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석 (동방의 등불)

Dentrix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3월 23일 (수) 03:17 판

대한제국 국무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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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독립유공 작위귀족
대한제국 제6-12대 국무총리대신
이범석
李範奭 | Lee Beom-seok
출생 1900년 12월 11일
한성부 북서 관광방 중학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사망 1983년 5월 11일 (향년 8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이범석내각국무총리묘소
재임기간 제6대 국무총리대신
1960년 5월 17일 ~ 1960년 8월 19일
제7대 국무총리대신
1960년 8월 19일 ~ 1963년 12월 7일
제8대 국무총리대신
1963년 12월 7일 ~ 1967년 9월 5일
제9대 국무총리대신
1967년 9월 5일 ~ 1971년 8월 27일
제10대 국무총리대신
1971년 8월 27일 ~ 1975년 8월 13일
제11대 국무총리대신
1975년 8월 13일 ~ 1977년 2월 22일
제12대 국무총리대신
1977년 2월 22일 ~ 1980년 5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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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아버지 이문하
어머니 연안 이씨(생모)·김해 김씨(계모)
배우자 김마리아
자녀 아들 이부흥, 이인종
학력 항저우체육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종교 유교(성리학) → 대종교 → 개신교(침례회)
의원 선수 11
의원 대수 1, 2, 3, 4, 5, 6, 7, 8, 9, 10, 11
지역구 종로구
소속 정당 한국독립당
철기(鐵驥)

개요

이범석대한제국의 제6-12대 국무총리대신이자 독립유공 작위귀족이다.

생애

일제강점기에는 청산리 전투 참전, 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항일 무장투쟁에 활약했으며, 광복 후에는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군무대신을 맡았다. 그러나 1960년 무종 흥영제의 사주 아래 청년장교들과 함께 경자정변을 일으켜 이승만을 축출하고 자신이 총리가 되었다.

경자혁명 당시 "무능한 정치인들의 권력 다툼에게 대한제국을 맡길 수 없다"며 청년 장교들과 함께 흥영제에게 대권을 반환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경자혁명이 그와 동시에 흥영제가 중앙청에 입성하여 친정을 선포하게 되며 약 20여년간의 황제 친정시대가 개막하였다.

이범석 총리는 황제 친정시대 하에서 한중전쟁, 한일기본조약, 베트남 전쟁, 핵무기 개발 등의 다양한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1960년대 이후 경제 실무진들과 함께 수립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한제국의 경제를 설계 및 발전시켰다. 하지만 언론탄압과 사상계 탄압 사건, 부마항쟁 등 반황실·반정부적인 목소리를 탄압하여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전남대 시위에서 경찰의 발포로 대학생이 사망하자 광주시민들은 분노하여 대규모 시위를 일으킨다. 해당 시위에 대해 이범석 총리는 초기에는 전남 경찰국장을 경질하여 끝내려고 했으나 시민들은 내각의 사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국 이범석 총리는 강에는 강으로 맞서야 한다는 말을 남기며 강경 진압을 내세웠으나 오히려 역효과가 나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점차 반황실·반정부 시위로 확대되었는데 이를 경신혁명이라 한다. 결국 5월 27일 흥영제는 친정을 내려놓고 다시 권력을 민정에 이양한다는 선언을 하며 생전퇴위를 발표하였고, 흥영제 퇴위 발표 이후 이범석 역시 하야를 선언하며 동시에 의회를 해산, 약 20여년간의 길었던 친정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하야 이후 서울 자택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83년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선거 이력

소속 정당

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