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장:블랑슈/퓨처테크: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91번째 줄: 91번째 줄:
조직 체계 개편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 심상교는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은 음악사업부의 음악 활동과 연동시킬 수 있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음악 방송을 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 사업이나, 음악인과 관련된 기사를 싣을 수 있는 잡지 사업 등이 주로 제안되었다. 심상교 또한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기업을 인수하여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인수된 기업이 바로 대일운송이었다. 그룹최고회의는 대일운송의 인수를 통해 타 사업부들의 유통망을 자주화하고, 특별한 운송(비밀 보장을 해야 하는 경우,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경우 등) 환경에서의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다. 대일운송은 237년 4월 24일 인수되어 미래운송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에 합류했다.
조직 체계 개편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 심상교는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은 음악사업부의 음악 활동과 연동시킬 수 있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음악 방송을 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 사업이나, 음악인과 관련된 기사를 싣을 수 있는 잡지 사업 등이 주로 제안되었다. 심상교 또한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기업을 인수하여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인수된 기업이 바로 대일운송이었다. 그룹최고회의는 대일운송의 인수를 통해 타 사업부들의 유통망을 자주화하고, 특별한 운송(비밀 보장을 해야 하는 경우,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경우 등) 환경에서의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다. 대일운송은 237년 4월 24일 인수되어 미래운송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에 합류했다.


그러나 출판사는 마땅히 인수할 기업이 없었고, 새로 창립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10년 후인 247년 4월 24일에는 미래출판사가 창립되었다. 미래출판사가 가장 먼저 내놓은 것은 음악을 주제로 다루는 잡지인 '음악이 흐르는 곳' 이었다.
그러나 출판사는 마땅히 인수할 기업이 없었고, 새로 창립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10년 후인 247년 4월 24일에는 미래출판사가 창립되었다. 미래출판사가 가장 먼저 내놓은 것은 음악을 주제로 다루는 월간 잡지인 '음악이 흐르는 곳' 이었다. 출판 이후 지금까지 이 잡지는 계속 발간되어, 현재는 1000호를 돌파했다. 미래음악사가 영세 음악가들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처럼, 미래출판사도 영세 작가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취했다. 가령 책 출판 비용을 할인해 주거나, 교정/검열 등 어려운 일들을 도와 주는 서비스와 같은 것들을 제공했다.
 
 


미래출판사를 창립하고 몇 년 지난 254년 6월 19일, 2차 대분쟁이 발발하며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든다. 세화국은 전쟁 초기 패전을 거듭하며 명월부 방어선까지 밀리게 된다. 성해시를 잃게 된다면 항구를 적에게 내주게 되며, 이는 곧 상륙이 용이해져 진군이 더 빨라질 것임을 의미했으며, 이 경우 세화국의 멸망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미래기술 그룹은 최소한의 인력만 남긴 채 대부분의 인원이 전선 후방인 청단시로 이동했다.<ref>전후에도 청단시는 미래기술 그룹의 제2 사옥이 되었고, 현재도 성해시 본부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ref>  미래기술 그룹은 2차 대분쟁 시기 문화 계열 사업부들이 프로파간다나 정훈교육 자료 등을 제작했고, 군수 관련 전자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미래기술 그룹은 전쟁의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전시경제였지만, 미래전자를 제외하면 평상시와 하던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부 직원이 징병되었으나, 대다수의 직원들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업무를 처리하며 나라를 위해 힘썼다.


전쟁이 끝나고, 미래기술 그룹은 평상시로 돌아왔다. 전후 문화 산업이 활황을 겪으며 미래기술 그룹은 큰 수익을 얻었다. 경영 사정이 나아진 미래기술 그룹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세 확장을 꾀했다. 그룹최고회의에서는 문화 산업 계열의 새로운 사업을 고려했으나, 심상교는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생각했다. 심상교는 당시 전후 수요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성해중공업의 인수를 주장했다. 그룹최고회의 구성원들은 반대했지만, 심상교는 문화 산업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심상교의 설득에 그룹최고회의는 성해중공업의 인수를 결정하였고, 273년 6월 31일 성해중공업 인수가 발표되었다.


== 이전 역사 ==
== 이전 역사 ==

2023년 10월 9일 (월) 22:54 판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이 글은 제이위키 사용자 블랑슈의 가상 기업 FutureTech Group과 관련된 문서입니다. 위키 문법이나 내용 상의 오류, 편집 지침 위반 등의 중대한 사유가 아니라면 수정을 가급적 자제해 주세요. 혹시나 내용을 수정해야 하는데 수정 할 자신이 없다면 사용자 토론 문서를 통해 연락해 주세요. 확인하는 대로 수정해 두겠습니다.
2022년 10월 4일 00:50 업데이트 / 이 문서의 내용은 현실의 단체 등과 이름 등이 겹칠 수 있으나 현실과는 관련이 없는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개요

블랑슈가 연재 중인 가상 기업 FutureTech Group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주의: 퓨처테크의 세화국 편입으로 인해 기존 설정이 다수 변동되었습니다. 기존 설정은 별개의 문서에 보존해 두겠습니다.

본문

그룹 결성 이전(제1기)

미래음악사의 창립

퓨처테크의 1대 CEO인 심복택은 유학파 작곡가로, 당시 세화국 의류시장을 지배하고 있던 의류 기업인 화정의류[1]의 오너 집안의 장남이었다. 덕분에 심복택은 현실적인 걱정 없이 풍족한 환경에서 작곡을 배웠다. (이하 평원후) 110년 아르미니우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심복택은 세화국과 칠서 민권국을 오가 26년 간 작곡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136년 연말, 심복택은 에우랍수스 연방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휴가 기간 동안 작곡할 영감을 얻고자 마음을 비우고 다양한 것을 보던 와중, 세화국에는 없었던 실린더 레코드를 처음 보게 되었다. 음악을 녹음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심복택은 문득 이걸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실린더 레코드와 플레이어 몇 개를 사서 귀국했다. 심복택은 이 둘을 지인들에게 보여주었고, 지인들도 큰 관심을 가졌으며, 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지인들은 아예 심복택에게 도매 사업을 제안했다. 심복택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37년 4월 24일 세화국 성해부 성해시에[2] 음반과 플레이어 판매를 전문으로 하는 미래음악사를 창립했다. 이것이 퓨처테크 300년 역사의 시작이다.

사세 확장

심복택은 미래음악사를 차리고 세화국에 정착해 지내기 시작했다. 미래음악사는 여러모로 인기를 얻었지만, 심복택의 본업은 작곡이었기 때문에 작곡과 가게 운영을 동시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작곡을 하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서 작곡을 못 할 지경이 된 심복택은 고민 끝에 155년 사업을 같이 이끌 동료를 모집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퓨처테크의 1대 CFO인 박복자이다. 심복택과 박복자는 사업 파트너로서도 궁합이 잘 맞았지만, 사람과 사람으로서도 궁합이 잘 맞았다. 그래서 163년 둘은 결혼했다.

박복자의 영입 이후, 미래음악사는 부자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얻었다. 공연장에 가지 않고도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이 몰려 든 것이다. 비록 수입할 수 있는 물량이 한정적이었고 가격도 비쌌지만, 미래음악사는 인기 덕택에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박복자의 사업 수완으로 원활한 수입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뛰어난 영업 노하우로 수익은 점차 늘어나 160년 초 수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었다. 여기서 박복자는 영업 범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162년 세화국과 칠서 민권국 등 천호 대륙 국가들에 여러 분점들을 냈다. 모든 분점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몇 분점들은 많은 수익을 거두었다. 이 때 성공한 분점들은 오늘날 퓨처테크 플래그쉽 스토어가 되었고, 각 국가에서 가장 성공적인 분점들은 오늘날 해당 국가의 퓨처테크 지사가 되었다.

사세를 키워 나가는 미래음악사는 165년 3월 14일 연극 사업에 진출했다. 처음에는 적자를 면하지 못했지만, 천천히 유명세를 타면서 적자 폭이 줄어들어 10년 후 손익분기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자신감을 얻은 미래음악사는 172년 칠서에 연극 사업을 진행했으나 실패하고 4년 후 철수했다. 비록 상당한 적자를 입었지만, 그래도 미래음악사는 천호 대륙을 거점으로 하여 사업을 키워 나갔고, 에우랍수스 대륙이나 뉴니버스 대륙에도 관심을 가졌다.

170년대 중후반에 들어서 표준시간 음반(SP)이 개발되었고, 실린더 레코드 때와 마찬가지로 미래음악사는 수입과 유통에 앞장섰다. 음반 판매로 많은 수익을 얻은 미래음악사는 아예 자체적인 음반을 만들기로 하였다. 마침 심복택 본인도 작곡가였기 때문에, 심복택 주도로 추진된 국산 1호 음반 사업은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세화국의 여러 작곡가들이 쓴 클래식 음악이 실린더 레코드와 SP에 실려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총 천 부 이상 팔린 것으로 파악되었으며,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이 때의 경험을 살려 성해시에 음악 스튜디오인 '미래음악사 성해음악제작실'을 차린 것이었다. 세화국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뛰어난 수준이었기 때문에, 이 음악 스튜디오는 세화국 내의 많은 음악가들이 빌려 쓰기도 했다. 그러는 한편 심복택은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가져, 무명 음악가들에게 음악 스튜디오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쓸 수 있게 해 주었다.[3] 현재도 이 부지에는 퓨처테크의 음악 스튜디오가 위치하고 있으며, 특히 1층에는 성해음악제작실을 복원해 놓아 관람할 수 있게 했다.

미래전기전자 창설

미래음악사는 182년 4월 24일 창립 45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LP 플레이어를 출시했다. 플레이어는 3가지 모델이 있었는데, 전기 코드를 꽂는 모델(모델 W), 손잡이를 돌리면 태엽의 힘으로 재생되는 모델(모델 M), 그리고 납 축전기를 달아 자동으로 돌아가게 만든 모델(모델 B)이 있었다. 뛰어난 완성도와 무엇보다 들고 다닐 수 있다는 점에서 혼수로 각광 받아 많이 팔렸다.[4] LP 플레이어가 생각 이상의 호응을 얻자 미래음악사는 이러한 음향 기기의 제작의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나아가 전기 제품도 생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기기를 생산하게 되자, 미래음악사는 189년 음향 기기[5]를 제외한 나머지 전자 기기의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미래전기전자를 창설했다.

미래전자는 제품의 개발과 더불어 외국 수입 제품의 도매를 하며 사업을 키워 나갔다. 이 덕분에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된 미래음악사는 다시금 본업에 집중했다. 미래음악사는 이 시기 개발된 신디사이저에 관심을 가졌고, 고심 끝에 193년 성해음악제작실에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를 한 대 들여오기에 이른다. 세화국 최초의 신디사이저였다. 설치 공사에 한 달 넘게 걸렸고, 설치 비용은 물론 스튜디오를 쓰지 못한 것 때문에 발생한 비용까지 상당한 비용을 투자해야 했지만 여러모로 이 신디사이저는 세화국 근대 음악사에 많은 기여를 해 주었다.

여러모로 이 신디사이저는 인기가 많아, 예약이 한 달 가까이 밀리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고심 끝에 199년 미래음악사는 투자를 받아 세화국 청단시에 청단음악제작실을 차리고 좀 더 최신 모델의 신디사이저를 들여 놓았다. 성해시와의 물리적 거리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 스튜디오 또한 사람들로 붐볐다. 신디사이저 도입 비용으로 큰 적자를 보았지만, 스튜디오 사용료를 상당히 챙긴 미래음악사는 스튜디오 덕택에 세화국에서 상당한 입지를 얻게 된다.

미래연극영화 분사

연극 사업으로 상당한 재미를 보며 입지를 넓혀 나가던 미래음악사는 외국에서 성장하기 시작한 영화 시장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긴 고민 끝에 201년 미래음악사는 큰 자금을 투입해 당시 유행하던 외화 하나를 라이선스 계약한 다음 당시 외국 연극을 번역하던 부서에 번역을 맡겼다. 그러나 영화를 다룰 장비가 없어 외국의 관련 업체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영화관도 없었기 때문에, 연극 무대를 개조해 영화관으로 만들었다. 영화는 201년 1월 8일 첫 선을 보였는데, 첫 반응은 매우 좋지 않아 손익분기점은 커녕 회사 문을 닫아야 할 지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대두될 정도였다.

그러나 다음 날, 첫 상영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 상황은 급반전했다. 영화관은 만석까지는 아니었어도 상당히 관객을 모았고,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상영 기간을 일주일 더 연장한 끝에 성황리에 마무리 된 최초의 영화 상영은 손익분기점을 배로 넘기는 대성공이었다. 이후 미래음악사는 각종 외화를 수입했으며, 전용 영화관을 지었고, 직접 영화를 번안할 시설을 마련했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은 미래음악사는 210년 연극과 영화 사업을 미래연극영화라는 새로운 기업으로 분리시켰다.

미래기술 그룹 결성 (제2기)

미래기술 그룹의 결성

이제 심복택 일가와 관련된 기업은 미래음악사, 미래전기전자, 미래연극영화 그리고 화정의류까지 4개 기업이 되었다. 그러나 4개 기업이 일괄적인 지휘 체계 없이 각자 돌아가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었고, 각 기업들의 사업이 커짐에 따라 지휘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심복택은 경영진들과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했고, 고민 끝에 그룹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룹을 결성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지자, 상세한 위해 4개 기업의 경영진들이 모여 그룹 결성과 지휘 체계에 대한 논의를 했는데, 이 회의는 훗날 그룹최고회의의 시초가 되었고, 제1대 그룹최고회의로 명명되었다.

217년, 미래음악사 창립 80주년 기념식에서 심복택은 미래기술 그룹의 결성을 선포하였다. 최초의 계열사는 미래음악사와 미래전기전자, 미래연극영화 그리고 화정의류 4개사였다. 미래기술 그룹은 그룹 지휘 체계로 지주회사를 채택[6]했다. 이 당시 미래기술 그룹 조직도는 다음과 같다.

217년 4월 24일 기준 미래기술 그룹 조직도

미래기술 그룹은 해돋이 그룹에 이어 세화국 두 번째 복합기업(conglomerate)이라는 면에서 경영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다만 재벌화된 해돋이와 다르게 미래기술 그룹은 재벌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래기술 그룹의 지도부에 심복택 집안이 있던 경우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라, 심복택 가문을 관습적으로 범 미래기술 가(또는 범 퓨처테크 가)라고 부르게 되었다.

미래기술 그룹의 지휘 체계가 다른 그룹에 비해 다른 것은 바로 지휘 체계의 최상단에 그룹최고회의가 있는 과두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기술 그룹에는 CEO가 없으며, 그룹최고회의 의장이 이를 대체한다.[7] 그룹최고회의는 동시에 미래기술 그룹의 이사회이기도 하므로, 그룹최고회의 구성원들은 동시에 이사이기도 하다. 초창기 그룹최고회의 구성원은 15명이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그룹최고회의가 확대되면서 현재는 구성원이 100명을 넘어가게 되었다.

이 당시 세워진 그룹최고회의와 그룹 지휘 체계는 현재의 퓨처테크 그룹에 이르기까지 이어진다.

세대전환 시기

시대에 비해 장수했던 심복택이지만, 서서히 인생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심복택은 슬슬 은퇴를 고려할 나이가 되어 후계자를 정하고자 했다. 심복택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는데, 그 4명의 자녀는 다음과 같았다.

  • 첫째 심상문(남) - 몇년 전 불교에 귀의해 중이 되어, 미래기술 그룹의 차기 그룹최고회의 의장직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다.
  • 둘째 심상영(여) - 미래연극영화에서 연극 시나리오 작성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 일에 만족해 그룹최고회의 의장직을 거부했다.
  • 셋째 심상빈(여) - 화정의류에서 의상 디자이너로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역시 지금 일에 만족해 그룹최고회의 의장직을 거부했다.
  • 넷째 심상교(남) - 미래음악사에서 음반 발매 계획을 짜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성격도 좋았으며 야망도 있어, 그룹최고회의 의장직 기회를 받아들였다.

그 누구도 기회가 없으리라 예상한 넷째였던 심상교가 그룹최고회의 의장직 경쟁에 뛰어든 사정은 이러했던 것이다.

그룹 지도부는 심상교 외에도 미래전자에서 기업의 사업 계획을 짜는 일을 하던 김기범과 화정의류에서 미디어에 노출되는 의류를 최종 점검하고 조율하는 일을 하던 장영태 또한 차기 그룹최고회의 의장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인물이 논의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심상교, 김기범, 장영태 셋이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룹최고회의는 초기 김기범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반대측에서 다른 후보자도 살펴봐야 한다며 항의했다. 논의가 이어진 결과 이 세 명에 대해 CEO 교육 실시 겸 실전 경험을 통한 학습과 역량 탐색 등을 목적으로 당시 지부장이 비어 있었던 미래음악사/미래전자/화정의류 칠서지부[8]에 각각 지부장으로 파견했다. 또한 이 셋은 몰랐지만, 윤리감찰부 내의 몇몇 요원들을 신입 사원으로 위장해 파견하여 이들을 지켜보도록 했다.

자질 평가

1년간 이 셋은 제각각의 정책 기조를 보였다. 심상교는 미래음악사 출신인 것에 더불어 심복택의 아들이였던 것 때문에 아버지와 비슷하게 유연하고 부드러운 사내 분위기를 조성했고, 모험적인 사업을 펼쳤다. 이런 정책 때문에 비록 일부 손해도 있었지만 미래음악사 일본지부는 사세를 키워 나갔다. 김기범은 로드맵을 만들고 있었던 것에 영향을 받아 질서정연하고 규범에 일각한 사내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소 사내 분위기가 경직된 감은 있었으나, 질서정연한 사내 분위기 덕분에 미래전자 일본지부는 별 탈 없이 사업을 키워 나갔다. 장영태는 기업 지도부의 힘을 키워 강한 지도자에 의해 이끌어지는 사내 분위기를 조성했다. 전반적으로 김기범과 비슷했지만, 지도부의 힘이 커진 것 때문에 기업이 좀 더 경직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화정의류 일본지부는 그 규모를 유지하였다.

셋이 자신이 대표로 있는 회사를 이끌어 나가는 동안, 윤리감찰부에선 이 세 기업의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조사를 진행하고 세 그룹의 경영, 복지 등 면에서 다양한 통계를 냈다. 1년간 쌓인 통계는 그룹 지도부에게 전달되었다. 그룹 지도부는 수 개월에 거쳐 셋의 지도력에 대한 평가를 진행했다. 지도부는 장영태가 자칫 창작이 주된 활동이 되는 미래음악사나 미래연극영화의 사내 분위기를 경직시켜 성과를 저하시킬 수 있다고 판단, 후보에서 제외하였다. 그러나 심상교와 김기범에 대한 평가는 대동소이해,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몇 달 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룹 지도부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 사이 심복택은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러, 지도부의 고심은 깊어졌다.

지도부는 윤리감찰부에서 파견한 요원들을 불러 각 후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요원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려줬는데, 바로 미래전자의 성과의 비결은 사원들을 짜내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요원들이 전해 '일정이 너무 촉박해서 야근을 많이 했다', '몇 주 내내 집에 가면 자고만 있는 식구들 모습을 보니 피폐해진다', '예산이 모자라서 시험적인 시도를 해보기 겁난다'와 같은 반응들을 보고 지도부는 미래전자의 성과가 직원들을 혹사시켜 얻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다른 사업부에 비해 유의미하게 높았던 미래전자의 퇴사율이 이런 원인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지도부는 황급히 칠서지부는 물론 전세계 모든 지부의 퇴사율 통계를 가지고 왔다. 그랬더니 정말 미래전자의 퇴사율이 미래음악사의 퇴사율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 그룹 지도부는 결국 심상교를 차기 CEO로 낙점하게 되었다. 이어진 227년 정기 주주총회에서 심상교의 CEO 임명안이 가결되었고, 227년 4월 24일 그룹 창립 90주년과 함께 심상교는 미래기술 그룹의 제2대 CEO로 취임한다.

세계로의 도약(제3기)

체계 정비

그룹의 지휘봉을 잡은 심상교는 그룹의 구성을 되돌아 보며 거의 주먹구구식 운영이였다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고민 끝에 현재에도 그 틀이 유지되고 있는 그룹 체계를 구상했다.

먼저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 화정의류를 각각 미래기술그룹 음악사업부, 전기전자사업부, 연극영화사업부, 의복사업부로 개명했다. 다만 대외적으로는 미래음악사, 미래전자, 미래연극영화라는 명칭을 유지했고 화정의류는 미래의류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렇게 각 '사업부'들을 구성하고 그 아래에 각각 특정 사업을 담당하는 '국'을 구성, 그 국 아래에 '부', '과', '실' 단위를 두었다[9]. '실' 단위의 부서는 실제로 방 단위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심상교는 회고록에 적었다. 현재도 '실' 단위의 부서는 한 방 단위로 편성되고 있다.

또한 심상교는 각 부서 단위를 묶는 것에 신경을 썼다. 가장 최소의 단위인 '실'의 대표, 즉 실장들이 모여서 과 회의를, 과장이 모여서 부 회의를, 부장이 모여서 국 회의를, 국장이 모여서 사업부 회의를, 사업부장이 모여서 그룹최고회의를 구성했다[10]. 각 부서의 대표들은 회의를 구성하는 대표, 각 부서의 대표자로만 역할해 모든 사원이 수평적 관계가 되도록 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이는 미래음악사가 수평적 관계를 중요시 한 것에 더불어 아버지가 여러번 자유로운 환경에서 최대의 역량을 이끌 수 있음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산하에 있던 연구소(미래전자 한성연구소 등)들은 '국' 단위로, 그룹의 전반적인 경영을 담당하는 곳은 그룹운영부로 개명하고 '사업부' 단위로 만들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구조 개혁을 한 뒤 그 내용을 들고 경영진들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경영진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통솔 능력이 저하되고 체계적이지 못하다는게 주요한 내용이였다. 하지만 심상교의 의지는 대단해서, 그들을 계속해서 설득해 보았다. 경영진들도 엄청난 의지에 뭔가 있을거라 생각해 조금 수그려, 세 달 정도 이를 시범 적용해 보기로 결정했다.

시행 결과는 성공적이였다. 미래음악사를 비롯해 모든 사업부에서 좋은 보고들이 올라왔다. 수평적인 관계 덕분에 일명 '갑질'이 줄어들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되었다는 직원들의 호평이 있었다. 경영진들도 올라간 능률과 수치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시범 적용 말기에 이르러선 직원들이 이 제도를 계속해서 적용시켜 달라는 의견을 계속해서 전달했다. 결국 경영진들은 심상교의 그룹 체계 개편안을 통과시켰다.

기업 인수

조직 체계 개편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고히 한 심상교는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그룹최고회의 의원들은 음악사업부의 음악 활동과 연동시킬 수 있는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가령 음악 방송을 할 수 있는 라디오 방송 사업이나, 음악인과 관련된 기사를 싣을 수 있는 잡지 사업 등이 주로 제안되었다. 심상교 또한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기업을 인수하여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자 했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가장 먼저 인수된 기업이 바로 대일운송이었다. 그룹최고회의는 대일운송의 인수를 통해 타 사업부들의 유통망을 자주화하고, 특별한 운송(비밀 보장을 해야 하는 경우, 신선도 유지가 필요한 경우 등) 환경에서의 비용을 절감하고자 했다. 대일운송은 237년 4월 24일 인수되어 미래운송이라는 이름으로 그룹에 합류했다.

그러나 출판사는 마땅히 인수할 기업이 없었고, 새로 창립하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10년 후인 247년 4월 24일에는 미래출판사가 창립되었다. 미래출판사가 가장 먼저 내놓은 것은 음악을 주제로 다루는 월간 잡지인 '음악이 흐르는 곳' 이었다. 출판 이후 지금까지 이 잡지는 계속 발간되어, 현재는 1000호를 돌파했다. 미래음악사가 영세 음악가들에게 호의적이었던 것처럼, 미래출판사도 영세 작가들에게 호의적인 정책을 취했다. 가령 책 출판 비용을 할인해 주거나, 교정/검열 등 어려운 일들을 도와 주는 서비스와 같은 것들을 제공했다.

미래출판사를 창립하고 몇 년 지난 254년 6월 19일, 2차 대분쟁이 발발하며 세계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빨려든다. 세화국은 전쟁 초기 패전을 거듭하며 명월부 방어선까지 밀리게 된다. 성해시를 잃게 된다면 항구를 적에게 내주게 되며, 이는 곧 상륙이 용이해져 진군이 더 빨라질 것임을 의미했으며, 이 경우 세화국의 멸망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미래기술 그룹은 최소한의 인력만 남긴 채 대부분의 인원이 전선 후방인 청단시로 이동했다.[11] 미래기술 그룹은 2차 대분쟁 시기 문화 계열 사업부들이 프로파간다나 정훈교육 자료 등을 제작했고, 군수 관련 전자제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미래기술 그룹은 전쟁의 분위기와 거리가 멀었다. 전시경제였지만, 미래전자를 제외하면 평상시와 하던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부 직원이 징병되었으나, 대다수의 직원들은 전문성을 인정받아 업무를 처리하며 나라를 위해 힘썼다.

전쟁이 끝나고, 미래기술 그룹은 평상시로 돌아왔다. 전후 문화 산업이 활황을 겪으며 미래기술 그룹은 큰 수익을 얻었다. 경영 사정이 나아진 미래기술 그룹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사세 확장을 꾀했다. 그룹최고회의에서는 문화 산업 계열의 새로운 사업을 고려했으나, 심상교는 오히려 완전히 새로운 방향을 생각했다. 심상교는 당시 전후 수요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성해중공업의 인수를 주장했다. 그룹최고회의 구성원들은 반대했지만, 심상교는 문화 산업의 한계를 지적하며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했다. 심상교의 설득에 그룹최고회의는 성해중공업의 인수를 결정하였고, 273년 6월 31일 성해중공업 인수가 발표되었다.

이전 역사

  1. 화정의류는 훗날 미래기술그룹 의복사업부로 합류했다가, 400년 경제 위기로 인한 재정난으로 매각한다.
  2. 심복택은 원래 명월시에 차리려고 했으나, 예산 내에서 마땅한 상가를 구할 수 없어 성해시로 향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퓨처테크는 성해부의 대표 기업이 되었다.
  3. 이 때의 전통을 잊지 않고, 퓨처테크는 인디 음악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자사 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에 쓸 수 있게 배려해 주고 있다.
  4. 대부분의 판매는 모델 W와 M이었으며, 모델 B는 비싸서 소수 팔렸다.
  5. 퓨처테크에서도 음향기기는 음악사업부의 자존심으로서, 전량 퓨처테크 음악사업부에서 생산하고 있다.
  6. 이 당시 세화국에서는 지주회사와 순환출자 모두가 허용되었다. 400년 경제위기로 순환출자는 불법화 되었으나, 퓨처테크는 이미 지주회사였으므로,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7. 그룹최고회의 의장이 CEO로 간주되는 것은 세화국 상법상 대표이사 자리에 누군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8. 정확히는 각 국의 해외사업국 (나라 이름)지부장. 국장급 직책에서 지부장으로 강등된 것이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지부장은 예외로 요직에 속하는 국장급 직책과 동급으로 여겨진다.
  9. 다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공식적으로 실 이하의 단위도 있다. 보통 '실'의 규모가 크거나 배정 업무가 광범위한 경우 발생한다. 정해진 명칭은 없으나 대체로 '소실'이라는 명칭이 애용된다.
  10. 대체로 특정 회의를 부를 때에는 부서 이름을 앞에 붙인다. 가령 미래기술그룹 음악사업부 음악편성국의 국 회의를 부를 땐 음악편성국 회의라고 부르는 방식이다. 실 이하의 단위, 일명 '소실'의 경우 인원이 너무 작아 체계적인 회의보다는 상시적인 논의가 더 일반적이다.
  11. 전후에도 청단시는 미래기술 그룹의 제2 사옥이 되었고, 현재도 성해시 본부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