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령 베트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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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29일 (토) 13:37 판

프랑스 제국의
외부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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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국의 외부영토
프랑스령 베트남
Viêt Nam Français
Pháp Việt Nam
국기 국장
Liberté, Ordre Public
자유, 공공 질서
국가 Chant du départ
공민에게 고함
수도 사이공
최대 도시 하노이
인구 수 80,398,100명 (2020년)
면적 331,212㎢
인종 구성 베트남계 68.3%, 중국계 15.4%, 프랑스계 10.5%, 기타 5.8%
종교 구성 불교 69.3%, 기독교 2.1%, 기타 3.3%, 무종교 25.3%
국왕 뤼시앵
총독 무소속 조르주 불
총리 프랑스 공산당 응우옌떤쌍
GDP
(명목)
전체 $2,009,952,500,000 (세계 9위)
1인당 $25,000
화폐 베트남 프랑

개요

프랑스 제국의 식민지(공식 명칭은 외부영토)이다. 프랑스령 알제리보다도 규모가 큰, 프랑스의 최대 규모 식민지이다. 그러나 현재는 사실상 독립 국가 취급을 받고 있다.

역사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국가중 가장 역사가 오래되었다. 베트남의 역사는 기원전 207년 남월의 시대때로 거슬러 올라가며 기원전 111년부터는 한나라의 지배 시대를 거치면서 한구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605년경에는 다낭을 중심으로하던 참파 왕국이 중국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당나라 시대에 안남도호부가 설치되면서 사실상 중국의 문화권에 편입되게 된다. 그러다가 907년 5대 10국 시대에 들어 혼란에 빠진 중국의 상황을 틈타 쿡 트아주가 절도사를 자처하며 쿡씨 절도사 시대가 도래했다.

938년, 응오 왕조가 성립되었으며 응오 왕조는 96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베트남은 완전히 중국에서 독립하게 된다. 968년 대월국이 세워져 1802년까지 존속하였다.

1802년 응우옌 왕조가 세워지며 베트남 최후의 통일 왕조 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이때 프랑스 제국의 식민 지배 야욕이 드러나며 베트남은 위기를 맞게 된다. 이미 루이 16세 시대때부터 베트남에 관심을 보이던게 프랑스였다. 1800년대 초반에는 제1차 대유럽 전쟁으로 인해 정신 없었을 때였기 때문에 응우옌 왕조도 나름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1817년 대유럽전쟁에서 승리한 보나파르트 황가에 의해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 제국과 전쟁을 치루게 되었다. 5개월간의 짧은 전쟁 끝에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 제국의 제후국으로 편입되는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 없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나마 1848년까지는 명목상이라도 제후국 대우를 받았지만 1848년 프랑스 노동자 대투쟁 사건이 발생하면서 본국의 정치가 혼란해져, 응우옌 왕조가 이 틈을 타 독립을 시도한 것이 프랑스 당국에 의해 발각되었다. 결국 1850년 응우옌 왕조는 프랑스 본국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응우옌 왕조 일원들은 청나라로 망명했다. 이후로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분이 되어 1923년까지 프랑스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1900년대 초반, 응우옌 왕조를 지지하던 시민들이 하노이에서 폭동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베트남 시민들은 물론, 프랑스의 몇몇 좌파 지식인들까지 베트남의 독립을 주장하자 1923년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각각 프랑스령 라오스, 프랑스령 캄푸치아, 프랑스령 베트남으로 분리시키고, 이중 가장 큰 베트남에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후 이 자치권은 1960년대 이후 모든 프랑스 식민지에 적용되었다.

당시 베트남의 자치권은 어디까지나 본토 파견 의원 10명을 선출하고 식민지 자치 의회를 선출하는데에 그쳤지만, 프랑스 공산당의 베트남 지부 정당인 베트남 공산당의 투쟁 운동을 통해 1930년대 중반경에는 옵저버 의원인 파견 의원이 아닌, 표결권이 있는 의원 20명을 선출하는 것으로 자치권이 확대되었고 자치 의회의 권한 역시 대폭 확대되게 된다.

그러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베트남인들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어 전쟁을 치뤘고 자연스레 베트남 내부에서 독립 열기게 타올랐다. 1950년대 초반, 일부 과격 분자들은 무기를 탈취하고 프랑스에 반대하는 독립 무장혁명을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베트남의 독립 열기는 사그라들었지만 이 영향으로 1968년 응우옌신꿍프랑스 공산당 소속으로 정계에 진출해 비(非) 프랑스 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부총리직에 오르며 베트남인들에 대한 권리가 훨씬 더 많이 신장되었다.

1968년 68혁명과 더불어 응우옌신꿍 부총리의 요구에 따라, 프랑스령 베트남은 자체적으로 식민지 총리를 선출하게 되어 사실상 독립국 또는 프랑스와 국가연합에 가까운 형태로 많은 권한을 누리게 된다. 1980년대부터는 프랑스 본토와 선거법이 달라져 프랑스령 알제리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들이 파견 의원을 제외하고는 프랑스 입법부에 의원을 선출하지 않는 대신, 자치 의회가 사실상 독립국 의회나 다름 없는 권한을 갖게 되어 베트남 역시 사실상의 독립국이나 다름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1970년대까지는 빈부격차가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1974년 쥘 르브룅 총리의 "베트남 5개년 경제 정책"을 통해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베트남에 대한 아낌 없는 투자가 활발해져 현재는 명목 GDP로만 세계 9위의 경제 규모를 갖게 되는 등, 아시아에서 일본과 한국 다음가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기도 했다.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