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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또는 WWI)는 1913년 7월 3일부터 1917년 12월 25일까지 일어난 유럽을 중심으로 한 전쟁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세계 대전(World War) 또는 대전(Great War)이라 불렸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약 1천만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사상자가 가장 많았던 전쟁 중 하나이며, 수많은 정치적 변화를 일으켰다.
이 전쟁은 세계를 두 세력으로 나눈 강대국들의 전쟁이다. 한쪽은 브리튼 제국과 도이치 제국의 브도 동맹이 중심이 되는 동맹국이며, 다른 한쪽은 프랑 식민 제국과 러시아 제국,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3국 협상이 중심이 되는 협상국이다.
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은 신제국주의때문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제2차 발칸전쟁(마케도니아 전쟁)이다. 1913년 7월 1일, 러시아 제국이 제2차 발칸전쟁으로 발칸 반도에 영향력을 펼치는 것에 못마땅했던 브도 동맹이 러시아 제국에게 발칸 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보낸 최후통첩을 러시아 제국이 무시하면서 벌어졌다.
결국 1913년 7월 2일, 브도 동맹이 러시아 제국에게 선전포고 하였고, 그 다음날에는 다른 3국 협상국에게도 선전포고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됬다. 러시아 제국이 무장을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거라 예상한 도이치 제국은 브리튼에게 동부를 맡기고, 대부분의 병력으로 룩셈부르크와 벨기엔을 공격하여 점령한뒤, 파리까지 점령한다. 그러나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 제국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이 공세를 개시해 공세를 중단한다. 이후 전선은 고착화 되었으며,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 내부의 운가르 인들이 봉기를 일으킨다. 1915년 말, 미국이 참전한다.
1916년, 러시아 제국은 혁명으로 인해 무너졌으며, 러시아 임시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다 결국 페트로그라드 조약을 체결한다. 이후 1916년 말, 춘계 공세로 국토 대다수를 빼앗긴 프랑 제3공화국은 결국 무너지고, 1917년에는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과 세르비아, 오스만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전쟁은 끝이 난다.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과 러시아 제국,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은 해체되고 만다. 패전국들의 아프리카 식민지들은 모두 동맹국이 가져갔으며, 운가르을 제외한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선 여러 국가들이 독립한다. 또한 도이치 제국 본토도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지역 몇몇을 합병해 확장하였다. 그러나 패전국들은 영토의 상실과 배상금으로 인해 분노가 쌓였고, 이것이 폭발하게 된 것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배경
정치 및 군사적 동맹
19세기 유럽 강대국들은 유럽 전역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으며 그 결과 1900년에는 복잡한 정치, 군사적 동맹 네트워크를 형성하게 되었다. 도이치 제국은 한때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과 러시아 제국과의 삼제 동맹을 체결했으나, 러시아 제국의 발칸 정책에 불만을 품은 도이치 제국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은 삼제 동맹을 탈퇴하여 도외 동맹을 결성한다. 그러나 이들의 의견차이로 인해 이 동맹은 무산된다.
이런 도이치 제국을 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하 브리튼)은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도이치 제국의 킬 군항에서 상호불가침 조 및 반 러시아 동맹,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한다(킬 조약. 이에 대해 프랑은 브리튼과 도이치 제국에 맞서 프러 협상을 체결함과 동시에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과 프-외 협상을 체결한다. 곧 러시아 제국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과의 러외 협상을 체결한다. 그리고 이를 본 브도 동맹은 이탈리아 왕국과의 동맹을 체결하여 유럽은 3국 협상과 3국 동맹으로 나뉘어진다.
서막
발칸 반도의 분쟁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한 이후 1908년부터 1909년까지 보스니아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이에 세르비아 왕국과 러시아 제국은 분노한다. 그러자 프랑는 과거 체결한 프러 동맹과 프외 동맹을 명분으로 중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3국 협상이 발칸 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기위해 도이치 제국과 브리튼이 중제에 개입하게 된다.
그러던 도중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중제국들은 제1차 발칸 동맹국들에게 지원을 해주면서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결국 대오스만 전쟁은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은 제1차 발칸 동맹이 승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그리스 사이에서 마케도니아를 두고 갈등이 발생했고, 이에 여러 나라들은 중제에 들어갔다. 그러나 중제국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심화되었고,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이 발발한다. 이에 3국 협상들은 세르비아가 주축이 된 제2차 발칸 동맹에게 지원을 개시했고, 브도 동맹은 불가리아에게 지원을 개시한다.
러시아의 잔류
1913년 6월 30일, 중제국들은 협의하에 발칸 반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되었다. 7월 1일에 프랑,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 도이치 제국, 브리튼이 철수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철수하면서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은 러시아 제국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요구를 무시했고, 이에 도이치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게 최후통첩을 보낸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이를 또 거절하였고, 결국 1913년 7월 2일, 브도 동맹은 러시아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의 진행 과정
개전
슐리펜 계획
1913년 7월 11일, 도이치 제국은 슐리펜 계획을 실시하기 위해 벨기엔에게 군사통행권을 요구한다. 그러나 벨기엔은 이를 거절했고, 프랑의 동일한 요구 또한 거절했다. 이에 도이치 제국은 7월 19일, 벨기엔과 근처의 룩셈부르크를 침공한다. 8월 1일, 벨기엔의 국토 전체가 도이치 제국에게 함략된다. 이후 도이치 제국은 파죽지세로 진격해 8월 17일, 러시아 제국이 동부를 공격하고 있는 사이 프랑의 수도, 파리를 함략시킨다. 이에 프랑은 8월 21일, 마른 강에서 공세를 가하지만 패배한다. 슐리펜 계획을 성공시킨 도이치 제국은 브레타뉴-루아르 공세를 개시한다. 이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 제국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이 제국 동부를 유린하자, 군대의 3할을 동부 전선으로 재배치하고, 9월 11일, 브레타뉴를 점령하면서 공세를 중단한다.(서부 전선의 후회)
전쟁 초기 동부 전선
1913년 8월 15일, 러시아 제국의 동프로이센 공세가 개시된다. 러시아 제국의 군대는 동부의 브리튼의 군대를 격파하고 동프로이센 지역을 점령한다. 이후 8월 17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 또한 바이에른 공세를 개시해 바이에른과 작센을 점령한다.
그러자 도이치 제국은 서부 전선의 군대의 3할과 징집한 신병으로 이들에게서 맞섰고, 결국 러시아 제국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공세는 종료된다. 이후 1913년 12월 25일, 재정비를 완료한 도이치 제국과 브리튼은 각각 작센 공세와 바르샤바 공세를 개시한다(크리스마스 공세). 공세는 3개월 동안 지속되어 1914년 2월, 종료된다. 크리스마스 공세로 인해 브도 동맹군은 빼앗긴 지역을 모두 되찾았고,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보헤미아, 티롤, 찰츠부르크를, 러시아 제국의 폴란드, 카우나스를 점령한다.
마케도니아 공세
1914년 1월 3일, 알바니아 공국이 동맹국에 가입한다. 그리고 다음날, 알바니아는 총동원령을 내렸고, 이에 1914년 1월 7일, 몬테네그로 왕국이 알바니아를 침략한다. 전쟁 초반, 알바니아 공국은 북부 지방을 몬테네그로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에게 빼앗겼지만, 1월 11일, 세르비아의 군대 일부가 알바니아로 향하자, 불가리아 왕국은 마케도니아 공세를 개시한다. 재정비에 성공한 불가리아 왕국군은 파죽지세로 마케도니아 지방을 점령했다. 이에 알바니아도 반격을 개시해 몬테네그로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마케도니아 공세는 2월 5일에 종료되었으며, 알바니아-불가리아군은 마케도니아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운가르 봉기
1914년 3월, 도이치 제국은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운가르족 독립운동을 이끌던 자유 운가르과 접촉한다. 이후 그들은 운가르에서 봉기가 발생한다면 동맹국이 지원을 해 줄것이며, 독립까지 보장한다는 운가르 협약을 도이치-운가르 밀서로 맺는다.
1914년 6월 19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부다페스크에서 자유 운가르 주도의 봉기가 발생한다. 봉기군은 '실질적인 독립'을 요구한다. 그러나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6월 24일부터 운가르의 전역에서 봉기가 발생한다. 이들은 '실질적인 독립'이 목표인 경우도 있었으나, '전쟁세금'과 '강제징집'에 불만을 품고 봉기를 일으킨 자들이 더 많았다. 결국 7월 1일이 되자 슬로바키아 지역을 제외한 모든 운가르 지방에서 봉기가 발생했다. 이후 자유 운가르는 1914년 7월 19일, 운가르 왕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자유 운가르군은 봉기에 가담하지 않았던 슬로바키아 지역을 침공해 합병한다. 운가르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외스터라이히-운가르 군의 운가르족들 중 봉기에 찬성하는 자들은 군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외스터라이히-운가르 군은 순식간에 통제가 무너진다. 결국 외스터라이히-운가르 군은 협상국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아시아 태평양 전구
1914년 4월 5일, 도이치 제국은 시암 왕국과 도이치-시암 조약을 체결한다. 그 내용은 시암이 전쟁에 참가한다면 프랑령 인도차이나의 땅 일부를 준다는 내용이었다. 곧 시암 왕국은 이 도이치-시암 조약에 따라 동원령을 내렸고, 1914년 4월 24일, 프랑에 선전포고한다. 그러자 러시아 제국은 시암 왕국에게 선전포고한다. 도이치 제국의 지원을 받은 시암 왕국은 순식간에 프랑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한다.
1914년 5월 2일, 프랑령 인도차이나가 항복하자, 도이치 제국은 시암 왕국에게 라오스 일부와 캄보디아를 준다. 이후 5월 11일, 도이치 제국은 중국의 하이난 섬을 점령한다. 그러자 5월 14일, 베이양정부는 도이치 제국에게 선전포고한다. 도이치 제국에게 중화민국이 선전포고하자 그 다음날 니혼 제국은 브일 동맹을 명분으로 중화민국에게 선전포고한다. 이에 다음날인 5월 16일에 프랑은 니혼 제국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중화민국에게 선전포고한 니혼은 5월 21일, 만주를 공격한다.
6월 13일, 중화민국은 도이치령 자오저우만을 포격한다. 그리고 다음날, 중화민국은 도이치령 자오저우만을 공격한다. 하지만 전날의 미숙한 포격은 도이치 제국의 요새에는 매우 적은 피해만 주었고, 거의 멀쩡했다. 이런 상황에서 중화민국군은 그들을 향해 무작정 돌격을 감생했고, 1차 돌격은 중화민국군에게 큰 피해만 입히고 실패했다. 일주일뒤 중화민국군은 다시 돌격을 개시했으나 1차 돌격때보다 더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 중화민국군의 두번의 돌격이 실패로 끝나 엄청난 피해가 생기자, 도이치 제국은 이들을 향해 돌격을 개시했다. 전멸상태이던 중화민국군은 도이치 제국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었고, 오직 퇴각밖에 할 수 없었다. 이후 도이치군은 다구강을 따라 진격했다. 7월 11일, 도이치 제국은 산둥 반도의 절반을 차지한다.
도이치 제국이 산둥 반도를 차지할 동안, 니혼 제국군은 러시아 제국의 동청 철도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이용하여 남만주 지역과 연해주를 점령했다.
7월 26일, 도이치 제국과 니혼 제국은 중화민국의 수도인 베이징을 향해 진격했다. 이들은 8월 11일에 진저우, 8월 13일에 웨이팡, 8월 14일에 후루다오, 8월 18일에 지난, 8월 22일에 친황다오, 9월 1일에는 상륙을 통해 텐진을 점령한다. 이후 텐진을 점령한 도이치 제국이 랑팡을 공격할때, 니혼 제국은 탕산을 공격했다. 그러나 탕산에서 니혼군은 10만에 가까운 피해를 입는다. 9월 18일, 니혼군이 탕산에서 큰 피해를 입을 동안 도이치 제국은 베이징을 점령하고 베이양정부의 항복을 받아낸다.(제2차 베이징 조약) 이 조약으로 인해 도이치 제국은 웨이하이웨이와 상하이를, 니혼 제국은 남만주를 획득하고, 북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얻었다.
아프리카 전구
전쟁의 첫 충돌로는 아프리카에서 브리튼, 도이치 제국, 프랑의 식민지 사이의 충돌이었다. 1913년 7얼 7일, 도이치 제국은 프랑의 토고와 가봉을 공격한다. 7월 12일, 프랑은 앵글로-이집트 수단을 공격한다. 전쟁 동안 아프리카에서는 동맹국의 일방적인 공격이 개시되었고, 프랑과 이탈리아 왕국이 항복하면서 아프리카에서의 전쟁은 거의 끝이 난다.
발칸 반도 전선
그리스 전선
1914년 7월 3일, 불가리아 차르국과 알바니아는 그리스 왕국의 트리칼라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한다.(그리스 공세) 공세를 시작한뒤 1개월 뒤, 불가리아는 방어선의 중심인 트리칼라를 점령했고, 2주 뒤에는 라리사 평원 전역을 점령한다. 9월 3일, 알바니아와 불가리아는 트리칼라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이들은 아테네 공세를 개시한다. 9월 17일에는 아그리니오를 점령했고, 10월 17일에는 리바디아를, 그리고 11월 8일에는 코린트까지 점령한다. 코린트를 점령함으로써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테네는 전선이 나눠지게 되었다. 그러자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그리스군은 항복했다. 11월 16일,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점령되자 알바니아군과 일부 불가리아군은 마케도니아 방어선으로 재배치되고, 남은 불가리아군은 아테네를 공격한다. 아테네 전투가 개시된지 1개월이 지나서야 아테네 옆의 도시인 마루시가 함략되었고, 12월 4일에는 찰란드리, 12월 19일에는 페리스테리가 함략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불가리아군은 아테네 시내로 진격하지 못하였고, 결국 폭격을 개시한다. 12월 31일, 폭격이 시작된지 이틀뒤, 불가리아군은 피레아스를 점령했고, 1915년 1월 18일, 드디어 아테네 시내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월 21일, 그리스 왕국은 항복을 선언한다.
마케도니아 전선
1915년 3월 9일, 세르비아 왕국이 몬테네그로 왕국을 합병한다.(몬테네그로 정변) 1915년 5월 4일, 세르비아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은 도나우 공세를 개시한다. 5월 17일, 루마니아 왕국은 콘스탄차를 점령한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은 남하를 계속하여 바르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6월 1일, 세르비아 왕국은 마케도니아 방어선을 돌파하여 프리슈티나를 점령한다. 6월 19일에는 마케도니아 지방의 스코페를 점령함과 동시에 알바니아 북부를 점령한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세르비아 왕국군은 티라나와 테살로니키, 소피아까지 남하한다. 루마니아 왕국 또한 세르비아 왕국과 같이 부르가스까지 남하했다. 1915년 7월 3일, 세르비아 왕국은 티라나와 소피아를 동시에 공격한다. 그러나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는 두 도시에서 치열하게 저항했고, 1개월이 지나도 세르비아 왕국은 두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1915년 8월 15일, 불가리아 차르국은 바르나를 탈환함과 동시에 부르가스의 루마니아군을 포위한다. 이들은 곧 항복했고, 불가리아군은 순식간에 콘스탄차까지 진격한다. 또한 테살로니키의 불가리아군이 세르비아군을 공격해 몰아낸다. 그러자 세르비아 왕국과 루마니아 왕국은 기세를 잃었고, 1915년 8월 28일과 9월 2일에 불가리아군과 알바니아군은 두 도시를 방어하는데 성공하였다.
티라나와 소피아를 방어하면서 세르비아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알바니아 공국과 불가리아 차르국은 1915년 9월 12일, 베오그라드 공세를 개시한다. 공세 시작후 단 15일만에 불가리아군은 마케도니아 지방을 탈환했으며, 10월 2일에는 쉬코드라를, 10월 11일에는 페치와 프리슈티나를 점령한다. 이후 10월 28일, 불가리아군은 파라친까지 진격한다. 1915년 11월 7일, 불가리아의 스파이에 의해 몬테네그로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이에 세르비아 왕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시위대를 공격했고, 이로 인해 반세르비아 시위는 반세르비아 봉기, 몬테네그로 독립전쟁으로 진행된다. 동맹국은 이 봉기를 지원하였고, 1915년 11월 28일, 몬테네그로 전역은 동맹국의 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봉기군에게 넘어간다. 이후 불가리아 차르국은 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북상하여, 2월 2일에 베오그라드까지 진격한다. 세르비아군은 불가리아군에 저항했으나, 2월 22일, 베오그라드는 함략된다. 이후 2월 24일, 세르비아 왕국은 항복을 선언한다.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은 1913년 7월 2일, 슬라브-튀르크 동맹을 맺은 후 다음날인 7월 3일에 협상국에 가입한다. 그러나 7월 10일, 불가리아군의 공격으로 수도인 콘스탄티니예까지 밀렸고, 전선은 오스만 제국이 항복할때까지 그대로였다. 오스만 제국은 여러차례 불가리아군을 공격했으나, 유럽마르마라 지역을 되찾는데는 실패한다.
1915년 3월과 7월, 오스만 제국은 브리튼의 쿠웨이트와 이집트 왕국을 공격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시나이-팔레스타인 전역을 개전한다. 이후 1915년 10월, 브리튼에 의해 카자르 왕조가 오스만 제국에게 선전포고한다. 브리튼은 1915년,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카자르군과 함께 바그다그를 점령한다.
1916년 9월, 오스만 제국은 예루살렘에서 브리튼-이집트 연합군에 의해 패배한다. 이후 이집트 왕국은 네지드 토후국에게 참전을 요구했고, 12월 3일, 네지드 토후국은 오스만 제국과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공격한다. 1917년 4월,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네지드 토후국에 의해 항복했다. 이후 1917년 9월, 동맹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917년 10월 3일, 오스만 제국은 동맹국에게 항복한다.
동부 전선
초기 전투
서부 전선이 교착상태로 빠진 반면, 동부 전선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러시아군의 초기 계획은 도이치의 동프로이센을 동시에 침공하는 계획이었다. 러시아 제국의 동프로이센을 향한 공세는 1913년 8~9월에 일어난 타넨베르크 전투와 마수리아 호 전투에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분전으로 저지되었다. 러시아 제국의 덜 발달된 산업 기반과 비효율적인 군사 명령 체계가 이후 벌어진 사건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3년 12월에는 러시아군이 폴란드 지역과 카우나스에서 후퇴한다.
흑해 공세
1915년 4월 11일, 러시아 제국이 도이치 제국의 민스크 공격을 저지시키고, 리비우를 탈환한다. 그러나 러시아 내에서의 반전 여론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러다 1915년 5월 2일, 도이치 제국은 흑해 공세를 개시한다. 도이치 제국은 러시아군을 하나하나씩 격파시키며 흑해를 향해 진격했으며, 5월 9일에는 리비우를 재탈환하고, 6월 11일에는 체르니우치를, 6월 29일에는 루마니아 왕국의 이아시를 점령한다. 이에 7월 4일, 러시아 제국과 루마니아 왕국은 이아시를 공격하지만, 7월 17일에 패퇴하였다. 그후 도이치 제국은 키시나우와 갈라치를 각각 7월 30일과 8월 24일에 점령한다. 흑해 공세를 막지 못해 서부 우크라이나와 베사라비아를 빼앗기게 되자 러시아 제국 내부는 혼란에 휩싸인다.
루마니아 전선
1915년 7월 30일, 루마니아 왕국의 키시나우가 도이치 제국에게 함략당한다. 도이치 제국은 계속 남하하여 8월 24일에는 다뉴브 강의 갈라치를 점령한다. 이로 인해 루마니아 왕국은 홀로 동맹국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지게 되었다. 또한 도이치 제국이 브를라스까지 진격했을때, 바르나를 빼앗기면서 많은 병력들을 포위로 잃게 되었다.
1915년 10월 13일, 도이치 제국은 루마니아 왕국의 수도인 부쿠레슈티를 점령한다. 그리고 10월 16일,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왕인 페르디난드 1세는 항복을 선언한다. 이후 루마니아 왕국에는 루마니아 제2왕국이 선포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올테니아의 반란군이 계속 저항을 했으나, 11월 28일, 도이치 제국에 의해 진압된다.
러시아 혁명
1915년 11월, 페트로그라드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러시아 제국은 무너진다. 이후 러시아는 러시아 임시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그 힘은 매우 약해 사회주의와 연대를 진행하여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군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군내에서는 군주주의자와 민주주의자, 공산주의자로 파가 나뉘어 혼란이 가속되었다. 러시아군의 혼란이 가중되자, 도이치 제국은 러시아군 내에서 군주주의자들을 포섭하여 제팔 작전을 진행한다. 이로 인해 도이치 제국은 러시아군의 약한 저항만 받은체 키에프까지 진격한다.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에 불만을 품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볼셰비키들은 1916년 2월 5일,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임시 정부과 멘셰비키들은 모스크바와 차리친, 시베리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다.(러시아 내전)
종전조약
러시아 내전이 발생하자, 도이치 제국은 발트를 점령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상륙을 가세해 공격함으로써, 붉은 군대와 페트로그라드 조약(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맺는다. 이후 이들은 하얀 군대와도 지원을 약속한다는 것을 대가로 페트로그라드 조약과 같은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다. 페트로그라드 조약과 크림 조약으로 인해 도이치 제국은 발트 3국과 벨라루스, 크림 반도를 양도받았고, 우카이나의 독립도 인정되었다. 또한 러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이 해체되면서 3국 협상 또한 해체되었다.
서부전선
참호전
1914년 9월 11일 이후 도이치 제국은 프랑을 향한 공격을 중단함과 동시에 동부 전선과 외스터라이히 전선이 안정이 될 때까지 프랑 북부를 방어할 방어선을 개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루아르 강과 손 강을 낀 920여km 길이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르아르-손 방어선은 도이치 제국이 동부 전선이 안정화가 될 동안 점령지(프랑 북부)를 방어하기 위해 개설되었다. 이에 프랑도 도이치 제국의 루아르-손 방어선의 건너편에 방어선을 개설했다. 루아르-손 방어선이 개설된 1914년 9월 이후 1916년 5월까지 초반 프랑의 공세를 제외하고는 교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춘계 공세
1915년 11월, 동부 전선의 러시아 제국에서 혁명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은 전쟁에서 빠졌으며, 동부 전선은 동맹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후 도이치 제국은 동부 전선의 군대를 나누어 외스터라이히 전선과 서부 전선에 배치했다.
1916년 3월 5일, 도이치 제국이 모흐벙을 통해 남부로 진격하면서 춘계 공세가 시작되었다. 공세는 루아르-손 방어선 전체에서 개시되어, 7개월 뒤인 1916년 10월 14일, 프랑의 임시수도인 마르세유를 점령하면서 공세가 종료되었다. 이후 이틀뒤인 1916년 10월 20일, 프랑은 베르사유(베르시에그)에서 항복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은 제2차 베르시에그 조약으로 불리며, 베르샤유는 베르시에그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외스터라이히 전선
제2차 베르시에그 조약 이후, 서부 전선의 도이치군은 두 갈래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서부 전선 30%의 군대는 이탈리아 왕국의 서 알프스 방어선으로 배치되었고, 나머지 70%의 군대는 외스터라이히 전선에 배치되었다.
외스터라이히 전선에 배치된 도이치군의 수는 외스터라이히-운가르군을 압도하였다. 1917년 4월 28일, 준비를 마친 도이치 제국은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수도인 빈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알프스 공세) 도이치 제국이 알프스를 지나는 동안, 자유 운가르군은 빈을 집중 공격했다.(제3차 빈 전투) 외스터라이히-운가르군은 사방에서 몰려오는 동맹군으로 인해 우왕좌왕하다 하나둘씩 각개 격파당했고,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황제인 카를 1세는 빈을 버리고 그랏츠로 피난을 갔다. 결국 1917년 6월 13일, 빈은 자유 운가르군과 도이치군이 공동 점령하였고, 외스터라이히 전역은 동맹군이 점령한다.
이후 도이치 제국은 자유 운가르군과 불가리아군에게 일리리아를 맡긴체 카를1세가 도피해 있는 베네치아로 진격한다.
알프스 전선
이탈리아의 참전
이탈리아 왕국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도이치 제국과 동맹을 맺었다.(3국 동맹) 그러나 이탈리아 왕국은 지중해에 대한 브리튼의 간섭에 불만을 가졌다. 이를 안 프랑은 전쟁이 발발하기 몇주전, 이탈리아 왕국의 3국 동맹을 비밀리에 무효화시켰다. 이후 전쟁이 발발하고 난뒤, 이탈리아 왕국은 동맹국에 참전을 하지 않았고, 이에 도이치 제국과 브리튼은 시칠리아 섬의 군사통행권과 함대정박권을 대가로 중립을 인정했다.
1915년, 도이치 제국에 의해 프랑 북부를 빼앗긴 프랑은 이탈리아 왕국에게 지중해의 패권을 대가로 참전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탈리아 왕국의 에마누엘레 3세는 참전을 약속하였다. 이후 에마누엘레 3세와 총리인 안토니오 사란드라, 외무부 장관 시드니 소시노가 비밀리에 참전을 준비하였고, 1915년 10월 2일, 이탈리아 왕국은 전쟁에 참전한다.
초반에 이탈리아군은 국토방어전보다는 다른 협상국들에게 원정군으로 지원했지만, 프랑이 항복하고,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 또한 항복하자, 국토 방어전을 목적으로한 게릴라 전이 중심이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는 꽤나 우월했으나, 도이치 제국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탈리아 왕국의 해군력도 뛰어났으나, 세계1,2위를 다투는 브리튼과 도이치 제국의 해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항복한 협상국의 군대가 이탈리아 왕국을 도와주긴 했으나, 이마저도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공세
프랑과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이 항복한 이후 1917년 8월 31일, 도이치 제국은 마지막 공세를 개시해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왕국의 국경은 온통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쌓여있어 이탈리아군은 도이치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수 있었으나, 이탈리아군 역시도 꽤나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던 1917년 11월 7일, 시칠리아 섬에 브리튼이 상륙을 개시한다. (시칠리아 상륙) 시칠리아 섬을 점령한 브리튼은 나폴리에 다시 상륙을 개시한다. (이탈리아 상륙) 곧 12월 25일, 나폴리는 함략되었고, 알프스 방어선 또한 돌파되어버린다. 이후 동맹국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로마를 향해 진격하였고, 1917년 12월 31일, 도이치 제국과 브리튼이 각각 테르니와 라티나로 진격했을때, 이탈리아 왕국은 항복을 선언한다.
결과
협상국이 동맹국에게 항복하면서 프랑은 베를린 조약,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은 뮌헨 조약과 부다페스트 조약,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니예 조약, 제2차 발칸 동맹국에겐 런던 조약과 티라나 조약이,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 조약, 중화민국에는 상하이 조약을 맺으면서 여러 국가들은 동맹국들에게 흡수당하거나 분열되었다.
프랑의 경우, 모든 식민지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독일 제국에게 분할 점령되었으며,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브레타뉴 왕국이 독립하고, 부르봉가의 프랑 제4왕국이 건국된다. 이후 도이치 제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은 프랑 제4왕국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물리고 이를 배상하기 전까지 프랑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이후 프랑 제4왕국은 군주주의에 대한 불만과 정부 정책에 불만, 경제난에 대한 불만, 브리튼과 도이치 제국의 간섭에 아무 말 못하는 정부에 대한 불만에 의해 프랑에서는 파시즘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쟁 이후의 세계
유럽은 도이치 제국을 중심으로 한 군주주의 국가들의 세력이 비대해졌다. 이에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는 이념과 이해관계로 인해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고,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과 아메리카 합중국을 중심으로 민주주의가 유지되었다.
한편, 프랑은 베를린 조약으로 인한 지독한 경제난과 배상금에 시달렸으며,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은 일리리아와 운가르, 갈리치아-로도메리아를 잃고 외스터라이히 공국으로 도이치 제국에 흡수되었다. 제2차 발칸 동맹의 국가들은 불가리아 차르국과 알바니아 왕국에 의해 영토를 빼앗기고 여러 국가들이 독립한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니예 조약으로 땅과 동맹국들에게 간섭을 받게 되었다.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 조약으로 나폴리 왕국과 교황령이 독립하였다. 중화민국은 상하이 조약으로 인해 도이치 제국에게 여러 주요 항구 도시를 빼앗겼고, 니혼 제국에게는 만주 권리 일부를 양도하게 되었다.
연표
1913년
- 6월 29일: 제2차 발칸 전쟁의 발발
- 7월 1일: 러시아 제국을 제외한 중제국들의 발칸 반도 철수
- 7월 2일: 도이치 제국의 러시아 제국에 대한 최후통첩
- 7월 3일: 브도 동맹의 선전포고, 오스만 제국의 협상국 가입
- 7월 11일: 벨기엔 제1왕국의 도이치 제국과 프랑 제3공화국의 군사통행권 요청 거절
- 7월 19일: 도이치 제국의 룩셈부르크, 벨기엔 침공
- 8월 15일: 러시아 제국의 동프로이센 공세 개시
- 8월 17일: 파리 함략, 외스터라이히-운가르 제국의 바이에른 공세 개시
- 8월 21일: 마른 전투, 프랑의 패배
- 9월 11일: 도이치 제국의 브레타뉴 점령, 브레타뉴-루아르 공세의 중단
- 12월 25일: 브도 동맹의 작센 공세와 바르샤바 공세 개시
1914년
- 1월 3일: 알바니아 공국의 참전
- 1월 7일: 몬테네그로의 알바니아 침략
- 1월 11일: 불가리아의 마케도니아 공세 개시
- 3월: 도이치 제국과 자유 운가르군의 접촉, 도이치-운가르 밀서
- 4월 5일: 도이치-시암 조약 체결
- 4월 24일: 시암 왕국의 프랑 선전포고
- 5월 2일: 프랑령 인도차이나의 항복
- 5월 11일: 도이치 제국의 하이난 섬 점령
- 5월 14일: 베이양정부의 도이치 선전포고
- 5월 15일: 니혼 제국의 중화민국 선전포고
- 5월 16일: 프랑의 니혼 선전포고
- 5월 21일: 니혼의 만주 공격
- 6월 13일: 베이양정부의 자오저우만 공격
- 6월 19일: 운가르 봉기 발생
- 7월 3일: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의 그리스 공세
- 7월 11일: 도이치 제국의 산동반도 차지
- 7월 19일: 운가르 왕국 선포
- 7월 26일: 도이치 제국과 니혼 제국의 베이징 공세
- 9월 3일: 불가리아와 알바니아의 트리칼라 방어선 돌파
- 9월 19일: 베이징 함략, 베이양정부의 항복, 제2차 베이징 조약 체결
1915년
- 1월 18일: 아테네 함략
- 1월 21일: 그리스의 항복
- 3월 9일: 몬테네그로 정변
- 5월 2일: 도이치 제국의 흑해 공세 개시
- 5월 4일: 세르비아와 루마니아의 도나우 공세 개시
- 9월 12일: 발칸 반도 동맹국의 베오그라드 공세 개시
- 10월 2일: 이탈리아의 참전
- 10월 13일: 부쿠레슈티 함략
- 10월 14일: 카자르 왕조의 오스만 선전포고
- 10월 16일: 루마니아의 항복
- 11월 7일: 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시위
- 11월 12일: 10월 혁명 발생
- 12월 3일: 네지드 토후국의 오스만 선전포고
1916년
- 2월 5일: 1월 혁명 발생
- 2월 10일: 러시아 내전
- 2월 22일: 베오그라드 함략
- 2월 24일: 세르비아 항복
- 3월 5일: 춘계 공세 개시
- 4월 17일: 페트로그라드 조약 체결
- 5월 3일: 크림 조약 체결
- 10월 14일: 마르세유 함략
- 10월 20일: 제2차 베르시에그 조약 체결
1917년
- 4월 11일: 자발 샴마르의 항복
- 4월 28일: 알프스 공세
- 6월 13일: 빈 함략
- 8월 31일: 마지막 공세 개시
- 10월 3일: 오스만 제국의 항복
- 11월 7일: 시칠리아 상륙
- 12월 31일: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1918년
1919년
2020년
- 4월 4일: 상하이 조약 체결
1차 대전의 결과와 의의, 그리고 그 영향
- 이 때부터 총력전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특히 벨기에 왕국, 러시아 제국과 독일 제국은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 전쟁 기간동안 맥심기관총, 독가스, 탱크, 전투기, 유보트, 곡사포 등의 신무기가 생겨났다.
- 프랑 국민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일방적 평화의 강요나 다름없는 베를린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 도이치 제국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의견 차이가 새로운 대전의 양상을 만들었다,
- 새로운 독립 국가가 생겨난다. 또한 새 국가의 독립을 본 다른 국가의 민족들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진다.
- 니혼 제국은 만주 전역에 대한 권리를 획득했으며, 중국에 대한 강한 영향력을 얻었다.
- 전 세계가 국제 정치의 무대가 되었으며, 국제 정치가 좁은 유럽에서 벗어나 전 세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 전 세계 국민의 감시 속에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전 세계 지도자들이 가지게 되었다.
-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늘어났다.
- 유럽은 도이치 제국의 군주주의 국가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민주주의 국가가 대립하게 된다.
협상국과 러시아의 전후 결과
프랑
프랑 제4왕국의 탄생
- 막대한 배상금 지불
- 프랑의 일부 영토였던 브레타뉴가 독립하게 됨
- 서 알자스-로렌: 도이치 제국에 병합
- 코르시카 섬: 이탈리아에 할양
- 아프리카 식민지
- 프랑령 북아프리카, 프랑령 서아프리카(도이치 제국 위임통치령)
- 프랑령 에콰도 아프리카, 프랑령 마다가스카르, 프랑령 인도, 프랑령 지부티, 프랑령 서인도제도, 에콰도프랑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위임통치령)
- 프랑령 인도차이나 (시암 왕국과 니혼 제국의 분할 점령)
벨기엔
벨기엔의 괴뢰화
룩셈부르크
외스터라이히-운가른 제국
이탈리아
- 도이치 제국에 베네치아 할양
- 북이탈리아 도이치 정부와 나폴리 브리튼 정부, 교황령의 탄생
- 이탈리아령 리비아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 할양
- 이탈리아령 소말릴란드의 도이치 제국 할양
- 이탈리아령 에리트레아의 에티오피아 제국 할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