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평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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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였던 [[정년]]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서 군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일종의 신라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당은 번장(蕃將)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관으로 기용하기도 하는 등 이민족 포용에 대해 개방적인 국가였다. 익평왕은 입대한 뒤 말을 타고 창 쓰는 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으로 출세하였다. 무령군은 산동 반도에 웅거한 [[고구려]](高句麗)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李師道)를 정벌하려고 만든 부대였는데, 익평왕은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淄靑平盧藩鎭) 진압에 참전했다고 한다.
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였던 [[정년]]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서 군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일종의 신라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당은 번장(蕃將)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관으로 기용하기도 하는 등 이민족 포용에 대해 개방적인 국가였다. 익평왕은 입대한 뒤 말을 타고 창 쓰는 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으로 출세하였다. 무령군은 산동 반도에 웅거한 [[고구려]](高句麗)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李師道)를 정벌하려고 만든 부대였는데, 익평왕은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淄靑平盧藩鎭) 진압에 참전했다고 한다.


허나 모종의 일로 당나라 무관직을 포기하고 [[통일신라|신라]]로 귀국하게 되는데, 귀국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로 분분하다. 먼저, 익평왕이 당에서 귀국해 [[흥덕왕]](興德王)을 알현하여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익평왕이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의미<ref>'바다를 깨끗히 청소한다.'</ref>를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나만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년]]은 당군에 남았는데 훗날 정년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하고 나서 익평왕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익평왕이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년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사정은 알 수 없다. 일부 재야 학계에서는 [[이사도]]의 번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를 보고 실망했다.'고 이사도가 말해자 충격을 받아 무관직을 포기했다는 구전이 그 이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ef group="참고">이시경(李時硬), 익평왕의 귀국에 관한 논란, "정년과 이사도" (1999)</ref>
허나 모종의 일로 당나라 무관직을 포기하고 [[통일신라|신라]]로 귀국하게 되는데, 귀국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로 분분하다. 먼저, 익평왕이 당에서 귀국해 [[흥덕왕]](興德王)을 알현하여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익평왕이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의미<ref>'바다를 깨끗히 청소한다.'</ref>를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나만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년]]은 당군에 남았는데 훗날 정년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하고 나서 익평왕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익평왕이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년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사정은 알 수 없다. 일부 재야 학계에서는 [[이사도]]의 번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를 보고 실망했다.'고 이사도가 말해자 충격을 받아 무관직을 포기했다는 구전이 그 이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ef group="참고">이시경(李時硬), 익평왕의 귀국에 관한 논란, "정년과 이사도" (1999)</ref>
 
이 시기 익평왕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드나, [[엔닌]]의 기록을 볼 때 [[신라방]](新羅坊)의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해상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을 시도했고, 중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해안 지역은 앞서 나온 [[이사도]]와 같은 번진들의 발호로 [[당나라]]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덕분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대로 단순히 이들이 동족인 신라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도의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장보고로써는 이들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면 장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상인으로써의 실제적인 계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ref group="참고">김율(金栗), 익평왕의 해상 상업에 대한 연구 (1975)</ref>
 
=== 청해진 설치 및 달벌 전투 ===
{{인용문|'''夏四月 淸海大使弓福 姓張氏[一名保臯] 入唐徐州 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鎭淸海[淸海 今之莞島]'''<br/><small>(하사월 청해대사궁복 성장씨[일명보고] 입당서주 위군중소장 후귀국알왕 이졸만인진청해[청해 금지완도])</small><ref>의역하면,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ref>|<small>《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small>}}
 
신라로 귀국한 후, 그는 [[흥덕왕]](興德王)에게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해적들을 막겠다." 하니, 흥덕왕은 즉석에서 허락하고 '''대사'''(大使)라는 특별한 직함까지 내려주었다. 이에 익평왕은 [[한반도]](韓半島)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莞島)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건설, 이를 기점으로 상권을 장악했다. 한편, 익평왕이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김헌창의 난]](金憲昌之亂)이 있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권과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운 신라 정계 상황 속에서 해로 안전 확보를 위해 익평왕은 원래 보고한 목적인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익평왕이 청해진에서 1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했다는 기록이 현실적으로 [[흥덕왕]]이 제공하기 어려웠기에 기존 사병 집단 + 정규군이 혼합한 형태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일단 현재 학계의 입장은 익평왕이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여 이 병력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 인정하는데,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ref group="참고">이시경(李時硬), "청해진 흥망사" (1984)</ref>
 
여튼 익평왕의 해상 패권 장악은 국제 사회에 다양하게 작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이 [[천태종]](天台宗)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익평왕에게 보호를 부탁했으며, 당시 [[산둥 반도]]에 익평왕이 건립했다고 하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적산법화원은 당시 무역상, [[장영]](張詠) 등의 [[재당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후 적산법화원은 당 [[무종]](武宗)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 익평왕이 안타까워 하는 《[[대야서기]]》에 구절이 남아있다. 이렇게 엔닌은 익평왕의 도움을 받은 내용을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익평왕 일대기 및 당시 고대 한중일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익평왕은 또한 [[교관선]](交關船)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수익을 올렸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익평왕이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赤山浦)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兵馬使)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이란 인물이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동쪽의 일본과도 [[회역사]](廻易使)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익평왕이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구주]](九州)의 [[다자이후]](大宰府)에서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ref>[[다자이후 정청]]의 주장을 전해들은 익평왕은 이후 [[오노 성 공략전]]에서 성주를 책망하고 구주를 정벌하려는 근거를 드는 것으로 활용했다고 한다.</ref>


== 각주 ==
== 각주 ==

2019년 5월 4일 (토) 21:52 판

역대 천녕 황왕
歷代 天寧 皇王
864-1281
정통 황왕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7대
달고왕
864~875
효문왕
875~899
경강왕
899~934
헌문왕
934~938
문혜왕
938~957
차강왕
957~976
신강왕
976~989
8대 9대 10대 11대 12대 13대 14대
경의왕
989~1031
차문왕
1031~1033
천원왕
1033~1039
문성왕
1039~1065
위수왕
1065~1087
신문왕
1087~1100
의공왕
1100~1105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21대
선륭왕
1105~1149
헌공왕
1149~1168
열운왕
1168~1185
성현왕
1185~1205
선혜왕
1205~1211
공상왕
1211~1225
정효왕
1225~1247
22대 23대 24대 25대
충희왕
1247~1264
필간왕
1264~1272
차간왕
1272~1278
신애왕
1278~1281
추존 황왕
익평왕, 승열왕, 대안왕, 구후왕
비정통 황왕
영원군, 칠양군, 홍인왕
역대 후녕 황왕, 역대 신녕 황왕, 역대 천녕 신황, 일우신주 이질금, 현대 천녕 황왕
42대 탐라군왕
초대 진해정윤
익평신성대왕

翼平神聖大王

청해진 대사 재직 당시 표준 영정
시호 익평왕(翼平王)[1]
별호 신성황왕(神聖皇王), 무종대왕(武宗大王)[2]
연호 청천(淸天, 848?~857?)[3]
생몰연도 787?~857 (71세?)[4]
성씨 장(張)
궁복(弓福), 궁파(弓巴)[5], 보고(保皐)[6]
출생지 신라(新羅) 무진주(武珍州) 완도(莞島)
사망지 천녕(天寧) 복성주(福成州) 대야현(大野縣)
역임 직책 무령군중소장(武寧軍中小將, ?-828)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 828-851)[7]
감의군사(感義軍使, 839-851)[8]
진해장군(鎭海將軍, 839-851)[9]
탐라군왕
耽羅君王(848-857)
진해정윤
鎭海正胤(855-857)
  1. 865년, 달고왕이 추숭함.
  2. 천녕사(天寧史) 익평 총서 기준
  3. 연호를 사용한 정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분분함.
  4. 정확한 출생과 계통은 학계에서 분분함
  5. 삼국유사》 기이편 신무대왕 구절에서 유래됨.
  6.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장보고(張保皐)로 표기함.
  7. 흥덕왕이 청해진 설치 승인 및 대사 직책을 제수함.
  8. 달벌 전투에서의 공로로 신무왕이 제수함.
  9. 선왕 즉위에 대한 공로로 문성왕이 제수함.

天下乙 手厓 捄爲理羅
(천하을수애구위리라)
천하를 손에 담기 하리라.[1]

 
대야서기(大野書記) 청천전(淸天傳) 구절 中

익평왕(翼平王, 787? ~ 857)은 탐라국(耽羅國)의 군왕(君王)이자 천녕(天寧)의 실질적 건국자이다. 본래는 신라(新羅) 사람이었으나 당나라로 건너가 무관으로 승진하였고, 828년에는 다시 신라로 귀국하여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뒤 동중국해(東中國海)의 해적 격퇴 및 해상 무역을 주도했다. 이후 달벌 전투(達伐大戰)에서 활약하여 민애왕(閔哀王)을 몰아낸 뒤, 신무왕(神武王)을 왕위에 앉히는데 성공했다. 허나 신라 왕실과의 혼인 문제로 암살의 위협을 겪은 뒤 휘하의 세력을 이끌고 탐라로 도망하여 독립 세력을 건설했다.[2] 그 뒤 일본(日本)의 부속 도서들을 흡수하여 세력 확장을 꾀하였다.

857년, 구주(九州) 정벌을 위해 오노 성 공략전(大野城攻略戰)을 이끌었으나, 공성 과정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달고왕(達暠王)과 측근들이 정벌 전쟁을 수행함으로서 864년에야 천녕 건립에 결실을 맺었다. 이후 '익평'(翼平)이라는 시호로 추숭됨으로서 큰 존경을 받게 되었다.

일대기

古人有言 見義不爲 無勇. 吾雖庸劣 唯命是從.
(고인유언 견의부위 무용. 오수용렬 유명시종.)[3]

 
신무왕의 부탁을 받은 익평왕의 답변으로 알려진 구절.

해양 상업 제국의 무역왕
The Trade King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

 
에드윈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하버드-옌징 연구소 소장[4]

평민 출신에서 해상 패권을 장악하고 대국을 건설한 인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후대에나 현대에나 익평왕의 일대기는 크게 추앙받고 있다. 실질적으로 천녕을 건설한 인물은 달고왕[5]이나, 직접 구주 정벌(九州征伐)을 계획하고 몸소 고령의 나이를 이끌고 실천하던 중 전사하였기에 영웅적인 모습으로 남을 수 있게 되었다.

유년 시절

삼국사기(三國史記)》나 《대야서기(大野書記)》에서는 그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익평왕의 출신 가문은 신라에서 5두품 이하로 한미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출생 연도 역시 학계에서 분분하였기에 78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대체로 787년을 그의 출생 연도로 확정짓고 있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였으며 활과 창을 잘 다루는 무인 기질을 타고 났다고 하는데, 그의 이름인 장보고(張保皐)도 활을 잘 쏘는 것과 관련이 있기에 신빙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참고 1]

위에서 언급한듯, 익평왕의 출신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한데, 당나라 무관 재직 당시에 대한 기록을 보아 당시 신라(新羅) 서남해안 지역 섬에 목장을 운영하던 귀족들의 생활과 연관시켜 목동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그 외에 같이 당나라로 건너가 무관직을 수행했던 정년(鄭年)이 50리를 단번에 헤엄칠 수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바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 있다.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본인이 청해진을 설치한 완도 출신일 가능성도 높은 게, 완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곳에 청해진을 설치했다는 것이 개연성이 높은데다 당나라(唐國)에서 기아에 허덕이던 정년이 '고향에서 죽는 게 낫다'고 하면서 청해진의 익평왕을 찾았던 사연, 그리고 이후 문성왕(文聖王)이 장보고의 딸[6]을 왕비로 맞아들이려 할 때 신라의 대신(大臣)들이 익평왕이 해도(海島), 즉 육지가 아닌 섬 사람임을 지적했던 점을 미루어봤을 때 완도 출신이라고 확정되고 있다.[참고 2]

당나라 무관 및 신라 귀국

일찍 동료이자 의형제였던 정년과 함께 당의 서주(徐州)로 건너가서 군에 들어갔다고 한다. 당시 당나라신라방(新羅坊)이라는 일종의 신라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당은 번장(蕃將)이라 해서 이민족 출신을 무관으로 기용하기도 하는 등 이민족 포용에 대해 개방적인 국가였다. 익평왕은 입대한 뒤 말을 타고 창 쓰는 데에 탁월한 실력을 보이고 곧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少將)으로 출세하였다. 무령군은 산동 반도에 웅거한 고구려(高句麗) 유민 출신 절도사 이사도(李師道)를 정벌하려고 만든 부대였는데, 익평왕은 무령군 소장 신분으로 평로치청번진(淄靑平盧藩鎭) 진압에 참전했다고 한다.

허나 모종의 일로 당나라 무관직을 포기하고 신라로 귀국하게 되는데, 귀국에 대한 이유에 대해서도 여러 얘기로 분분하다. 먼저, 익평왕이 당에서 귀국해 흥덕왕(興德王)을 알현하여 '신라인이 당에서 해적들에게 잡혀 노비로 매매되고 있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익평왕이 설치한 청해진(淸海鎭)의 의미[7]를 감안하면, '같은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데 차마 나만 혼자 호의호식할 수 없어서'가 이유였을 것이라고 한다. 한편, 함께 당에 갔던 친구 정년은 당군에 남았는데 훗날 정년이 당의 군축 조치로 실직해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하고 나서 익평왕에게 의지하기를 망설였다는 기록을 보면, 익평왕이 무관을 그만둔 일이 정년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지만 정확히 사정은 알 수 없다. 일부 재야 학계에서는 이사도의 번진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상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당군에서 일하는 장보고, 너를 보고 실망했다.'고 이사도가 말해자 충격을 받아 무관직을 포기했다는 구전이 그 이유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참고 3]

이 시기 익평왕에 대한 기록이 부족해 자세한 행적은 알기 힘드나, 엔닌의 기록을 볼 때 신라방(新羅坊)의 신라인 사회를 이용해 해상 상업에 뛰어들어 국제 무역을 시도했고, 중국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해안 지역은 앞서 나온 이사도와 같은 번진들의 발호로 당나라 조정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덕분에 신라인들까지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는 해적이 들끓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대로 단순히 이들이 동족인 신라인을 노비로 팔아넘기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도의적인 이유가 아니어도 장보고로써는 이들 해적 때문에 바다를 통해 오가던 해상 교역까지 위협을 받게 되면 장사에도 차질이 생긴다는 상인으로써의 실제적인 계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참고 4]

청해진 설치 및 달벌 전투

夏四月 淸海大使弓福 姓張氏[一名保臯] 入唐徐州 爲軍中小將 後歸國謁王 以卒萬人鎭淸海[淸海 今之莞島]
(하사월 청해대사궁복 성장씨[일명보고] 입당서주 위군중소장 후귀국알왕 이졸만인진청해[청해 금지완도])[8]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신라로 귀국한 후, 그는 흥덕왕(興德王)에게 "중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자꾸 잡아가 노비로 삼으니 저에게 군사 1만을 주시면 제가 해적들을 막겠다." 하니, 흥덕왕은 즉석에서 허락하고 대사(大使)라는 특별한 직함까지 내려주었다. 이에 익평왕은 한반도(韓半島) 서남부 앞바다, 지금의 완도(莞島)의 장좌리, 죽청리, 대야리, 그리고 부속섬 장도에 청해진을 건설, 이를 기점으로 상권을 장악했다. 한편, 익평왕이 귀국하기 6년 전인 822년에 신라에서는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던 김헌창의 난(金憲昌之亂)이 있었는데, 비록 이 시기의 신라는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 때와 달리 전국적인 반란을 제압할 만큼의 능력은 있었지만 왕권과 지방 통제력의 약화로 타격을 입은 상황이었다.

혼란스러운 신라 정계 상황 속에서 해로 안전 확보를 위해 익평왕은 원래 보고한 목적인 해적 소탕에도 열을 올려 삼국사기에서는 장보고의 활약으로 신라인 노예 매매가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고, 청해진은 사실상 당대 최고의 해상 무력 집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익평왕이 청해진에서 1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확보했다는 기록이 현실적으로 흥덕왕이 제공하기 어려웠기에 기존 사병 집단 + 정규군이 혼합한 형태로 보는 경우도 있으나 근거는 없다. 일단 현재 학계의 입장은 익평왕이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교역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여 이 병력이 점차 사병집단화 되었다는 점은 통설로 인정하는데, 처음부터 사병 조직이었는지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다.[참고 5]

여튼 익평왕의 해상 패권 장악은 국제 사회에 다양하게 작용되었다. 대표적으로 당시 일본 최고의 승려로 꼽히던 엔닌(圓仁)이 천태종(天台宗)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무사히 갈 수 있도록 익평왕에게 보호를 부탁했으며, 당시 산둥 반도에 익평왕이 건립했다고 하는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 적산법화원은 당시 무역상, 장영(張詠) 등의 재당 신라인들이 운영했고 정기적으로 강경법회를 열어 재당 신라인의 결집을 담당했다고 한다. 이후 적산법화원은 당 무종(武宗) 시대의 대대적인 불교 탄압 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 익평왕이 안타까워 하는 《대야서기》에 구절이 남아있다. 이렇게 엔닌은 익평왕의 도움을 받은 내용을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익평왕 일대기 및 당시 고대 한중일 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익평왕은 또한 교관선(交關船)을 당나라에 수시로 파견했고, 당나라 동해안의 신라방 사회를 원격 통제하고 이를 활용해 막대한 무역 수익을 올렸다. 엔닌의 일기에 의하면 839년 6월 27일에 익평왕이 보낸 두 척의 교관선이 적산포(赤山浦)에 도착했는데, '청해진 병마사'(兵馬使)라는 직함을 가진 최훈십이랑(崔暈十二郞)이란 인물이 대당매물사(大唐賣物使)로 수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동쪽의 일본과도 회역사(廻易使)라는 무역 선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했는데, 회역사는 어디까지나 익평왕이 사적으로 보낸 무역 선단에 불과했지만 그 규모가 매우 커서 공식 사신단을 방불케했기 때문에 당시 일본의 공식 대외 교역 창구 역할을 하던 구주(九州)의 다자이후(大宰府)에서는 회역사를 받지 말고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

각주

  1. 이두(吏讀) 표기로서 한문을 한국어 어순대로 재조정한 후 조사나 어미와 같은 형식 형태소를 중간중간 삽입한 한국어의 한자 표기를 이른다.
  2. 명목상으로는 제후왕(諸侯王)으로 입조하였다.
  3. 의역하면 "옛 사람이 말하길 의로움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난 비록 평범하고 미천하지만 당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4. 그는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일기에서 등장하는 재당 신라인(在唐新羅人)들의 역할에 주목했고, 자신의 논문에서 엔닌의 구법행을 도왔던 재당 신라인의 수장, 익평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흔히 익평왕을 일컫는 수식어인 '해상왕'(海上王)을 의역한 것으로 보인다.
  5. 달고왕 역시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아 정벌 전쟁을 완수하고 28세라는 이른 나이에 요절한 청년 군주로서 그의 인기도 대단히 높다.
  6.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장보고는 무남독녀였다고 한다.
  7. '바다를 깨끗히 청소한다.'
  8. 의역하면, "여름 4월, 청해대사(淸海大使) 궁복(弓福)은 성이 장씨인데[일명 보고(保臯)라고도 한다.]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임금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청해는 지금의 완도(莞島)이다.]을 지키게 되었다."
  9. 다자이후 정청의 주장을 전해들은 익평왕은 이후 오노 성 공략전에서 성주를 책망하고 구주를 정벌하려는 근거를 드는 것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참고 문헌

  1. 김창기(金昌技), 익평왕과 고대교역연구, 해상발전에 취하여 (1935)
  2. 이택훤(李宅暄), 翼平王의 일대기에 대한 이해 (1957)
  3. 이시경(李時硬), 익평왕의 귀국에 관한 논란, "정년과 이사도" (1999)
  4. 김율(金栗), 익평왕의 해상 상업에 대한 연구 (1975)
  5. 이시경(李時硬), "청해진 흥망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