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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무제]]가 일으킨 [[하북 봉기]] 이전의 역사는 [[청나라 (동방)|청나라]]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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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서제]]가 [[대한국 (동방)|한국]] 황제 [[광종 (동방)|광종]]에게 선양한 후, 그의 이복동생인 [[헌무제|애신각라 재풍]]이 주도하여 일어난 1907년의 [[하북 봉기]]가 옹청의 시작이다. 비록 하북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재풍은 한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안으로 무사히 탈출하였으며 복벽파 군벌들과 반한파 신료들과 함께 청나라 조정을 재건한다. 황제는 명목상 한국에 있던 광서제였지만 사실상 청 황제를 대리하는 관직인 감국섭정왕을 재풍이 맡으면서 실질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재풍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옹청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어주었으며 재풍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휘하 군벌 수장들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1922년 [[청염전쟁|산서 군벌을 정벌하거나]], 감숙성의 여러 회족 군벌들을 포섭하는 등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재풍의 치세 아래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옹청은 하남성과 산동성, 안휘성과 강소성 일부에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장강 이남의 국민당과 더불어 중국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한다. 재풍은 늘 하북을 비롯한 북경의 인근 지방들로 진출하기를 바랬지만 한국의 강력한 통치력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재풍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사천성이었다. 사천성은 지역 군벌 류샹의 안정된 통치 아래 있었는데 국민당이 어떻게든 사천을 손에 넣으려 여러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1934년 때마침 국부군의 탄압에 밀려 공산군이 사천으로 진입하였고 장제스는 류샹에게 홍군의 토벌을 명령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광서제]]가 [[대한국 (동방)|한국]] 황제 [[광종 (동방)|광종]]에게 선양한 후, 그의 이복동생인 [[헌무제|애신각라 재풍]]이 주도하여 일어난 1907년의 [[하북 봉기]]가 옹청의 시작이다. 비록 하북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재풍은 한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안으로 무사히 탈출하였으며 복벽파 군벌들과 반한파 신료들과 함께 청나라 조정을 재건한다. 황제는 명목상 한국에 있던 광서제였지만 사실상 청 황제를 대리하는 관직인 감국섭정왕을 재풍이 맡으면서 실질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재풍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옹청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어주었으며 재풍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휘하 군벌 수장들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1922년 [[청염전쟁|산서 군벌을 정벌하거나]], 감숙성의 여러 회족 군벌들을 포섭하는 등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재풍의 치세 아래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옹청은 하남성과 산동성, 안휘성과 강소성 일부에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장강 이남의 국민당과 더불어 중국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한다. 재풍은 늘 하북을 비롯한 북경의 인근 지방들로 진출하기를 바랬지만 한국의 강력한 통치력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재풍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사천성이었다. 사천성은 지역 군벌 류샹의 안정된 통치 아래 있었는데 국민당이 어떻게든 사천을 손에 넣으려 여러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1934년 때마침 국부군의 탄압에 밀려 홍군이 사천으로 진입하였고 장제스는 류샹에게 홍군의 토벌을 명령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홍군은 성도 서부의 대설산맥을 따라 북상하였고 국부군은 이들을 쫓아 한중 인근의 광원에 진주하였다. 이에 옹청도 한중으로 진주하였고 서로 인근에서 옹청군과 국부군이 대치하는 동안 약 수천명에 불과한 홍군은 용남과 천수를 거쳐 난주로 빠져나갔다. 문제는 재풍은 이 홍군을 추격하지 않고 계속 한중 인근에만 군사를 늘렸는데 애초 재풍의 목적은 한중을 통해 사천으로 진입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었지, 홍군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감숙에는 옹청에 협조적인 회족 군벌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이들에게 홍군 ‘따위’ 자연스럽게 격파되어 와해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으나 홍군은 끝끝내 살아남아 신장으로 건너가 소련의 원조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보계전투|훗날 옹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 역사적 정통성 문제 =
= 역사적 정통성 문제 =

2022년 4월 12일 (화) 12:42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중화연방의 구성국
다이칭 구룬 ・ 대청국
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 大淸國 | West Qing
국기 국장
상징
국가 공금구
국화 연꽃
역사
• 1940년 1월 1일 선통제 즉위
• 2004년 2월 1일 효종의 선위, 한청연합 결성
지리
[ 펼치기 · 접기 ]
수도 청두
최대도시
면적 km2
접경국 대한국, 중국
인문환경
[ 펼치기 · 접기 ]
인구 전체 인구 191,662,035명(2020)
민족 구성 한족 86.7%, 기타 민족 13.3%
인구밀도 43.74명/km2
언어 공용어 표준중국어, 만주어
상용어 촉어, 몽골어 등
종교 국교 없음
불교 73.2%, 개신교 7.8%, 가톨릭 6.3%, 이슬람교 3.5%, 기타 종교 8.6%
군사
없음
(대한국 국군이 대행)
정치
[ 펼치기 · 접기 ]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다당제, 성문법주의(대륙법계)
국가원수
(대한국 황제)
선덕제
국왕
(만왕)
력왕
정부
요인
의회의장 천민화
내각총리대신 리허
대법원장 린쉐
경제
[ 펼치기 · 접기 ]
명목 GDP 전체 GDP 13조 654억$(2020)
1인당 GDP 53,192$
GDP(PPP)
전체 GDP 13조 9017억$(2020)
1인당 GDP 56,597$
화폐 중국 위안(CNY, ¥)
단위
[ 펼치기 · 접기 ]
법정연호 선덕(宣德), 서력기원
시간대 UTC+6 (서부 시간)
UTC+7 (성도 시간)
도량형 SI 단위계
ccTLD
.wq, .淸
국제 코드
416, KWQ, WQ
국제 전화 코드
+82

역사

헌무제가 일으킨 하북 봉기 이전의 역사는 청나라 문서 참고.

광서제한국 황제 광종에게 선양한 후, 그의 이복동생인 애신각라 재풍이 주도하여 일어난 1907년의 하북 봉기가 옹청의 시작이다. 비록 하북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재풍은 한국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서안으로 무사히 탈출하였으며 복벽파 군벌들과 반한파 신료들과 함께 청나라 조정을 재건한다. 황제는 명목상 한국에 있던 광서제였지만 사실상 청 황제를 대리하는 관직인 감국섭정왕을 재풍이 맡으면서 실질적인 국가원수가 되었다. 재풍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옹청의 강력한 구심점이 되어주었으며 재풍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휘하 군벌 수장들의 군사적 능력을 통해 1922년 산서 군벌을 정벌하거나, 감숙성의 여러 회족 군벌들을 포섭하는 등 그 세력을 불려나갔다. 재풍의 치세 아래 193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옹청은 하남성과 산동성, 안휘성과 강소성 일부에 진출하는데 성공하면서 장강 이남의 국민당과 더불어 중국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 세력으로 성장한다. 재풍은 늘 하북을 비롯한 북경의 인근 지방들로 진출하기를 바랬지만 한국의 강력한 통치력으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에 재풍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사천성이었다. 사천성은 지역 군벌 류샹의 안정된 통치 아래 있었는데 국민당이 어떻게든 사천을 손에 넣으려 여러 방도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1934년 때마침 국부군의 탄압에 밀려 홍군이 사천으로 진입하였고 장제스는 류샹에게 홍군의 토벌을 명령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다.

홍군은 성도 서부의 대설산맥을 따라 북상하였고 국부군은 이들을 쫓아 한중 인근의 광원에 진주하였다. 이에 옹청도 한중으로 진주하였고 서로 인근에서 옹청군과 국부군이 대치하는 동안 약 수천명에 불과한 홍군은 용남과 천수를 거쳐 난주로 빠져나갔다. 문제는 재풍은 이 홍군을 추격하지 않고 계속 한중 인근에만 군사를 늘렸는데 애초 재풍의 목적은 한중을 통해 사천으로 진입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었지, 홍군을 진압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감숙에는 옹청에 협조적인 회족 군벌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이들에게 홍군 ‘따위’ 자연스럽게 격파되어 와해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었으나 홍군은 끝끝내 살아남아 신장으로 건너가 소련의 원조를 받으며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훗날 옹청을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게 된다.

역사적 정통성 문제

애신각라 왕조 당시에는 옹청의 역사는 곧 중국 대륙을 통치하던 청의 역사의 연장선이었다. 즉, 1616년이 국가의 건국년도였고 조정의 체계와 국가적 관습을 그대로 따랐기에 청과 옹청은 전성기의 그 규모만 다를 뿐 같은 국가였다. 정치적 문제로 공인되지 못할 뿐, 현대의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옹청을 청과 거의 같은 계열 국가로 분류하는 것이 정설이다.

애신각라 왕조가 유지되던 순성제 치세까지 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광서제대한국 황제 광종에게 선양한 것은 표면상 그러할 뿐 실상은 불법적인 찬탈이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옹청이 청의 정통성을 물려받은 국가이며 그 정통성은 한국과는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한편으로 이런 정통성에 대한 인식외에는 옹청과 한국의 사이는 나쁘지 않은 편인 가운데 70년대 해빙 분위기가 조성되고 북공남민 사이의 관계가 가까워지자 두쪽과 모두 적대하고 있던 옹청은 불안과 혼란에 빠졌다. 순성제의 파격적인 선위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