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구 |
→ | 최태곤 |
→ |
제19대 노동부장관 (김대중 정부) | ||||
---|---|---|---|---|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 (노무현 정부) | ||||
제4대 기획재정부 장관 겸 경제부총리 (문재인 정부) | ||||
제21대 국회의원 최태곤 崔泰坤 | Choi Taegon | ||||
1961년 3월 16일 | (63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압구정동[1] | ||||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 ||||
경주 최씨 사성공 예파 37세손 | ||||
대왕국민학교 (졸업) 은성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경제학 / 제적) 성균관대학교 (경제학 / 석사) | ||||
169cm, 55kg | ||||
가톨릭교 (세례명 : 베드로) | ||||
면제 (수형) | ||||
1 | ||||
21 | ||||
강남구 갑 | ||||
행정안전위원회 | ||||
제21대 국회의원 더불어민주당 강남구 갑 위원장 | ||||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장 평화민주당 창당 발기인 민주당 통합협의회 위원 제19대 노동부 장관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 열린우리당 대변인 국민참여당 수석대변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 제4대 기획재정부 장관 |
개요
더불어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 진보진영 최악의 험지라고 불리는 강남에서 11번의 낙선을 거듭하였으며 송철호, 노무현과 함께 '낙선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202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에서 당선되면서 국회에 입성하였다. 강남갑에서 최초로 진보 성향 정당의 국회의원을 지냈다. 차기 서울시장 후보군으로도 유력하게 거론된다.
생애
1961년 3월 16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압구정동(現 강남구 압구정동)에서 태어났다. 생가 터가 현재 압구정 현대아파트에 위치해있으며, 현재 살고있는 집은 개발할때 1976년에 현대아파트가 지어질때 가족이 대대로 살아온 땅을 넘길 수 없다며 가산을 털어 산 집이라고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고 1980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했지만 학생운동을 하다가 1학년도 채우지 못하고 제적되었으며 1982년 다시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1993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운동권
신문에 자주 회자될만큼 강성 운동권이었으며, 1980년대 운동권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학교 선배에 이끌려 1980년 서울의 봄에 동참했다가 심재철 학생회장의 연설을 듣고 동요되어 적극적으로 운동권에 동참하였다. 1981년 1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시위에서 경찰에게 잡혀가 3개월동안 고문수사를 당하였고[2] 서울대학교에서 제적되기까지 하였다. 징역 2년 5개월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강남구 전답 하나를 팔아서 돈을 마련해 겨우 그를 감옥에서 빼냈다. 이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해 운동권과는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1986년 학생회장에 당선되면서 다시 열성적인 운동권 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1987년 6월항쟁 당시에는 성균관대학교를 대표하여 시위에 동참하였다.
정치 행보
1988년 사실상 대학을 졸업하고[3] 김대중의 영입 제안을 받아 평화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종로구 차출이 예상되었으나, 자신의 고향인 강남구에서 출마한다고 선언했으며 결과적으로 18.8%를 득표해 3위로 낙선했다. 당선자는 통일민주당의 황병태 의원. 이후 신민주연합당에서 당직 생활을 하다가, 1991년 민주당을 창당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통일국민당 김동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김대중 총재를 따라서 1995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강남갑 선거구에 출마했고 또다시 낙선했다. 서상목 후보와 표차이가 꽤 나서 다른 지역에 차출될 것이라는 말이 많았고 종로구 재보궐 선거에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설이 돌았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 후보가 차출되었고 자신은 계속 강남구에서 정치생활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36.4%를 얻어 2위로 또다시 낙선했다. 2001년 김대중 정권의 마지막 노동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으로서 기대할만큼의 성과는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무난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대통령 경선에서는 김근태 후보를 지지했고, 김근태 후보가 사퇴한 이후에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해 경선 승리를 도왔다. 장관을 지낸 뒤 몸값을 키워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강남구청장으로 출마했으며, 야권의 분열과 노풍으로 잠깐 여론조사에서 앞서기도 했지만 투표율 저조로 인해 생각보다 큰 표차로[4] 패배했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때 천정배와 함께 가장 먼저 열린우리당으로 당을 옮겼다. 노무현 탄핵 소추 의결 당시 탄핵을 극렬하게 반대했다. 탄핵 역풍으로 잠시 강남구 갑에서 당선 확률이 높았으나, 정동영의 노인 폄하 발언으로 지지율이 하락해 초접전 끝에[5] 또다시 낙선하고 만다. 2006년 서울시장 후보군으로 낙점되기도 했지만 경선에서 강금실 후보에게 패하여 나가지 못하였고, 대신 강남구청장 선거에 나갔지만 처참했던 대통령 지지율 때문에 20%도 넘기지 못하고 참패했다.
논란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지역구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당락 | 비고 |
---|---|---|---|---|---|---|---|
소속 정당
여담
둘러보기
모티브
이름은 강남 지역 낙선자인 최재성(송파을), 강태웅(용산구), 김성곤(강남갑)의 글자를 하나씩 따서 만든것이며, 사진속 인물은 전라남도 국회의원인 서삼석이다.
김부겸과 김영춘, 이정현, 김성곤 등 여러 인물을 본따서 만들었으며 가장 크게 모티브를 준 국회의원은 전현희와 이해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