터 사용되어 왔었는데 제국기를 회손 할 수 없다고 파병군이 항의하자 호조와 병조에서 만들어진게 시초이다.

국장

대한 황실 상징이자 국장은 이화문의 오얏꽃 문장(李花紋)이다.

오얏꽃이 황실 문장으로 고정되면서 대한민국의 초대총리인 김구가 제시한 무궁화에 태극문양을 더해 만들어진 국장이다.

당시 이승만 상원의장이 제시한 매화꽃이 흐지부지되자 이승만이 국회에서 난동을 부린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사


대한의 주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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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교전세력 결과
보신전쟁
1869
도쿠가와 막부 대한제국의 큐슈 획득과 일본제국의 성립
신해혁명
1911~1912
청나라 청나라 멸망, 장강 남북으로 중화민국과 중화연방 수립
1차 세계대전
1915~1918
독일제국과 동맹국 유럽의 전제군주제 몰락 • 국제 연맹 창설
적백내전
1918~1922
볼셰비키 정부 러시아령 외만주 획득 • 소비에트 연방 결성
2차 세계대전
1942~1945
일본제국과 추축국 미국과 소련의 냉전 체제 • 식민제국의 몰락 • 유엔 창설
국공내전
1951~1953
중국 공산당 국민당의 승리 • 간쑤성의 공산당 잔당과 몽골의 연방공화국 수립


일본 내전 개입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내항한 이른바 흑선내항 사건은 도쿠가와 막부가 미국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지키지 못했던 사건이자, 각 번을 힘으로 찍어누르던 막부의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사건이었다. 더불어 막부는 1858년 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덴노를 무시하고 조약도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으므로 당시 일본 각 지방 번에서 왕성하던 국학을 신봉하던 젋은 무사층과 조선사대주의를 신봉하던 쓰시마 번과 큐슈 북부 번에서 커다란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후 도쿠가와 막부는 번들을 조기에 탄압하여 국학파와 조선파, 소수의 친미파들을 대거 숙청하기에 이른다. 이에 반발하며 1868년 쿠데타를 거행했으며 국학파와 조선파는 임시동맹을 맺어 도쿠가와 막부에 반기를 들게 된다. 이미 미국과 의견을 조율하던 대한이 신정부군에 참전하여 도쿠가와 막부는 빠르게 멸망했으며 신정부군은 일본제국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이때 신정부군의 국학파와 조선파는 정한파와 친한파로 나누어지는데 친한파 번들이 일본제국과의 통합을 거부하며 큐슈를 발빠르게 장악해 대한에 입조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제국의 친한파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이후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제국이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계기가 된다.


제국선포
일본내전에 개입 이후 조공국이 생긴 대한은 1870년 1월 5일에 서양식 궁전인 덕수궁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선포한다. 여기서 큐슈연합은 행정권만 가지고 외교권과 군사를 대한제국이 행사했고 현대에선 대한민국의 영토이기에 한국사에 포함된다. 일본사에선 아예 없거나 작게 포함하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구주(큐슈)에서 대학살을 벌인 일본이 이를 감출려고 하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의 전쟁으로 촉발되어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었다지만 사실상 유럽에서의 전쟁이라고 보기도 한다. 대한제국은 당시 프랑스와 동맹이였고, 일본은 영국과 동맹이였기 때문에 두 나라 동시에 참전하였다. 대한제국은 유럽에 주력했으며 일본은 아시아에 주력했다. 당시 대한제국은 유럽의 선진기술을 원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기술공유와 인적자원을 약속받고 유럽에 파병을 보내었으며 승전 이후 독일제국의 기술과 공장을 배상금으로 획득했다. 일본은 팽창주의을 선호하여 칭타오와 웨이하이웨이, 대만을 차지했으며 강대국들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아 류큐국을 일본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기에 이른다. 류큐국은 사실상 대한제국이 보호했지만 일본제국이 영국과 미국, 프랑스를 설득하여(독일과 단독협상한다고) 류큐국을 병탄하였다.


러시아 내전 개입
적백내전이라고도 불리며 볼셰비키가 정권을 탈취한 1917년 10월 25일을 시작으로 본다. 대한제국은 1차세계대전 승전 후 백군편으로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였다. 이에 블라다미르 레닌은 러시아령 외만주를 회유책으로 제시했으며 이미 1차 세계대전과 내전개입으로 인명피해가 막심한 대한제국은 회유책을 받아들여 내전에 개입한 군대를 철수한다. 이때 일본제국이 사할린을 무단점유하였지만, 유럽지역 러시아를 간수하기 바빴던 소련은 당시 사할린에 소극적이었다. 레닌은 러시아령 외만주와 사할린 영유를 로마노프 왕조의 제국주의에 의한 불법 점유라고 주장했고, 일본에게 공식적으로 사할린 섬 전체를 반환하려고 했지만 대한제국의 압력에 일본은 북사할린의 석유개발권만 획득하고 반환과 함께 소련을 승인하면서 실행되지는 않았다.


한일우호조약 체결
당시 일본의 팽창을 저지하던 대한제국의 3대 황제 광무제가 죽고,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효현태자(영태제)가 4대 황제로 즉위해 일본에 대한 외교방침이 수정되게 된다. 이에 일본은 외교특사를 보내어 영태제의 즉위를 축하했으며 양국간의 우호조약을 체결하자고 요청한다. 조정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25년 11월 17일 대마도(쓰시마)에서 한일우호조약이 체결되었다. 한일우호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일양국은 평화와 안전과 정의를 위태롭게 하지 않는 방법으로 평화적 수단에 의하여 해결한다.
제2조 한일양국은 타국의공격에 의하여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어느 당사국이든지 인정할 때에는 언제든지 서로 지원한다.
제3조 한일양국은 서로의 영토에 대한 영유권을 인정하며 서로의 영토에 외교적, 군사적 행동을 금지한다.
제4조 대한제국은 구주(큐슈)를 일본에 반환하며 유구국(류큐국)과 북사할린에 대한 영유권과 개발권을 인정한다.
제5조 일본제국은 대마도(쓰시마)에 대한 대한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며 구주(큐슈)반환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한다.
제6조 한일양국은 서양열강의 침략에 대비하여 대한은 육군, 일본은 해군에 투자하여 상호 방위에 할애한다.
제7조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한일양국은 타 당사국에 통고한 후 조약을 종지(終止)시킬 수 있다.

이 조약의 문제점으로는 일본제국은 구주(큐슈)반환에 대한 보상금을 2차 세계대전까지 보상금 전체의 10%밖에 지급하지 않았으며, 대한제국이 해군을 포기함으로써 이후 벌어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강력한 일본해군에 대응하지 못해 경상도를 빼앗기는 대참사까지 벌어졌다. 일본은 부산만공격 하루전에 조약파기와 함께 선전포고를 대한제국에 통보했다. 이후 대부분의 조약은 통고한 후 1년뒤 조약을 종지하도록 수정되어 지금까지 사용되고있다.


2차 세계대전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중심의 추축국에 의해 발발하고, 이에 미국과 소련 중심의 연합국이 맞서면서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

공사중

자연환경

본토 및 부속도서

생태

기후

자원

인문환경

인구

평균수명

언어

종교

행정구역

1820-1875 1875-1900 1900-1922 1922-1930 1930-1940 1940-1950 1945-2020

정치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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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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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