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바흐 전투
기간
신력 498년 8월 2일 ~ 신력 48년 9월 21일
장소
루메지아 왕국 쿠르바흐 시
교전국
네브리안드 왕국 루메지아 왕국
지휘관
-제20차량화소총병여단 여단장
이젤 아르타렌 수세베르셀프
-제22차량화소총병여단 여단장
에드완 프레더 라크
-제26차량화소총병여단 여단장
카트리나 아우시엔 드레테
-제27차량화소총병여단 여단장
에리카 베아트리 레세프
-제32소총병여단 여단장
루나 엘린 네소르
-제33소총병여단 여단장
에리스 레브리엘리 이트레르
-서부전선군 사령관
피에르 라이너
-제5군단 사령관
샤를 티에르
-제12군단 사령관
파스칼 레이나드
-제5보병사단 사단장
알라츠 바레스
-제17보병사단 사단장
아르마드 라이나우츠
-제18보병사단 사단장
제롬 티베른
-제19보병사단 사단장
제라르 아르시우드
-제22기갑사단 사단장
아퀠름 밴너
-제127기계화보병여단 여단장
베르티에 리델
-제129기계화보병여단 여단장
네르사 라베르츠
-제221보병여단 여단장
안셀름 드 루메지아
결과 및 영향 네브리안드군의 승리
루메지아 왕립육군 서부전선군 사실상 괴멸
병력 43,500명 98,000명
피해 규모 사상자 8,400명
차량 250대 이상 손실
사상자 53,900명
차량 1,200대 이상 손실

개요

네브리안드-루메지아 전쟁 기간 동안 벌어진 전투.

쿠르바흐 지역은 루메지아 왕국의 수도인 포르티는 물론이고 아직 점령되지 않은 대도시들을 이어주는 고속도로의 시작점인 교통의 요충지였다.

상술한 이유 때문에 네브리안드군은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하는 지역이었으며 루메지아군 입장에서는 이곳이 함락 당하면 그 뒤로는 수도 포르티까지 천연요새라고 불리는 세브르 강 정도를 제외하면 평탄한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어서 방어에 불리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사수해야 하는 지역이었다. 그렇기에 네브리안드군이 쿠르바흐 외곽에 도착하자 루메지아군은 제5군단제12군단을 통째로 투입하고 전선군 직속의 3개 여단을 더해 방어작전을 수행하기에 이른다.

전개

마르프 전투 이후 마르프 지역을 돌파한 네브리안드군이 신력 498년 7월 12일 쿠르바흐 외곽에 다다르자 네브리안드 왕립육군 총참모부제20차량화소총병여단 여단장 이젤 아르타렌 수세베르셀프 소장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작전을 수립한다. 제20차량화소총병여단제22차량화소총병여단은 쿠르바흐 지역을 정면에서 공격, 제26차량화소총병여단은 쿠르바흐 우측, 제27차량화소총병여단은 쿠르바흐 좌측을 공략하여 쿠르바흐의 루메지아군을 포위섬멸하는 작전이었으며 개시일은 8월 2일이었다.

8월 2일 네브리안드군의 포병대가 루메지아군을 향해 일제히 포를 발사하면서 쿠르바흐 전투가 시작되었다. 3일 오전 11시까지 이어진 포병의 포격이 끝나고 제20차량화소총병여단과 제22차량화소총병여단이 폐허가 되어버린 쿠르바흐 영내로 가장 먼저 진입했다. 좌측과 우측을 공략하기로 한 제26여단과 제27여단 역시 진격하여 쿠르바흐로 빠른 속도로 진입하고 있었다.

제5군단 사령관 샤를 티에르은 예하 부대와의 교신이 끊긴 상황에서 전령까지 파견하여 각 예하 부대에 방어작전을 지시했으며 8월 3일 오후 1시경 쿠르바흐의 로흐슈 마을에서 네브리안드 제20차량화소총병여단 예하 제201차량화소총병연대와 루메지아 제5보병사단의 1개 대대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네브리안드군은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공세를 펼쳤고 한 시간만에 로흐슈 마을 중심부까지 진격한 상황이었다.

오후 2시부터는 쿠르바흐 대부분의 지역에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제20차량화소총병여단은 루메지아군의 제5사단, 제22차량화소총병여단은 루메지아군의 제19사단과 제22기갑사단과 충돌했으며 26차량화소총병여단은 17사단, 27차량화소총병여단은 18사단과 충돌했다.

위협적인 포병전력과 기갑전력을 앞세운 네브리안드군의 공세에 루메지아 제19사단의 주력부대가 링겐 지역에서 포위되고 그외 루메지아군은 모든 지역에서 패배하여 북쪽으로 밀려났다.

8월 3일 쿠르바흐를 가로지르는 하천을 경계로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으며 때마침 네브리안드군의 제32소총병여단과 제33소총병여단이 추가로 증원되면서 루메지아군의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예비대를 두어 순환배치를 통해 군인들의 피로도를 낮추는 네브리안드군의 질적 우세에 최전선이 무너져갔다.

영향

이 전투로 벨포르 전투 이후로 누적된 막대한 피해를 만회하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시 전투를 치른 루메지아 왕국의 서부전선군은 엄청난 손실로 해체된 13군단과 제17군단과는 다르게 비교적 전력 자체는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던 5군단과 12군단이 괴멸적 피해를 입으면서 사실상 와해 되었다. 한줌이 되어버린 서부전선군의 잔존 병력은 세브르 강 이북으로 퇴각하여 재정비를 거친 후 세브르 전선군으로 개칭되었으나 세브르 강 전투플레르메 공방전, 그레푀일 포위전을 거치며 전투불능 상태에 빠졌다.

네브리안드군 수뇌부는 수적열세를 극복한 이 전투의 결과로 자신들의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499년 6월 르쥐이프 전투에서 제20차량화소총병여단에게 군단급 병력을 상대하게 하는 무리한 임무를 내려 역으로 포위되어 여단장과 부여단장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