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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은 거문도 및 주변 반도에 대한 조차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영국 해군은 무단으로 거문도에 정박한 채로 1년의 시간이 흐르게 된다. 이후 관련 내용을 받아든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문호 개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을 개항 시키기 위한 교두보로 판단하고 거문도와 관련 반도를 조선 정부로부터 6만 5천 파운드라는 헐값에 구매하였다<ref>현재 880만 파운드, 한화 약 135억원.</ref><ref>동인도 회사의 주된 논리는 우리는 나라가 아니고 개인 회사이며 영국과는 오히려 경쟁 관계라는 주장이었다.</ref>.
하지만 조선은 거문도 및 주변 반도에 대한 조차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영국 해군은 무단으로 거문도에 정박한 채로 1년의 시간이 흐르게 된다. 이후 관련 내용을 받아든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문호 개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을 개항 시키기 위한 교두보로 판단하고 거문도와 관련 반도를 조선 정부로부터 6만 5천 파운드라는 헐값에 구매하였다<ref>현재 880만 파운드, 한화 약 135억원.</ref><ref>동인도 회사의 주된 논리는 우리는 나라가 아니고 개인 회사이며 영국과는 오히려 경쟁 관계라는 주장이었다.</ref>.


이후 동인도 회사는 조선 지부를 설립하였으며, 조선에서 따로 통화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 파운드라는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취급하는 사치품과 대량 생산된 생필품, 싸고 질 좋은 식자재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동인도 회사 파운드가 필요했으며, 조선의 고위층과 해밀턴 지구(거문도 주변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도 파운드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후 동인도 회사는 조선 지부를 설립하였으며, 조선에서 따로 통화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 파운드라는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취급하는 사치품과 대량 생산된 생필품, 싸고 질 좋은 식자재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동인도 회사 파운드가 필요했으며, 조선의 고위층과 해밀턴 지구(거문도 주변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도 파운드가 조선의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동인도 회사는 당시 세도 가문이던 안동 김씨에 자금을 대며 철종의 동인도 회사 무력화 시도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특히 동인도 회사는 당시 세도 가문이던 안동 김씨에 자금을 대며 철종의 동인도 회사 무력화 시도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2021년 2월 1일 (월) 23:21 판

영국령 코리아
British Korea
국기 문장
1862년 ~ 1905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조선 코리아 자치령
국가 신이시여 국왕 폐하를 지켜주소서
위치 코리아 반도
수도 해밀턴 (1862 - 1868)[1]
리버러스터 (1862 - 1868)
맨브룩 (1868 - 1894)
캐피탈 (1894 - 1905)
국가원수 명목상: 황제
사실상: 부왕 및 총독
주요 총독 7대 델라웨어 백작, 레지놀드 새크빌(1862 - 1885)
6대 스펜서 백작, 찰스 스펜서(1885 - 1895)
6대 타운센드 후작, 존 타운센드(1895 - 1905)
언어 영어, 코리아어
민족 영국인, 조선인
종교 개신교, 불교
주요 사건 1852년 거문도 사건
1853년 영국 동인도 회사 조선 지부 설립
1862년 임술농민봉기쿠퍼 조약
1862년 코리아개척법 제정
1894년 농민 항쟁고종 폐위
1894년 영청전쟁
1905년 남만주 사건
1905년 코리아통치법 제정
통화 영국령 코리아 파운드

1862년부터 1905년까지 43년 간 존속한 대영제국의 식민지이다. 인구는 1905년 기준 1,800만 정도로 대영제국의 식민지 중 두 번째로 인구가 많았다.

역사

영국 동인도 회사 조선 지부

1853년의 영국 동인도 회사 조선 지부 설립 이전에 조선과 영국은 거문도 사건으로 처음 외교적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1852년 거문도(현 해밀턴)을 점령한 영국은 조선에 거문도를 포함한 남해안의 반도의 조차를 요구하였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저지하면서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전략적 거점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조선의 거문도 주변 반도에 해군기지를 세워 태평양으로 향하는 최단 기착지로 함과 동시에 동아시아의 비문명 3국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선은 거문도 및 주변 반도에 대한 조차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영국 해군은 무단으로 거문도에 정박한 채로 1년의 시간이 흐르게 된다. 이후 관련 내용을 받아든 영국 동인도 회사는 문호 개방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을 개항 시키기 위한 교두보로 판단하고 거문도와 관련 반도를 조선 정부로부터 6만 5천 파운드라는 헐값에 구매하였다[2][3].

이후 동인도 회사는 조선 지부를 설립하였으며, 조선에서 따로 통화 체계가 잡히지 않은 것을 파악하고 영국 동인도 회사 파운드라는 새로운 통화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동인도 회사가 취급하는 사치품과 대량 생산된 생필품, 싸고 질 좋은 식자재 등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동인도 회사 파운드가 필요했으며, 조선의 고위층과 해밀턴 지구(거문도 주변 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동인도 파운드가 조선의 한 구석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특히 동인도 회사는 당시 세도 가문이던 안동 김씨에 자금을 대며 철종의 동인도 회사 무력화 시도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하지만 1857년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 항쟁으로 동인도 회사는 인도에서의 모든 권리를 청산당하면서 주 사업장이 조선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임술 농민 봉기

1862년 2월 진주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동인도 회사는 농민군에 싼 값에 화승총을 팔아 치웠다. 그리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현할 태세가 보이자 각 농민군에 동인도 회사는 농민군을 지지하며 언제든지 대영제국 해군이 도와줄 수 있다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5월에 전국적 사태로 흘러가자 조정은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농민군의 무장이 사실상 조정의 무장과 대등한 수준이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6월 영국 동인도-중국 함대의 아우구스투스 레오폴드 쿠퍼 제독이 직접 조정에 방문하여 대영 해군이 농민 봉기를 진압하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전하였다. 쿠퍼 제독의 제안에 철종은 이를 거절하려 하였지만, 세도 가문이 이를 뒤에서 수락하고 어새를 통해 영국이 조선을 보호하는 쿠퍼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영국이 임술농민봉기를 진압하게 되었다.

쿠퍼 조약에 의해 해밀턴(거문도), 리버러스터(강화도), 맨브룩(인천), 넬슨(나진), 뉴조지(평양), 뉴에든버러(강릉)가 영국의 직접 통치 하에 놓이게 되었다. 쿠퍼 조약을 바탕으로 영국은 조선 해안에 대한 자유로운 측량의 권리를 얻었으며, 측량에 대한 대가라는 명목으로 값싼 동인도 파운드를 지역마다 마구 뿌려 대며 조선의 경제를 잠식하고 조선의 통화 가치를 폭락 시켰다.

코리아 개척법 제정과 고종 시대

동인도 회사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장악이 한창인 가운데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는 코리아개척법을 제정하여 코리아 반도 내의 전략적 거점을 통제하길 원했다. 개척법을 통해 1863년부터 매년 1만 2천여 명의 영국인이 조선의 척박한 강계 지역과 함경도 지역에 정착했다. 대동강 이북과 영동지방을 중심으로 영국인의 수가 빠르게 불어나 이후 1900년에 들어서는 조선 내의 영국인이 150만 여 명에 육박하게 된다.

1864년 철종이 사망하고 고종이 어린 나이에 조선의 부왕으로 즉위 했다. 하지만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대신 통치 하였다. 대원군은 영국의 계속된 내정 간섭에 반발하고 다시 이씨 가문이 통치하는 전제왕조로 돌아가길 원했다. 특히 리버러스터[4]에 있는 대영제국 총독부를 본 이후에는 하루 빨리 경복궁을 재건해 왕실의 권위를 되찾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조선에 널리 유통되던 동인도 파운드로 인한 경제적 통제를 탈피하려고 노력했다. 조선 통화량을 수 십배로 늘려 화폐의 거래량으로 동인도 파운드의 가치를 떨어트리려고 한 것이다. 이런 생각에 기반한 정책으로 상평통보에 100배에 해당하는 당백전을 경복궁 중건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지급하였다.

하지만 매우 안일한 생각으로써 오히려 상평통보를 위시하는 조선의 통화체계는 당백전의 발행으로 완전히 붕괴되었다. 당백전의 발행으로 아주 잠깐 거래량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모두 한양에서 한정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었으며, 6개월 간 쏟아져 나온 1600만 냥의 당백전으로 오히려 시중에 유통되는 상평통보의 가치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며 당백전의 100배라는 가치를 조정이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1867년 당백전은 조정의 지시로 모두 회수 되었으며, 사실상 조선의 통화 체계는 완전히 동인도 파운드로 넘어가게 된다.

흥선대원군의 계속된 실정으로 코리아라는 시장 자체의 붕괴를 염려한 레지놀드 새크빌 영국령 코리아 총독이 흥선대원군에게 압력을 넣어 1874년 정치에서 손을 떼도록 조치 하였다. 이에 고종이 실질적인 조선의 국왕으로 통치를 시작한다. 고종과 명성왕후는 영국의 보호통치와 총독을 통한 내정 간섭을 극도로 혐오하였으며, 아편전쟁으로 영국에 이를 가는 청나라와 부동항 확보를 위해 남진 정책을 펼치던 러시아에 물밑 접촉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와 러시아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조선의 전제군주국화를 지지하였다. 이에 고종은 별기군을 창설함과 동시에 러시아로부터 머스킷과 기술진, 그리고 장교들을 영입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모두 경복궁 내부라는 외국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에서 행해지면서 당시 영국령 코리아 총독을 이러한 움직임을 알아챌 수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지게 되는데, 1882년 구식 군대의 급료를 실물인 쌀이 아니라 사실상 시장에서 죽어버린 상평통보로 지급하며 사건이 시작되었다. 선혜청(宣惠廳)에서 밀린 구식군의 급료를 쌀이 아니라, 시장에 유통되지 않아 대량으로 조정에 쌓여있던 상평통보로 지급하려 하였다. 구식 군인들은 상평통보로는 국밥도 얻어먹을 수 없다고 쌀을 요구했지만 선혜청에서 싫으면 받지 말라는 대응으로 나오자 불만이 폭발하며 경복궁을 습격하게 된다.

습격 과정에서 질 좋은 쌀을 받아가는 별기군과 훈련 중인 러시아인 장교를 발견한 구식 군인들은 별기군과 장교단을 살해하고 궁전을 점거하였다. 별 수 없이 당시 영의정 홍순목이 영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영국군이 임오군란을 진압한다. 임오군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영국은 조선이 러시아와 교섭을 통해 통제를 벗어나려 했다는 것에 분노하고 고종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총독에게 대외 사무를 이관하였다.

농민 항쟁과 영청 전쟁

외교권을 박탈 당한 고종은 더더욱 청나라에 기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영국이 청나라와의 관계는 눈치채지 못했을 뿐더러, 청나라는 당시 양무운동을 통해 신식 군대를 재편하며 서구 열강과의 전면전에 이를 갈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박탈된 권한은 외교권 뿐이었지만 사실상 외교권과 함께 내정도 심각하게 간섭을 받아 조선의 백성들은 영국령 코리아 총독부와 조선 정부에 이중으로 과세를 당하고 있었다.

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는 삼남지방에서 전국적으로 확산하며, 조정과 총독부를 위협하였다. 하지만 총독부는 조선의 요청이 있을 때 까지 영국의 직접통치령 까지 들어오지 않는 이상 이를 방관하였으며 무장 대기만을 지시하였다. 또한 해밀턴항에 있던 동인도 함대가 리버러스터항으로 집결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영국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으며, 청나라에 북양함대와 북양군을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북양군은 평안도로, 북양함대는 강화도로 집결하게 된다. 윌리엄 케네디 동인도 함대 사령관은 전보를 통해 청나라에 현재 청 함대가 대영제국의 보호국 영해에 무단 침입 중이라고 보냈으나 이는 무시되었고, 북양함대가 대영 해군을 공격하며 영청전쟁이 발발한다.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를 바랬지 청나라와 영국이 싸운 것을 원하지 않은 명성왕후와 고종은 진주로 특사를 보내 농민군과 진주 화약을 맺고 전투를 종료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미 구축함 HMS 코리엔테스가 격침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국은 전혀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각주

  1. 태풍이 부는 7~8월이 되면 수도 기능이 리버러스터로 이전
  2. 현재 880만 파운드, 한화 약 135억원.
  3. 동인도 회사의 주된 논리는 우리는 나라가 아니고 개인 회사이며 영국과는 오히려 경쟁 관계라는 주장이었다.
  4. 7~9월에만 사용되는 임시 총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