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 축구 국가대표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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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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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월본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도 참가 신청서를 내며 참가했으나 브라질과 유고슬라비아에게 4대0으로 패배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선전했던 결과라고 평가받는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아프리카-아시아에 배정된 1장의 티켓을 두고 이집트와 경쟁하였고, 이집트와의 예선을 5대3으로 승리하며 연속으로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다.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헝가리와 아프리카-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여 올라온 월본의 대결은 헝가리의 압승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예상대로 헝가리가 27분 만에 2골을 넣어 경기가 손쉽게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월본의 성우진이 2골을 넣어 따라붙었다. 하지만 헝가리가 2골을 추가로 넣어 결과는 헝가리의 4대2 승리였다. 월본은 비록 패배했지만 아시아 축구의 서막을 세계에 알렸다. 이 기세를 몰아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 신청을 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예선에서 이기고 이번에도 헝가리와 1라운드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6대0으로 패배하였다. 그러나 월본 내 축구팀들은 여전한 인기를 자랑하여 축구 열기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이후 월본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도 참가 신청서를 내며 참가했으나 브라질과 유고슬라비아에게 4대0으로 패배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선전했던 결과라고 평가받는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아프리카-아시아에 배정된 1장의 티켓을 두고 이집트와 경쟁하였고, 이집트와의 예선을 5대3으로 승리하며 연속으로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다.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헝가리와 아프리카-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여 올라온 월본의 대결은 헝가리의 압승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예상대로 헝가리가 27분 만에 2골을 넣어 경기가 손쉽게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월본의 성우진이 2골을 넣어 따라붙었다. 하지만 헝가리가 2골을 추가로 넣어 결과는 헝가리의 4대2 승리였다. 월본은 비록 패배했지만 아시아 축구의 서막을 세계에 알렸다. 이 기세를 몰아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 신청을 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예선에서 이기고 이번에도 헝가리와 1라운드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6대0으로 패배하였다. 그러나 월본 내 축구팀들은 여전한 인기를 자랑하여 축구 열기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 시련의 시기 (1940~50년대) ===
월본 축구는 1940년대 중해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심화되자 쇠퇴하기 시작한다.
1940년 초까지는 팀간 경기가 지속되었지만 중해전쟁이 시작되자 경기는 중단되었고 선수 중 일부가 징병되기도 하였다. 결국 월본 내전이 일어나게 되자 축구는 완전히 월본에서 중단되며 1945년 종전까지 단 한 경기도 개최되지 못한다. 월본 축구의 전설인 성우진도 이 시기에는 징집을 피해 도피했을 정도로 축구 인프라는 붕괴되었다. 1945년 종전 후 축구팀들이 복귀하나 국가 인프라 붕괴와 재건으로 인해 금세 흐지부지되었다.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도 위기를 맞았으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의 위주로 자발적인 대표팀이 조직되었으며,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1948년 하계 올림픽에도 참가하며 '월본'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출전하는 등 시련의 시기를 이겨나갔다. 그러나 1950년 브라질 월드컵과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은 사정상 불참할 수밖에 없었고 월드컵의 복귀는 1958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 이후 민태훈의 노력으로 도신설종합축구단을 위주로 클럽 축구 부흥이 다시 일어났고, 이에 힘업어 성우진도 축구계에 복귀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 이후 1956년 홍콩 아시안컵에 출전하여 2승1패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시련의 시기를 탈출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월본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재참가하며 무려 20년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다. 예선에서 이스라엘이 첫 참가 신청을 했는데, 껄끄러운 상대와 붙기 싫었던 아시아의 국가들이 참가 신청을 했다가 다시 기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월본은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별로 없었기에 이스라엘과 단 둘이서 예선을 치루게 되었다.
그 이후 월본은 이스라엘과 예선을 치루어 승리하면서 20년만에 월드컵에 복귀하게 되고, 스웨덴, 멕시코, 헝가리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들과 3조에 배정된다. 비록 스웨덴과 헝가리에 연달아 패하며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멕시코와 1대1로 비기며 사상 첫 월드컵 승점을 얻어내며 월본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 발전의 시기 (1960~80년대) ===
1962년 칠레 월드컵에는 아시아 예선에서 치루어 탈락하여 참가하지 못했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는 북한의 출전으로 인해 기권하며 1960년대의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대신 아시안컵에서 선전을 이어나가며 축구 발전을 계속해 나갔다. 1960년 대한민국 아시안컵에서도 2승1패로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1964년 월본에서 개최된 아시안컵에서는 3전전승으로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68 이란 아시안컵에서도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축구 강호의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는 6개팀으로 예선이 치뤄졌다. 당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같이 예선을 치렀고, 아시아 축구 연맹 소속이던 월본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꺾고 본선에 갔지만 첫 경기에서 우루과이에 0:2로 패했다. 그나마 스웨덴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 역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같이 예선을 치렀고, 결승은 월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홈 앤드 어웨이로 결정되었다. 두 팀은 두 경기 모두 비기고, 홍콩에서 중립경기로 본선 진출 팀을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호주가 2대0으로 승리하여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였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이란에 밀려 예선 탈락하며 진출하지 못했다. 이렇게 1970년대는 월본이 차근차근 세계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가며 실력을 기르고 있던 시기였다. 1972년 태국 아시안컵에서는 월드컵에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대학, 실업 선수들을 출전시켰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후 1976년 이란 아시안컵에서는 정식 선수들을 출전시켰으나 결승전에서 패배하여 준우승의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합쳐서 두 팀이 배정되어, 최종 예선 1, 2위에게 본선 진출권이 주어졌다. 예선 결과 월본이 최종 예선 1위를 차지하여 본선에 직행하였다. 그러나 조가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잉글랜드라는 죽음의 조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로 1976 우승, 1980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동구권 최강자였고, 프랑스는 전설의 플라티니를 주축으로 이 대회 및 다음 대회 연속 4강, 유로 1984 우승컵을 차지한 우승 후보였다. 잉글랜드는 이들 중 커리어는 가장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 조별리그에서 3전 전승으로 올라갈 만큼 저력이 있는 팀이었다. 그래도 올림픽 우승팀 체코슬로바키아와 비기는 선전을 펼쳤으나 나머지 둘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한국에 패배하며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1980년대 아시안컵에서는 '''두번의 우승과 1번의 3위'''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게다가 1988년 월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하면서 기쁨은 두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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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31일 (일) 17:04 판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
Wubon National Football Team
별칭
바다의 왕자, 파란 선구자들
FIFA 코드
WUB
협회
월본축구협회 (WFA)
연맹
아시아 축구 연맹 (AFC)
지역연맹
동아시아 축구 연맹 (EAFF)
감독
윤정환 (尹晶煥)
주장
이민성 (李敏聖)
최다출전자
오우현 (吳佑賢) / 146경기
최다득점자
유성일 (柳盛逸) / 177골
홈구장
도유 윤진종합경기장 (68,000석)
라이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침 - 한월전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 태평양 더비
첫 국제경기 출전
VS 중화민국 (0:2 승)
월본 도유 (1922년 6월 17일)
최다 점수차 승리
VS 아프가니스탄 (17:0 승)
아프가니스탄 카불 (1994년 1월 6일)
최다 점수차 패배
VS 브라질 (0:11 패)
브라질 상파울루 (1965년 6월 5일)
월드컵
출전 14회
아시안컵
출전 16회
올림픽
출전 8회
(1956, 1988, 1992, 1996, 2000, 2004, 2008, 2016)
FIFA 랭킹
29위 (2021.01)
Pride of Asia, Wubon!

개요

월본축구협회 산하의 월본의 축구 국가대표팀. 아시아에서 정상급의 실력을 가졌다고 인정받고 있으며, 실제로 월드컵 4강 1회, 8강 2회, 16강 2회로 세계 축구계에서도 통할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팀이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이긴 뒤 4강까지 오르는 돌풍(밀라노의 기적)을 일으켰으며, 동시대 선전한 한국 대표팀과 함께 아시아 축구팀 돌풍의 문을 연 팀이라고 평가받으며 아시아 팀들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 이후에도 연속 출전하며 아시아 축구에서 가장 정상급의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다. 다른 국가들이 축구 발전이 느린 1930년대에 선수를 쳐서 꾸준히 나간 것이긴 하지만 14회 월드컵 출전을 기록하여 세르비아, 우루과이, 벨기에 등의 국가와 비슷한 수준의 출전을 기록했다.

월드컵 전적은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FIFA 월드컵 항목 참조.

역사

태동기 (메리치 개신~1930년대)

월본 축구는 메리치 개신 이후 처음으로 그 기록을 드러냈다. 1891년 프랑스인 주자크 네케르(juzacques Necker)에 의해 처음으로 월본에 축구가 소개되었으며, 그 이후 축구는 메리치 개신에 맞추어 급격한 공업화로 인해 증가한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여가로 주목받았다. 실제로 노동자들에 의해 1892년 도유축구단[1]이 창단되었으며, 도유축구단이 그 이후 10여년간 성장하자 1900년에는 도신설종합축구단이, 1903년에는 주곤축구단, 단청종합축구구락부가, 1904년에는 도유월본구락부, 북양도축구단 등이 창단되며 월본 축구의 시작을 알렸다. 이후 월본 축구는 노동자들에 의해 주도되다가 점차 축구 경기가 인기를 끌며 축구단 간 더비가 회사, 지역을 대표하는 시합으로 여겨지며 회사와 지역에서 축구단에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되어 체계화되기 시작한다. 회사가 지원한 축구단은 현재 기업구단의 뿌리가 되고 지역이 지원한 축구단은 현재 시민구단의 뿌리가 된 것이다.

그 이후 도신설종합축구단과 주곤축구단간의 남북더비, 도유축구단과 도유월본구락부간의 도유매치, 도유축구단과 단청종합축구구락부간의 동서더비가 인기를 끌며 현재까지 내려져 오는 더비 매치의 씨앗이 된다. 정부도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축구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게 되고, 시민들도 새로운 여가의 증가와 애향심으로 인한 지역 구단 응원으로 축구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1910년 현재 월본축구협회의 뿌리가 되는 월본제국축구관리회의 설립이 이뤄진다.

정식 축구 국가대표팀의 구성은 1910년대 후반부터 논의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클럽 간 의견 격차와 행정 미비로 순조롭게 이뤄지지 못하다가 1922년이 되어서 마침내 첫 국가대표팀 소집이 이뤄지게 된다. 첫 국가대표 경기는 중화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1922년 6월 17일 도유에서 이뤄졌으며 월본이 2대0으로 승리하였다. 그 이후 월본은 아시아 여러 국가와 시합을 하였으며, 심지어는 당시 식민지 상태였던 국가들의 팀과도 경기를 하여 현재의 한월전, 태평양 더비 등의 유명 더비를 만들어 나갔다.

이후 월본은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도 참가 신청서를 내며 참가했으나 브라질과 유고슬라비아에게 4대0으로 패배하며 세계의 벽을 실감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선전했던 결과라고 평가받는다.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아프리카-아시아에 배정된 1장의 티켓을 두고 이집트와 경쟁하였고, 이집트와의 예선을 5대3으로 승리하며 연속으로 월드컵에 진출하게 된다.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헝가리와 아프리카-아시아 지역 예선을 통과하여 올라온 월본의 대결은 헝가리의 압승으로 끝날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었다. 예상대로 헝가리가 27분 만에 2골을 넣어 경기가 손쉽게 끝날 거라 생각했지만 월본의 성우진이 2골을 넣어 따라붙었다. 하지만 헝가리가 2골을 추가로 넣어 결과는 헝가리의 4대2 승리였다. 월본은 비록 패배했지만 아시아 축구의 서막을 세계에 알렸다. 이 기세를 몰아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출전 신청을 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예선에서 이기고 이번에도 헝가리와 1라운드에서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6대0으로 패배하였다. 그러나 월본 내 축구팀들은 여전한 인기를 자랑하여 축구 열기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시련의 시기 (1940~50년대)

월본 축구는 1940년대 중해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심화되자 쇠퇴하기 시작한다.

1940년 초까지는 팀간 경기가 지속되었지만 중해전쟁이 시작되자 경기는 중단되었고 선수 중 일부가 징병되기도 하였다. 결국 월본 내전이 일어나게 되자 축구는 완전히 월본에서 중단되며 1945년 종전까지 단 한 경기도 개최되지 못한다. 월본 축구의 전설인 성우진도 이 시기에는 징집을 피해 도피했을 정도로 축구 인프라는 붕괴되었다. 1945년 종전 후 축구팀들이 복귀하나 국가 인프라 붕괴와 재건으로 인해 금세 흐지부지되었다. 월본 축구 국가대표팀도 위기를 맞았으나 전쟁에서 살아남은 선수들의 위주로 자발적인 대표팀이 조직되었으며, 어려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1948년 하계 올림픽에도 참가하며 '월본'이라는 이름으로 대회에 출전하는 등 시련의 시기를 이겨나갔다. 그러나 1950년 브라질 월드컵과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은 사정상 불참할 수밖에 없었고 월드컵의 복귀는 1958년으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 이후 민태훈의 노력으로 도신설종합축구단을 위주로 클럽 축구 부흥이 다시 일어났고, 이에 힘업어 성우진도 축구계에 복귀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 그 이후 1956년 홍콩 아시안컵에 출전하여 2승1패로 준우승을 차지하며 시련의 시기를 탈출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어느정도 안정되자, 월본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 재참가하며 무려 20년만에 월드컵 무대에 복귀한다. 예선에서 이스라엘이 첫 참가 신청을 했는데, 껄끄러운 상대와 붙기 싫었던 아시아의 국가들이 참가 신청을 했다가 다시 기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월본은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별로 없었기에 이스라엘과 단 둘이서 예선을 치루게 되었다.

그 이후 월본은 이스라엘과 예선을 치루어 승리하면서 20년만에 월드컵에 복귀하게 되고, 스웨덴, 멕시코, 헝가리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들과 3조에 배정된다. 비록 스웨덴과 헝가리에 연달아 패하며 1무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멕시코와 1대1로 비기며 사상 첫 월드컵 승점을 얻어내며 월본 국민들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발전의 시기 (1960~80년대)

1962년 칠레 월드컵에는 아시아 예선에서 치루어 탈락하여 참가하지 못했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는 북한의 출전으로 인해 기권하며 1960년대의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대신 아시안컵에서 선전을 이어나가며 축구 발전을 계속해 나갔다. 1960년 대한민국 아시안컵에서도 2승1패로 준우승에 머물렀으나, 1964년 월본에서 개최된 아시안컵에서는 3전전승으로 사상 첫 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1968 이란 아시안컵에서도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축구 강호의 이미지를 굳히게 된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예선에서는 6개팀으로 예선이 치뤄졌다. 당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같이 예선을 치렀고, 아시아 축구 연맹 소속이던 월본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를 꺾고 본선에 갔지만 첫 경기에서 우루과이에 0:2로 패했다. 그나마 스웨덴과 이탈리아를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며 나름대로 선전했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예선 역시 아시아와 오세아니아가 같이 예선을 치렀고, 결승은 월본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홈 앤드 어웨이로 결정되었다. 두 팀은 두 경기 모두 비기고, 홍콩에서 중립경기로 본선 진출 팀을 결정하기로 하였는데 호주가 2대0으로 승리하여 월드컵 진출에 실패하였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은 이란에 밀려 예선 탈락하며 진출하지 못했다. 이렇게 1970년대는 월본이 차근차근 세계 무대에서 경험을 쌓아가며 실력을 기르고 있던 시기였다. 1972년 태국 아시안컵에서는 월드컵에 집중한다는 명목으로 대학, 실업 선수들을 출전시켰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후 1976년 이란 아시안컵에서는 정식 선수들을 출전시켰으나 결승전에서 패배하여 준우승의 눈물을 삼키고 말았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를 합쳐서 두 팀이 배정되어, 최종 예선 1, 2위에게 본선 진출권이 주어졌다. 예선 결과 월본이 최종 예선 1위를 차지하여 본선에 직행하였다. 그러나 조가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잉글랜드라는 죽음의 조였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유로 1976 우승, 1980 모스크바 올림픽 금메달을 차지한 동구권 최강자였고, 프랑스는 전설의 플라티니를 주축으로 이 대회 및 다음 대회 연속 4강, 유로 1984 우승컵을 차지한 우승 후보였다. 잉글랜드는 이들 중 커리어는 가장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 조별리그에서 3전 전승으로 올라갈 만큼 저력이 있는 팀이었다. 그래도 올림픽 우승팀 체코슬로바키아와 비기는 선전을 펼쳤으나 나머지 둘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한국에 패배하며 예선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1980년대 아시안컵에서는 두번의 우승과 1번의 3위로 아시아 정상에 올랐다. 게다가 1988년 월본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 우승을 하면서 기쁨은 두배였다.


  1. 현재의 조번 FC의 뿌리가 되는 구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