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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4일 (토) 19:27 판
역대 천녕 황왕 歷代 天寧 皇王 864-12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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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대 탐라군왕 초대 진해정윤 익평신성대왕 翼平神聖大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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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 대사 재직 당시 표준 영정 | |||
시호 | 익평왕(翼平王)[1] | ||
별호 | 신성황왕(神聖皇王), 무종대왕(武宗大王)[2] | ||
연호 | 청천(淸天, 848?~857?)[3] | ||
생몰연도 | 787?~857 (71세?)[4] | ||
성씨 | 장(張) | ||
휘 | 궁복(弓福), 궁파(弓巴)[5], 보고(保皐)[6] | ||
출생지 | 신라(新羅) 무진주(武珍州) 완도(莞島) | ||
사망지 | 천녕(天寧) 복성주(福成州) 대야현(大野縣) | ||
역임 직책 |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 ?-828)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 828-851)[7] 감의군사(感義軍使, 839-851)[8] 진해장군(鎭海將軍, 839-851)[9] | ||
탐라군왕 耽羅君王(848-857) | |||
진해정윤 鎭海正胤(855-857) | |||
“ 天下乙 手厓 捄爲理羅(천하을수애구위리라)
천하를 손에 담기 하리라.[1]”
익평왕(翼平王, 787? ~ 857)은 탐라국(耽羅國)의 군왕(君王)이자 천녕(天寧)의 실질적 건국자이다. 본래는 신라(新羅) 사람이었으나 당나라로 건너가 무관으로 승진하였고, 828년에는 다시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뒤 동중국해(東中國海)의 해적 격퇴 및 해상 무역을 주도했으나, 신라 왕실과의 혼인 문제로 암살의 위협을 겪은 뒤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탐라 및 일본(日本)의 부속 도서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857년, 구주(九州) 정벌을 위해 오노 성 공략전(大野城攻略戰)을 이끌었으나, 공성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달고왕(達暠王)과 측근들이 정벌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864년에야 천녕 건립에 결실을 맺었다. 이후 '익평'(翼平)이라는 시호로 추숭됨으로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각주
- ↑ 이두(吏讀) 표기로서 한문을 한국어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중간 삽입한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