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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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6" width="10%" style="font-size: 10.5pt; color: #fff; background: #030;" |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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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3" width="50%" style="font-size: 10.5pt; background: #fff; vertical-align:top; text-align: left;"  | 4만명
| colspan="3" width="50%" style="font-size: 10.5pt; background: #fff; vertical-align:top; text-align: left;"  | 2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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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6" width="10%" style="font-size: 10.5pt; color: #fff; background: #030;" | 피해 규모
! colspan="6" width="10%" style="font-size: 10.5pt; color: #fff; background: #030;" | 피해 규모

2021년 5월 15일 (토) 02:50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한국-아프가니스탄 전쟁
Korean-Afghanistan War
기간
1972년 3월 29일 ~ 1972년 4월 12일
장소
아프가니스탄 전역
원인
아프가니스탄 공화파의 쿠데타와 소련의 개입
교전 세력
연합군
아프가니스탄 왕국
대한국
이란 제국
공화군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소련
지원국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티베트국
지휘관
모하메드 자히르 샤
사르다르 샤 왈리 칸
선종 강황제
장준하
김용우
이종찬
장도영
채명신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아데시르 자헤디
모하메드 다우드 칸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드미트리 유스티노프
세르게이 스콜로프
병력
1만 5천명 2만명
피해 규모
사상자 50명 사상자 60명
결과
연합군의 승리, 소련의 아프간 철수
영향
아프가니스탄의 왕정 복고
한국-아프간 동맹조약 체결

개요

1972년 3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벌어진 아프가니스탄 왕국, 한국 연합군과 아프가니스탄 공화파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배경

아프가니스탄 왕국은 1933년 모하메드 자히르 샤의 즉위 이후 발전을 거듭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한국의 전폭적인 투자를 받아 급속도로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과 아프간은 한국 이란처럼 동맹국은 아니었지만 대단히 우호적인 관계였다.
아프간 정부는 경제만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종 사회적 발전도 추구하였고 자히르 샤는 1953년 자신의 사촌형인 모하메드 다우드 칸을 수상에 임명해 각종 사회개혁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너무 급진적인 개혁에 불만의 소리가 터져나왔고 1963년 자히르 샤는 다우드 칸을 수상직에서 해임한다. 이에 다우드 칸은 반발심을 갖고 조용히 쿠데타를 준비해 왕실을 전복할 계획을 세웠고 9년만인 1972년 3월 28일, 국왕 자히르 샤가 이탈리아로 요양을 떠난 사이 군인 수백명과 함께 정부를 접수한다.
이 쿠데타는 매우 치밀하게 계획되었는데 다우드 칸은 한국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비밀리에 소련을 끌어들였다. 또한 다우드 칸은 쿠데타가 성공하면 즉시 소련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소련은 다우드 칸의 제안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으로 바라보았으나 한국이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에 영향력을 확장하는 것을 최대한 견제해야 했기에 소극적이나마 요구에 응했고 1966년부터 1971년까지 아프간 국경에 2만명의 병력을 배치시킨다.
한편 한국은 소련-아프간 국경에 소련군이 증원배치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으나 다우드 칸이 원인이라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에 한국군도 이란 정부와 협의하여 1970년 이란-아프간 국경에 1만명 가량의 군대를 배치했다.
소련 내부에서는 다우드 칸만 믿고 아프간에 개입하는 것은 한국과의 전면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우려가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소련은 다우드 칸에게 ‘쿠데타는 시기와 기회를 잘 맞춰 일으키라’는 완곡한 우려의 의견 표명을 했다. 그러나 다우드 칸은 1972년 한국에서 유진산 총리가 급서한 틈을 노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소련은 다우드 칸과 합의되어있지는 않았지만 쿠데타 발발 소식을 듣자마자 아프가니스탄 영내로 진입하였고 장준하 총리서리는 이 소식에 한국군도 국경을 넘어 아프간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개

1972년 4월 1일, 소련 정부는 한국의 예상치 못한 진격에 당황했다. 소련 정부측은 한국은 총리가 공석인 상태라 상황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련 정부가 군대를 물리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전 양국군은 아프간 동부 소도시 헤라트에서 맞닥뜨렸고 서로 당황하는 사이 소규모 충돌이 일어났다. 이 전투로 한국군은 3명이 사망하고 소련군은 5명이 사망했다.
4월 2일, 긴급하게 열린 소련 장관회의에서는 한국과 직접 충돌을 일으키면서까지 아프간에 개입할 이유는 없다고 결론지었고 아프간에 진입한 모든 소련군을 철수시켰다.

소련군이 철수하고 모든 상황을 파악한 한국군은 4월 10일 공수부대를 동원해 카불을 지키던 소규모 군경과 교전을 벌이다 다우드 칸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