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정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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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사관(일본어: 王政史観)은 태화국의 역사를, 왕도일우를 주장하는 태왕 중심의 국가주의적인 관점에서 보는 역사적 견해를 일컫는다. 태화국에서 시작된 수백년간 존속을 상징하는 역사관이다.

변천사

전근대 왕정사관

왕정사관의 원조는 중세 태화국 시기의 재야 정치가이자 문인이었던 가정휼이 1412년에 쓴 《왕도일우와 군정록》에서 시작되었다. 가정휼이 내세운 왕도일우 사상은 당시 재야 정치인들 사이에서 국수주의적인 모습을 반영한 시대적 산물이었고, 이러한 재야 정치인들이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하면서 정치적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문성 정청 왕정사관

문성 정청 시대에는 정계로 진출한 국수주의적 재야 사학자, 정치가들과 국학론자들이 "태화는 군왕(君王)을 중심으로 기반되는 나라"라는 주장을 통해 "존왕협민" 사상이 강조되었다.

일본 간섭 시기 왕정사관

태화 총독부가 설치되면서 1899년에 국왕을 집정관으로 격하시키는 일이 발생하자 대대적인 복벽론자들의 항일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복벽 사상은 192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1925년에 일본이 간섭 정책을 유화하여 괴뢰국인 위태화국을 수립시키자 복벽 운동은 사그라 들었다. 그럼에도 지방의 항일 운동가들은 독립 정신을 강조하고 강제로 진행된 다민족 사회에 반하기 위한 민족주의를 양성하고자 왕정사관을 적극 이용하였다.

현대의 왕정사관

1945년 해방 이후 민족 정신과 항일 독립을 주장하던 왕정사관은 민족사관에 합류하여 지금의 사학계에서 주류 역사관으로 인정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나친 왕실 미화와 도를 넘는 국수주의 태도가 이른바 범태주의를 명목으로 역사 왜곡이 진척을 이룸에 따라 향토사관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반(反) 민족사관 태도가 태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