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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1" width="22%" style=" color: #ffc224; background: #133969;" |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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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align=left style=" | 외부 대국전략처 처장<br>주영공사<br>주독공사<br>외부 공보국장<br>상공부 대국협상처장<br>산동총독<br>대만총독
| colspan="4" align=left style=" | 외부 대국전략처장<br>주영공사<br>주독공사<br>외부 공보국장<br>상공부 대국협상처장<br>산동총독<br>대만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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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3일 (수) 20:57 기준 최신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대만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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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대만총독
윤철홍 | 尹喆弘
출생 1878년 4월 10일
경기도 양근군
사망 1938년 6월 12일 (향년 60세)
중화민국 상해
재임 9대 대만총독
1933년 2월 13일 ~ 1938년 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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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국의 정치인, 외교관. 제9대 대만총독을 역임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대만섬을 침공해온 일본군을 상대로 분전하였으나 결국 하문으로 후퇴했다. 이후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귀국하던 도중 병을 얻어 상해에서 훙하였다. 전후 공로를 인정하여 이화대수장과 정화기념장을 추서받았다.

생애

1878년 경기도 양근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상렬은 양근군수를 지내는등 지체높은 집안이었다. 이후 성장하면서 서당등에서 공부하다 1892년 여주에 위치한 동부경기고학교(현 여주고등학교)에 합격하여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으며 성적도 꽤나 우수하여 1895년에는 국립한성대학에 입학하여 행정학등을 전공했다.

당시 여느 한성대학 졸업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는 관료가 되었는데 외부에 관심이 많아 외부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901년에는 사절단과 함께 북경으로 건너가 신축조약 조문을 검토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또한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였는데 당시 그는 입헌당에 가입하여 어윤중 총리의 서기보를 맡았다. 1904년에는 외부 대국전략처 부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08년 처장으로 승진하였다. 무척 젊은 나이에 자리를 얻게 되었는데 능력이 있기도 했거니와 당시 입헌당의 핵심인 김홍집의 삼화당파 인사들과 잘 어울렸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듬해 민정당이 집권하자 그는 처장직을 사임하고 직접 발로 뛰는 외교관 역할을 맡기로 결심한다.

1910~12년에는 주영공사를, 1912~13년에는 주독공사를 맡았으며 퇴임 이후에는 유럽에서 외유를 하다 1차 대전 발발후 귀국한다. 민정당 정권 하에서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협상국에 참여하여 산동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공격하는 안에 대해 적극 지지했다. 비록 직접 공략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한국은 청도 독일 조차지를 포위하여 산동반도를 한국이 완전히 지배할 외교적 발판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1920년에는 산동총독으로 전보되었으며 각 열강들의 이권 조정과 대중국 전후처리라는 중책을 맡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