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선

  • 국명 : 대조선국 / 대조선제국 / 대조선천자국 / 조선천국
  • 영토 : 한반도 + 만주 + 일본 열도 + 유구 + 대만 ( + 칭타오 + 화베이 + 산둥 )
  • 군주 : 조선 천자 / 조선 천손 / 조선 황제 / 조선 천황 /
  • 총리 : 수상 / 총리 / 총서령 / 대원수
  • 표어 : 홍익인간 /
  • 수도 : 평양주 / 평양부
  • 군대 : 대조선제국군 / 대조선군 / 대조선천자국군 / 천자국군 / 대조선천군
  • 종교 : 조선 유교 (신토 모티브+유교)
조선
朝鮮
Joseon
대조선천자국
大朝鮮天子國
수도 평양부
최대 도시
천자


국명

역사

자연환경

정치

행정 구역

국방

교육

사회

문화

대외 관계

조선

 
조선
朝鮮
Joseon
대조선국
大朝鮮國

 

 

1394년 -
수도 평양부
최대 도시
면적 222,300 km²
조선왕검
1394년 ~ 1442년 영성 왕검
장안주작감문대원수
1394년 ~ 1425년 한옹
1460년 ~ 1483년 한사
건국 1394년
이도영의 난 1437년
구주 전쟁 1461년
서흥 정변 1509년
인문 환경
행정구역
행정
구역
16개의 주, 3개의 부
30개의 목
정치
경제
화폐 공식 화폐
코드와 단위
단위 법정연호 조선의 연호

독자 연호 사용
현대까지 쭉 이어지게 할까

역사

곡산 정권

고려 전쟁

1388년, 우왕에 의해 이성계가 축출되고 이성계의 가족들은 고려를 빠져나와 이성계를 받들던 여진족 부족에게로 도피함. 이후 그곳에서 형제 및 반대파를 제거하고 몇몇 여진족 부족을 규합한 이방원이 남하하여 개경을 점령함. 고려 왕실은 개경이 점령되기 전 남경으로 궁을 옮김. 왕실이 위협에 의해 개경에서 빠져나가면서 무정부상태가 이루어졌고, 이를 틈타 전국적인 농민 반란이 발생함. 농민 반란은 점차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쳤고, 나주·전주·상주·서경의 세력이 대표적임. 개경을 점령한 이방원 세력은 일부 여진족의 이탈과 고려 왕실과 서경 세력의 협공으로 다시 고려 밖으로 도망침. 고려 왕실이 개경에 다시 돌아왔을때에는 이미 농민 반란은 반란의 수준을 벗어났고, 전국은 군벌 세력들의 격돌이 이루어짐. 고려 왕실은 서경 세력과의 전투에서 위세를 잃고 남경으로 다시 궁을 옮겼고, 이때 남경에서 반란이 발생하여 고려 왕실은 무너짐. 고려 왕실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한 서경 세력도 내분으로 의주·신서경·정주·해주로 세력이 분열됨. 신서경 세력은 의주와 정주를 흡수하였고 명에게 '조선'을 하사받음. 한반도 유일의 국가로 인정된 신서경은 조선을 선포하였고, 이에 남경은 '봉안'을 선포함. 경상도에서 위세를 펼치던 상주도 '조사'를 선포함. 조선은 춘주까지 남진했으나 남경과의 전투에서 패해 큰 피해를 입음. 하지만 재정비를 성공한 조선은 여진족으로부터 빼앗긴 동북면을 재점령하고 임주에게 투항받으면서 봉안과 싸울 준비를 마침. 양성 전투에서 대패한 봉안은 내분으로 붕괴되고 조선은 한반도 북부와 중부를 통일함. 이후 3년 동안 조선은 남진하며 나주를 점령하고 조사를 멸망시키며 반도를 통일함.

성립

신서경 세력은 단순 봉기 세력이던 서경 세력과 달리 본격적인 국가 체계를 갖춤. 한옹은 혼란을 피해 평양으로 도망치기 전까지 문인이였음. 평양에서의 산전수전으로 무인의 모습을 보였지만 정치 체제에 대한 지식이 있었음. 한옹은 명분의 부족과 개인적 이유로 횡성 고씨를 왕검으로 옹립하고 실권을 장악함. 그러고서는 자신을 따르는 유학자들과 새로운 국가 체계를 건설하기 시작함. 명목상일지라도 왕검을 최고 통치자로 내세우고 자신의 작위인 장안주작감문대원수에게 실권을 몰아줌. 당의 3성 6부제를 모방하여 3성을 통합한 총서성을 세우고 그 아래에 6부를 둠. 대원수 아래로 왕검과 그 일가에 대한 일을 행하는 왕검도감과 군대를 통솔하는 감문도감, 협족과 관한 일을 처리하는 협족 도감, 공을 세운 신하에게 사할 것에 관한 조훈도감을 둠. 품계를 딴 관계로 관료의 계급을 매겼으며, 협족을 다섯으로 구분함. 통일 이후부터 수도인 평양의 개발이 이루어짐. 고대 고구려의 장안성을 재건하고 과거 고구려의 궁궐이 있었을 자리에 왕검의 안성궁과 대원수의 주작궁을 건설함. 행정 구역도 개편되어 전국을 12개의 주로 나누고 4개의 부와 22개의 목을 둠. 세 차례의 여진 정벌 이후 2개의 성과 4개의 목이 추가 설치됨. 군대는 일종의 근위대인 감문총위군과 평양의 교각총통위군 중앙군 2군과 서경위, 봉안위, 조사위, 임주위 지방군 4위로 구성됨. 4위는 각 지역 고을과 협족의 군대의 연합체로 서경위의 경우 가장 넓은 지역을 담당하고 국경과 접해있기에 높은 우선 순위와 규모를 지닌다.

사대교린

서경 세력이 무너지고 한옹의 신서경 세력이 평양을 차지하였을 때부터 조선은 명을 상대로 사대를 펼침. 꼬박꼬박 명에게 조공을 보냈으며, 이에 대한 답례로 조선은 고려 유일의 국가로 인정받음. 북방의 여진족과 남방의 왜를 대상으로는 교린을 펼침. 여진족의 경우 1396년에 동북면의 탈환을 위해 공격한 경우가 있고, 나주 세력을 멸한 뒤부터는 조사와의 전쟁과 더불어 여진족 영역에 대한 원정을 펼침. 1408년까지 총 세 차례의 원정을 통해 단주까지이던 국경을 두만강으로 전진시킴. 세 차례의 원정에서 동북면 재점령 당시 투항한 이방원이 혁혁한 공을 세워 왕검으로부터 공주 등 두만강 유역의 검사대치와 함께 두만공의 위를 받음. 남방의 일본, 왜구는 고려 말기의 침입과 고려 전쟁 당시 조사를 위기에 빠르린 적이 있기에 왜구의 은신처인 대마에 대한 정벌이 초기부터 계획됨. 왕검은 조사공(照沙公)을 필두로 해군을 육성하여 1418년, 왜구의 침입을 계기로 대마를 침공함. 정벌군은 대마에 상륙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주를 사로잡음. 왕검은 항복한 대마도주를 대마후(對馬侯)로 봉하고 황산주의 감시를 받게함. 동북 원정과 대마 정벌 이후 조선은 계속해서 이민족에 대한 군사적 압박과 문화적 유화를 반복함. 주기적으로 여진을 공격하고 조공을 강요함.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투사하고 황산주에서 교역을 허가함.

이도영의 난

1422년, 두만공 이방원이 사망한 이후 두만공과 화주공의 위를 이은 이도영은 여진족에 대한 공격의 선봉에 서며 동북에서의 세력을 확대함. 대원수는 두만공의 세력 확장에 위협을 느끼며 경계함. 한숙의 건의에 의해 단주목과 길주목의 관리들이 대거 교체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두만공과 긴밀한 사이였음. 이로 인해 두만공은 한숙에게 악감정을 품음. 두만공은 한옹의 곡산 한씨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지언정 속으로는 경멸했음. 1437년, 한권이 사망하고 한숙이 3대 대원수로 임명되어 전국의 협족이 평양으로 가 충성을 맹세할 때 두만공은 병을 핑계로 행차하지 않음. 이에 한숙은 이도영으로부터 두만공의 위와 검사대치를 박탈하였고, 두만공은 반발하며 반란을 일으킴. 두만공은 여진족 영역의 세력을 바탕으로 대군을 몰고 평양으로 남진함. 하지만 대원수는 이를 예상하여 소집한 4위와 2군을 동원하여 난을 진압함. 덕주에서 반란군은 대패하고 1년 간의 토벌로 두만강을 넘으려던 이도영이 생포됨. 이도영과 그의 3족이 처형되었으며, 이후 협족의 반란을 막기 위해 대원수는 명계일치제를 실시하고 여진족과 접한 개마주와 동북주의 모든 검사대치가 몰수되어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어 관리하기 시작함. 이도영의 위이던 두만공과 정주공은 삭제됨.

고회의 난

호명 왕검의 주요한 아들로는 장남인 고수(안중 왕검)와 차남인 고회가 있었음. 고수는 대원수와 혈연 관계를 맺고 친대원수 성향을 띔. 반면 고회는 사실상 왕검보다 강한 권력을 지닌 대원수에 대해 불만을 지님. 고회의 생각은 당대에도 많은 위정자들 또한 생각하던 것이었음. 하지만 대원수 3대에 걸쳐 그런 의견을 입 밖으로 표출하는 이는 없었는데 고회는 이를 입밖으로 말함. 왕검의 적장자는 아닐지언정 적통인 고회의 존재는 대원수에 대한 불만 세력을 결집시키기에 충분했음. 불만 세력이 결집함이 눈에 보임에도 대원수는 왕검의 차남인 고회에게 손을 댈 수 없었음. 그러던 1447년, 고수와 고회는 대원수의 존재에 대해 논쟁을 벌임. 그러나 논쟁은 언쟁으로 바뀌고 결국 몸싸움으로 이어짐. 이를 기회로 본 대원수는 고수와 그 지지자들을 이용하여 고회와 그 지지자를 몰아 붙였고, 결국 1449년에 고휘는 출가함. 고회의 출가와 함께 그를 지지하는 세력 또한 궁에서 나가거나 세력을 잃음. 그렇게 대원수의 권력에 대한 위협은 사라진 듯 보였음. 1454년에 호명 왕검이 붕어함. 고수가 그의 후계로 연호를 안중으로 하여 즉위함. 그런데 얼마 안가 출가 이후 행방이 묘연했던 고회가 스스로를 수의 왕검이라 칭하며 난을 일으킴. 출가한 5년 간 고회는 난을 일으킨 조사주 내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협족들을 포섭했었음. 반란군은 조사주와 황산주를 빠르게 장악하고 말머리를 평양으로 돌림. 4위 중 조사위가 궤멸되고 더해 수 만의 반란군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사건이었음. 그러나 대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궁 내 반대파를 척살하고 전열을 정비한 후 직접 요격에 나섬. 대원수가 친정으로 평양을 비운 사이 대원수의 후계자인 한사가 평양을 대리 통치했음. 고회의 반란군은 또 다른 4위인 임주위를 격퇴하고 봉안에 까지 다다랐으나 수주에서 대원수의 2군과 봉안위-서경위의 반격에 패배하함. 수주 전투의 패배로 반란군은 급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함. 평양에 잔류했던 고회파의 배신으로 고회는 붙잡혔고, 반역죄로 고회와 반란군은 처형됨. 고회에게 협조한 협족들도 대규모로 멸족 당함.

구주 전쟁

대원수는 고회의 난 당시 반란에 동조한 대마도주 종재성(宗材盛, 소기모리)를 처벌하고자함. 고회의 난 이후 고회에게 동조한 협족들은 모두 처벌되었으나, 대마는 지리적·정치적 한계로 아니됨. 대마도주는 당연히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대원수는 한사를 원수로 대마 정벌군을 조직함. 평양의 소식을 접한 대마도주는 동남 지역 포의 왜인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도록 종용함. 동래왜란을 계기로 정벌군이 출정함. 대마는 일본의 번이었기에 당연히 막부와 갈등을 빗게됨. 1457년, 대마에 상륙한 정벌군은 빠르게 대마를 점령함. 그러나 목표인 대마도주는 대마를 벗어나 구주(큐슈)로 도피함. 정벌의 목적이 대마도주의 사살이었으므로 정벌군은 해협을 건너 구주에 상륙함. 이는 명백히 조선군이 일본의 영토에 발을 딛은 꼴이었음. 하지만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음. 결국 막부에 분노한 구주의 대명들이 직접 군대를 일으켜 조선군에 맞섬. 복강(후쿠오카)에서 조선 정벌군과 구주 연합군이 맞붙음. 그러나 한사의 전략에 체계적이지 못했던 연합군이 패배함. 복강 전투에서 축전국(지쿠젠국)의 대명이 생포되어 축전이 정벌군의 요충지가 됨. 이후 정벌군은 군을 두개로 나눠 구주의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함. 대우전 전투에서 2군이 축후군(지쿠고국)이 중심이 된 연합군에게 패배하는 일이 있었으나 정벌군은 빠르게 구주 북동부를 점령함. 정벌군은 저항하는 거점들을 파괴하고 약탈함. 그제서야 막부는 정벌군에게 작전의 중지를 요청하고 연합군으로 하여금 대마도주를 넘길것을 요구함. 여러 전투에서의 패배로 많은 대명이 큰 피해를 입은 연합군은 막부의 요구를 승락하고 대마도주를 정벌군에게 넘김. 그러나 정벌군은 이에 더해 구주의 모든 대명들로 하여금 조선에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함. 이에 연합군은 분노하여 다시 결집함. 그러나 산도(야마토) 전투에서 연합군은 궤멸되고 결국 정벌군의 요구를 받아들임. 대마도주 종재성과 그 일가는 평양부로 압송되어 처형되었으며,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영무를 대마후로 봉함. 구주의 대명들은 평양부로부터 백의 위를 하사받고 조공을 받치게 됨. 조공의 주요 품목으로는 유황 등이 있었음.

사변

고려 전쟁 당시 무너진 신진사대부 사회가 다시금 활기를 띄기 시작함. 조선 또한 고려와 같이 과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을 이루었기에 점차 선비가 정계에 등장함. 문에 관심이 깊은 한사가 대원수가 되면서 이는 가속됨. 하지만 협족 출신의 기존 관료 세력(기정파)은 이를 탐탁지 않게 여김. 선비 출신 신흥 관료 세력(신정파) 또한 기존 관료 세력의 행실을 비난하며 두 세력 간 갈등이 심화됨. 그러던 1465년, 평양부에 한 괴문서가 널림. 그 괴문서는 대원수의 치세를 비난하는 내용으로 왕검을 꼭두각시로 내세우며 우둔하고 탐욕스러운 대원수에 대한 비난이었음. 이는 한사에게 콤플렉스로 작용하던 내용임. 괴문서의 내용과 기정파의 부채질로 감문총위군이 움직임. 그럼에도 괴문서는 곳곳에서 계속해서 발견됨. 그러던 와중 기존의 괴문서와 다른 내용의, 대원수를 축출하고 왕검의 친정을 종용하는 괴문서가 발견됨. 이를 계기로 수사는 과격해지기 시작해 수많은 신정파가 증거도 없이 체포되고 처형됨. 수 개월 간의 혼란 끝에 궁 내에서 신정파가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약 1년 뒤 왕검친정 괴문서의 주인이 기정파임이 드러나면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됨. 처형된 신정파를 모함한 기정파 관료가 숙청되었으며, 숙청된 신정파 관료는 복권되었다. 사변 이후 대원수는 기정파와 신정파가 쓸려나고 빈 권력의 공백을 차신에게 충성하는 세력으로 채움. 충정파라 불린 이들은 신정파 출신으로 성리학을 따랐으나 군주의 역할을 대원수로 인정함. 충정파들은 왕검을 신격화함과 동시에 권력에서 배제시켰고, 대원수가 실권을 쥐는 것에 명분을 부여함. 충정파들은 신정파와 같이 지역 선비들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서원 등을 통해 꾸준히 양성됨. 완벽하게 조선 관료 권력에서 밀려난 구정파와 신정파는 정치에서 손을 떼거나 충정파에 흡수됨.

이만주의 난

1460년 대에 들어 조선은 동북주 국경에서 건주여진과의 군사적 마찰을 치룸. 이만주를 중심으로 건주여진이 뭉쳐 위세를 띔. 하지만 당시 조선은 사변으로 인해 중앙 정계에 혼란이 이르고 있어 북방의 충돌을 직시하지 못했음. 사변의 혼란이 점차 수습되고 충정파가 권력을 이양받고 있을 무렵인 1470년, 이만주가 건주 여진을 이끌고 동북주에 대대적인 침공을 가함. 동북공은 이만주의 무리와 맞서 싸웠으나, 회령 전투에서 패해 총통을 비롯 주요 무기들을 노획당함. 동북공은 이만주의 군대를 피해 산을 전전하다 자결함. 동북공을 잃은 서경위 동북사는 이만주의 군세에 각개 격파되 궤멸함. 동북주에서의 변이 평양에 당도하니 대원수는 한오를 새로 편성한 동북사의 원수로 임명시켜 이만주의 격퇴를 명함. 길주목의 길주령이 저항하여 이만주의 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으나 결국 패하고 길주목이 점령됨. 길주령은 마지막에 사람을 시켜 지원을 요청하니 주변 고을에서 군대가 소집되어 한오의 동북사에 빠르게 합류할 수 있게함. 동북사는 옥저주와 단주목을 거치며 군세를 불려 단주목에서 이만주의 군과 격돌함. 압도적인 화력에 이만주의 군은 패퇴하였고, 한오는 추격을 명함. 추격을 통해 이만주의 군세를 절반이 사라졌으나 추격 도중 여진족의 반격으로 한오가 전사함. 한오가 죽은 후 부원수로 보좌한 강순이 군을 통솔하여 이만주의 잔당을 척살하니 난이 끝났다. 이만주는 무산에서 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함. 강순은 이만주의 목을 평양으로 보냄과 동시에 두만강을 넘어 이만주의 일가를 마저 척살하고 돌아오니 대원수는 그를 새로운 동북공과 이만주 일가를 척살한 공로로 도강공을 봉함. 하지만 원수로 출전하여 전사한 한오의 경우 대원수의 유일한 후계였으므로 대원수의 직을 승계하는 데에 혼란이 들이닥칠 것이 뻔했다.

단주의 변

단주 전투에서 한오의 전사는 대원수로 하여금 뼈아픈 손실을 입힘. 대원수는 충격을 받아 며칠 간 식음을 전폐하고 정사를 돌보지 아니하였다. 그랬었기에 강순이 이만주 일가를 모두 척결했다는 소식은 대원수로 하여금 강순의 군세를 교각을 건너 맞이하게 할 정도의 호재였다. 대원수가 강순에게 봉한 도강공이 두만강을 건너 공을 세운 강순이 아닌 대원수가 강순을 맞이하기 위해 대동강을 건넜다는 의미를 지녔다는 해석 또한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한오는 전사하였고 대원수는 새로운 후계자를 색출해야 했다. 곧바로 대원수의 후계자를 선출하기 위해 대신 간 언성이 오갔다. 주요 후보는 한사의 형제인 한경과 한주, 그리고 한사의 장녀인 한이였다. 충정파는 서로의 후보자에 따라 정파, 인파, 적파로 나뉘었다. 한경은 한숙의 둘째 원군이었으나 어질지 못하고 무지하였다. 이에 인파는 셋째 원군인 한주를 후보로 내세웠다. 적파는 여성인 한이를 지지하여 대원수의 자식만이 대원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내세워 한이가 대원수가 되는 것이 옳다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정파와 인파는 적파가 한이를 조종하여 권력을 탐하고자 함을 이유로 들어 비난하였다. 대원수는 선택하기를 보류했고 결국 긴 시간 동안 후보자가 선택되지 아니했다. 1482년, 대원수가 병으로 쓰러지자 다시금 논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10여 년의 기간 동안 한주와 한이는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였고, 1483년, 결국 한사가 병사하자 대원수에 오르기 위해 충돌한다. 과정에서 나태하여 세력을 모으지 않았던 한경은 한주에 의해 살해당했고, 이는 인파로 하여금 분열을 발생시킨다. 한이는 적파와 일부 인파를 받아들여 세력을 굳건히 해 결국 한경을 사로잡고 스스로 대원수에 오르니 최초의 여성 대원수가 된다. 한경을 살해한 한주는 반역과 패륜의 죄로 처형당한다.

인립

한이는 비록 적파와 정파의 지지 하에 대원수에 올랐으나, 실질적인 원인은 그의 개인적인 무력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무력이 기여한 자들은 일부 정파와 협족들이었다. 이천백 서기윤이 대표적이었다. 불안정한 궁 내 장악력을 이유로 한이는 단주의 변 당시 자신을 지지한 협족을 중심으로 정권을 유지함.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인립공족이란 최초의 칭호를 부여하고 토지와 공의 위를 사함. 인립공족들은 공작이라는 높은 작위와 강한 권한을 부여받아 그들의 세력을 키움. 강력한 정치적 기반이 없었던 한이는 인립공족의 세력 확대를 애써 무시함. 인립공족과 함께 정파 인사에게 사해진 인립공신도 있었음. 그들 또한 토지와 강력한 권한을 받았음. 한이의 조선은 인립공족과 인립공신이 지배함. 한이는 그들을 바탕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다.

지역에서 인립공족의 수탈이 점차 심해짐.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지역 내에서 그들의 위세가 하늘을 찌름. 1496년부터는 봉안주와 그 일대에 흉작이 발생함. 이러한 혼란에 결국 1498년, 이천 공령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남. 구우영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은 이천 공령과 그 근처, 더 나아가 인립공족의 영으로 확대됨. 생존을 위한 반란이 시작이었던 구우영·박민영의 난은 다른 지역의 공령으로 반란이 확대되면서 인립공족을 벌한다는 명분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명분에 농민 뿐만 아니라 공령 주변 협족들이 난에 가담하여 거대한 규모를 이룸. 반란군은 한주 전투에서 봉안위를 상대로 승전하고 한주목을 점령하는 등 위세를 떨침. 봉안위를 격퇴하고 한주목을 점령한 반란군은 봉안부와 충주목을 목표로 삼고 진격함. 이에 임주위와 서경위가 봉안부를 수호하고자 진격하였고, 조사위가 상주목에 집결하여 충주목으로 향하는 반란군을 요격하고자 함. 봉안-과천 전투에서 반란군은 양면에서 수를 취하다 패배하여 한주목을 내주었으나, 충주 전투에서 조사위를 격멸하는 데 성공함. 이천 전투에서 패배한 반란군은 충주목으로 세력의 중심을 이동하여 계속해서 위세를 떨침. 이천 전투에서 전사한 구우영을 대신하여 박민영이 이끄는 반란군은 상주와 안동 등 조사주의 북중부를 차지함. 조사주를 대부분 장악한 박민영은 청주목으로 진격함. 그러나 청주목에서 임주위와 서경위에게 대패를 당하고 이어 상주목을 빼앗김. 함창 전투에서 박민영이 전사하고 반란군이 전멸당하면서 구우영·박민영의 난은 종결됨.

구우영·박민영의 난 이후 인립공족들은 무너진다. 1496년부터의 흉작과 그로 인한 긴 반란은 그들의 지위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주요 인립공족이던 이천인립공 서기윤은 반란군의 손에 그와 그의 가족들이 참살됨. 이러한 것은 반란이 발생한 주요 인립공령에서 볼 수 있었음. 봉안주, 백마주, 동해주, 조사주의 인립공족들은 대다수가 반란군에게 운명을 달리함. 그들의 뒤를 이어 위를 이은 그들의 가문도 결국 반란으로 황폐화된 검사대치에서 몰락함. 주요 인립공족들이 봉안주, 백마주, 남해주, 조사주에 몰려 있던 것을 생각하면 인립공족이 바탕이 된 대원수의 권력은 흔들림. 설상가상으로 반-이 협족들이 등장하기 시작함. 구우영·박민영의 난에서 농민 반란군에 선 협족들 또한 그들 세력이라 볼 수 있음. 이런 혼란에 과정에서 단주의 변을 복수하고자 하는 한이의 명분적인 북방 정벌은 계획 단계에서 흐지부지가 됨. 그리고 이는 한이가 인립공신에게 권력을 의탁하는 상황을 불러옴. 결과적으로 인립공신들의 부정부패는 극심해짐.

거사

한이의 통치 기간 동안 조선은 건국 이후 유래 없는 혼란기를 맞이함. 궁은 소수의 인립공신과 그들 가족이 장악하여 부정부패함. 궁 밖으로는 인립공족들의 수탈과 흉작으로 민생이 피폐해짐. 이에 따라 인립공신 일파에 의해 밀려난 정파와 인파가 결집함. 인립공신이 장악한 궁과 평양부에서 세력을 얻긴 불리했던 이들은 황주목을 중심으로 결집함. 그랬기에 인립공신과 그 가족을 평양파, 반-평양파 세력을 황주파라 칭함. 황주파는 반-이 협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점차 세력을 불리기 시작함. 황주파 내에서 정변을 일으켜 한이를 축출한 다음 옹립할 대원수 후보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인다. 한사의 다섯째 원군인 한명을 세우고자 하는 대동강파와 역성 혁명을 일으켜 서흥백 김굉필을 세우고자 하는 서흥파로 나뉜다. 그러나 결국 황주파 내 두 파벌은 타협을 이루지 못하고 결별함.

결별한 대동강파와 서흥파는 각자 세력을 구축하고 정변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대동강파는 한명을 성공적으로 영입하고 대동강 서쪽의 용강백, 안악백과 같은 협족들과 결탁함. 1504년, 거사일이 결정됨. 거사는 용강백을 중심으로 협족군이 결집한 다음 평양부로 쳐들어 가는 계획이었음. 용강에서 안악백과 서해주의 여러 협족들의 군대가 용강백의 협족군에게 합류함. 이후 새벽에 조용히 강을 따라 평양부로 이동함. 그러나 안악백은 일부 군대를 빼돌려 단독으로 배를 타고 평양부에 상륙함. 수가 적었던 안악백의 협족군은 빠르게 진압당하고 안악백은 전사함. 용강백은 아침 가까이가 되어서야 안악백이 사라진것을 인식함.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용강백은 진군을 명령함. 안악백에 의한 소란으로 평양부의 방어는 삼엄해졌고, 후발대를 대비하고서 이들을 요격할 공격군이 편성되기도 했음. 결국 용강백의 협족군은 보통강에서 교각총통위군의 기습을 받음. 갑작스런 공격에 협족군은 지휘체계를 잃고 우왕좌왕하다 격멸됨. 거사를 꾸민 자들은 모두 생포되어 빠르게 형에 처해짐.

대동강파가 거사의 실패로 기둥을 잃고 붕괴됨. 서흥파는 대동강파의 거사 시도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회를 노리며 기다렸음. 거사가 발생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김굉필이 사망하자 서흥파는 김상을 후보로 내세우고 계속해서 거사를 준비함. 그러던 1509년, 대원수가 사냥을 하다 낙마하여 중퇴에 빠짐. 한이의 장남인 한서가 대리청정하고자 했으나 대원수는 이를 거부하였다. 한서는 일종의 보좌 역할로 병상에 든 대원수를 간병하고 대원수의 명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함. 몸이 성치 않은 데다가 대리인을 내세워 통치하니 시스템에 조금씩 문제가 발생했음. 이를 기회로 본 서흥파는 거사를 개시할 것을 결심함. 서흥파는 수년간의 거사 준비 결과 교각총통위군 내의 협력자를 확보하기도 했음. 새벽에 서흥파는 거사를 개시함. 교각총통위군 내 협력자 덕에 소수의 군대가 평양부로 진입하고 이후 교각총통위군을 제압함. 출입한 서흥파는 둘로 나뉘어 하나는 주요 평양파 대신을, 나머지 하나는 주작궁으로 향함. 주작궁으로 향한 군대는 감문총위군과 격돌함. 압도적인 물량에 감문총위군은 무너졌고, 서흥파의 군대가 주작궁 내로 들이닥치기 시작함. 교전 소식에 대원수는 병든 몸을 이끌고 탈출하고자 하였으나 거사군에게 사로잡힘으로써 거사는 성공함. 서흥정변이라 불린 거사 이후 한이는 대원수의 직을 잃고 그의 가족과 함께 나주로 유배를 당함. 이후 서흥파는 김상을 장안주작감문대원수로 옹립함.

서흥 정권

정난

유교적 기치 아래 이루어진 역성혁명이 성공한 이후 인립공족·신을 삭제하고 새로이 정난공족·신을 정리해 수훈했다. 서흥정변의 주체는 성리학자였고, 새로운 대원수 또한 성리학자 출신이었기에 그들의 개혁은 성리학을 따랐다. 이때부터 대원수와 정권은 군대가 아닌 관료의 형태를 띄기 시작했다. 총서령의 권한이 강화되었으며, 자문도감을 신설해 대원수와 대신을 감시함.

인립의 난

서흥정변으로 김상과 지지자들은 평양의 권력을 잡았으나 지방 협족들을 통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서흥정변 직후 평양이 혼란스러울 때 명계휘치에 따라 평양에 거주한 많은 수의 볼모들이 평양을 탈출하였다. 기존 대원수의 친위대인 감문총통위군이 이들 볼모들을 감시했는데 이들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감시가 헐거워졌던 것이다. 그들의 탈출은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서도 있었지만 대원수에게 그들의 행동을 너무나 불충스럽고 불안 요소였다. 제법 정권이 잡히고 난 이후 대원수는 전국의 협족에게 탈출한 볼모들을 이른 시일내에 다시 평양으로 보낼 것을 명령한다.

대부분의 협족들이 새 대원수에 복종하며 후계자를 도로 평양으로 보냈으나 백마주와 남해주의 일부 협족들은 이를 거부함. 이들은 과거 인립 공족과 그 세력으로써 사실상의 착취를 통해 부와 세력을 늘렸음. 그랬기에 전 대원수에게 충성하였음. 대원수는 이를 반역으로 간주하고 토벌을 명함. 이 협족들 또한 나주목을 급습하여 한이를 구출한 후 그의 복고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킴. 반란군은 저항하는 협족들을 참하고 양 주의 목과 임주부를 점령함. 임주위는 분열하여 투항하거나 전멸함. 토벌을 위해 출정한 봉안위를 온양 전투에서 패퇴시킨 반란군은 북상하기 시작함. 반란군의 측면을 타격하기 위해 출격한 조사위가 옥천에서 반란군의 강력한 저항에 발이 묶이는 등 상황이 악화되어갔음. 한주목이 점령되고 봉안부까지 포위되는 등 반란군은 승승장구함. 하지만 양주목에 봉안주 북부와 동해주의 협족군이 봉안부를 포위하는 반란군을 격퇴시킴. 더군나 반란군의 춘주목 공격도 실패로 돌아가면서 반란은 장기화됨.

정부군은 군세를 정비하고 한주목을 압박하기 위해 봉안부와 원주목 양면에서 공세를 실시함. 그러나 봉안부 방면의 군은 과천에서 저항에 부딪쳤고 원주목 방면의 군은 남한강을 넘지 못함. 그러던 중 탐라주와 대마후의 협족군이 장흥에 상륙함. 기습 상륙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이들은 나주목을 점령함. 황산주의 일부 조사위도 이를 지원하고자 순천 방면에서 공세를 가함. 이를 막기 위해 반란군은 옥천의 병력 일부를 차출해 보낸다. 이 틈을 타 옥천에 발이 묶여 있던 조사위가 방어진을 뚫고 공주목을 타격한다. 반란군의 수뇌부는 임주부에 위치하였고, 공주목이 함략당하면 임주부가 위험했다. 반란군은 결국 한주목과 봉안주의 점령지를 포기하고 이를 막기 위해 한주목을 수비하던 병력을 퇴각시킨다. 한주목을 공력하던 군은 이들을 추격하였고, 여러차례 교전하였다. 이들의 공격에 도망치듯이 충주목에 집결한 반란군은 쉴틈 없이 옥천으로 남하한다. 그러나 조사위의 공주목 공격은 위장이었고 옥천에 매목하고 있었다. 조사위의 매목에 반란군은 대패하여 뿔뿔히 흩어짐. 반란 4년만에 반란군의 주력이 붕괴한다. 곧이어 공주목을 점령한 토벌군은 속전속결로 임주부를 점령하여 반란군 수뇌 전부를 사로잡으면서 반란이 종결된다.

반란은 4년 간 지속되면서 조선에 큰 피해를 남김. 반란이 일어난 백마주와 남해주는 반란 세력의 토벌군의 숙청으로 무정부 상태에 이름. 여러 전투로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나타났으며, 백마주와 남해주의 농촌은 무너짐. 반란 진압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게 좌평봉신·족의 칭호를 내리면서 주인없는 검사대치를 하사했음. 임주위는 4년 내내 해체된 상태였고, 봉안위와 조사위도 큰 피해를 입음. 반란 진압 도중이나 이후에 정권의 지출은 막대해져 재정에 큰 피해를 줌. 난의 원인이 명계휘치로 상경한 협족 후계자들의 관리 미흡이었던 만큼 이들을 따로 감시하기 위해 명치도감을 설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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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전쟁

구주 전쟁 이후 아시카가 씨가 축출되고 호소카와 씨가 태정대신에 올라 호소카와 정권이 수립됨. 정이대장군을 칭하지 않은 호소카와 정권은 봉건제를 타파하고자 함.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천황을 무너트리고 일본의 왕이 되고자함. 호소카와 씨의 권력과는 별개로 수많은 다이묘들이 반발했고 내전에 빠짐. 하지만 호소카와 씨는 구주의 다이묘들과 자신을 지지하는 다이묘들의 지원을 받아 최종적으로 내전을 종결냄. 내전 도중인 15__년, (고카시와바라/고나라) 천황을 폐하고 스스로 일본대왕이라 칭하고 즉위했음. 내전 이후 호소카와의 일본 왕국은 유교에 의한 중앙집권화를 이룩함. 하지만 구주 전쟁에 따라 구주의 다이묘들은 조선의 조공국이자 명목상의 검사대치였음. 그랬기에 중앙집권화의 과정에서 조선과 갈등이 발생함. 일본은 조선과의 갈등을 보류시키기 위해 구주의 다이묘들에게는 칸리 다이묘라는 명칭을 부여함.

칸리 다이묘는 어디까지나 내정을 안정시키기 위한 시간을 벌 뿐인 전략이었고, 15__년, (호소카와 아키모토)는 칸리 다이묘를 완전히 중앙정부에 흡수함. 조선은 이에 반발함. 조선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첩보에 십수년 전 부터 전쟁을 준비해오던 일본이 해협을 건너 조선을 공격함. 일본의 기습에 동래가 함략당함. 일본군은 계속해서 북상함. 북상 도중에 조선의 협족군을 각개 격파하기도 함. 상주에서 조사위와 일본군이 격돌함. 전투 당시 조사위는 전 병력이 소집되지도 못했고 지휘체계도 엉망이었음. 결국 조사위는 패퇴함. 패퇴 과정에서 수많은 탈영병이 발생하는 등 패퇴도 실패함. 패잔병 중 일부만이 산맥을 넘어 임주위에 가담함. 조사위가 궤멸되면서 황산주와 조사주가 일본에 의해 통제됨. 상주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조선은 대원수가 직접 친정하여 중앙군을 동원하기도 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치름. 청주에서 임주위와 봉안위가 일본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함. 이후 2군이 합류하여 산맥을 넘어 진격함. 조선군은 문경에서 대승을 거두고 일본에 의해 점령된 영토를 탈환해나감. 구주가 목적이었던 호소카와조는 조선에 휴전 협정을 제안하지만 대원수는 이를 극렬히 거부하고 해협을 건널 준비를 하기 시작함. 마산에서 일본군은 대패하여 조선에서 철수함. 다시금 호소카와조는 대원수에게 휴전 협정을 요청하지만 대원수는 대마 점령으로 회답함. 일본은 구주 상륙에 대비하기 시작했고, 복강(후쿠오카)에 조선군이 상륙하여 전투가 벌어짐. 상륙작전은 성공적이었음. 상륙한 조선군은 대원수의 명에 따라 모든 마을을 초토화시키며 전진함.

조선에서의 참패와 구주의 참극으로 인해 궁 내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의견이 강해짐. 호소카와조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조선군에게서 승리하여 전쟁을 끝내고자 함. 조창(아사쿠라)에서 양군은 격돌하였고 일본군이 참패함. 조창 전투의 패배로 호소카와조의 권위는 무너졌고, 결국 유교에 따른 역성혁명이 발생하며 호소카와조는 무너짐. ()씨는 대왕에 오른 후 조선에게 항복함. 조일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대마와 구주를 실질적으로 조선의 영토로 합병함. 하지만 양국 모두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경우 조사주와 황산주, 그리고 스스로 초토화시킨 구주의 복구에 막대한 국력을 소모하게됨. 또한 합병한 구주 내에서는 조선에 대한 반발로 반란이 자주 발생하여 지속적인 국력 손실을 불러 일으킴. 역성혁명을 통해 왕위를 찬탈한 ()씨는 구주를 상실한 것으로 인해 초장부터 권위가 실추되어 혼란을 겪음.

왕검

횡성 고씨

장안주작관문대원수

곡산 한씨

  • 1대 : 한옹(韓雍) (1394 - 1425)
    • 1352 ~ 1425, 자 : 백희(百熙), 호 : 정포(靜浦), 예(銳)의 증손, 진(瑨)의 손자, 방좌(邦佐)의 아들
  • 2대 : 한권(韓卷) (1425 - 1437)
    • 1387 ~ 1437
  • 3대 : 한숙(韓淑) (1437 - 1460)
    • 1412 ~ 1460
  • 4대 : 한사 (韓社) (1460 ~ 1483)
    • 1433 ~ 1483
  • 5대 : 한이 (韓珥) (1483 ~ 1509)
    • 1440 ~

서흥 김씨

  • 6대 : 김상 (金庠) (1509 ~ )
    • 1478 ~

중앙관제

군사 조직

  • 2군 : 중앙군
    • 감문총위군
    • 교각총통위군
  • 4(조일 전쟁 이후 +1)위 : 지방군
    • 서경위 : 경기주, 관중주, 옥저주, 강동주, 개마주, 동북주
    • 봉안위 : 봉안주, 서해주, 동해주
    • 조사위 : 조사주, 황산주
    • 임주위 : 백마주, 남해주, 탐라주
    • 구주위

관계

  • 정1관 : 장안주작관문대원수, 명예직
  • 종1관 : 총서령, 사도감 판사
  • 정2관 : 좌·우서령,
  • 종2관
  • 정3관
  • 종3관
  • 정4관
  • 종4관
  • 정5관
  • 종5관
  • 정6관
  • 종6관
  • 정7관
  • 종7관
  • 정8관
  • 종8관
  • 정9관
  • 종9관

협족제

고려 전쟁 도중 조선에 귀화한 세력 지도자나 공을 세운 자들에게 세습 가능한 '검사대치(儉賜代治)'라 불리는 영지와 위를 하사함.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의 다섯 종류를 지님. 중앙에서 파견한 중앙 관리가 일정 주기로 각 검사대치를 시찰하며, 이도영의 난 이후 협족의 가족 중 후계자를 볼모로 하여 평양부에 두고 일정 주기로 협족 일가족 전원이 평양부로 올라오도록 한 명계휘치(明系輝治)제를 실시함. 명계휘치제는 볼모의 목적도 있었으나, 이름과 같이 협족 후계자들을 교육하는데의 목적도 있었음. 어릴때부터의 교육으로 지방 협족들은 왕검과 대원수에게 충성함. 공작, 후작, 백작만이 검사대치를 하사 받으며, 자작과 남작은 공을 세운 신하나 지방 협족에게 사하는 일종의 명예직. 협족들은 주에 위치한 목의 감시 하에 검사대치에서의 행정과 사법, 군무 등에 대해 권한을 지님. 검사대치는 남에게 대여하거나 팔 수 없었음

행정 구역

조일 전쟁 이후

영향

ㅡ틀ㅡ

연습장:Enzo2015
연습장:Enzo2015/1  ·  연습장:Enzo2015/2  ·  연습장:Enzo2015/3  ·  연습장:Enzo2015/4 ·  연습장:Enzo20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