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국경 분쟁 (푸른 오얏꽃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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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국경 분쟁
냉전의 일부
기간 1954년 7월 2일 ~ 8월 9일
장소 간도 일대
결과 한중 국경 조약 체결
영향 일본의 동해 장악 저지
교전국
대한조선국 중화인민공화국
지휘관
이승만
김홍일
최용덕
정일권
백선엽
김종오
마오쩌둥
린뱌오
덩화
저우언라이
류사오치
펑더화이
병력 800,000명
2개 야전군
전차 1,400대
항공기 80기
1,300,000명
1개 집단군
전차 950대
항공기 40기
피해 규모 47명 사망
108명 부상
126명 사망
232명 부상


개요

1954년 7월부터 8월 사이에 대한조선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진 무력 국경 분쟁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대한조선국 최초의 군사적 충돌이었다.

배경

영토 문제의 발단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0년대부터 청나라의 봉금령이 해이해지면서 조선 조정은 포화된 인구를 한반도 밖으로 보내고, 자원 확보를 위해 1869년부터 토문강을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선이라 주장했다. 1874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아예 제국 조정에서 두만강 이북 지역의 개척을 장려하기 시작한다. 수천여 명의 한국인이 월경하여 이북에 터를 잡기 시작했고, 두만강 일대는 1880년부터 회령 이북을 개간하기 시작한 이래 1881년부터 더욱 광범위한 지역이 개간되었다. 이에 청나라가 원래의 국경을 두고 대한제국과 분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간도 한국인 살인사건으로 한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청나라에게 남만주 일대를 얻는 조건에서 영토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이후 청이 신해혁명을 통해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들어선다. 대한제국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대한조선국이 세워진다. 대한조선국은 기타큐슈 조약에 의거해 제국 시절 얻은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남만주 영토를 다시 중국에 반환하려 했지만 군벌 시대였던 중국이 이에 제대로 응하지 못했다. 따라서 간도는 조선이나 중국의 땅이라고 단언하기 힘든 애매한 지역이 되었다. 이후 김구는 1930년대부터 중국과 국경 협정을 맺으려 했지만, 한성 진군을 통해 집권한 이범석의 파시스트 정권이 등장하여 만주를 침공하고 계획은 무산된다. 대한제국 시절 이후로 간도 일대를 다시 장악한 대한조선국은 그곳에 군수공장을 세우고 현지인을 탄압하며 조선인을 이주시켰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침공으로 연합국의 지위를 얻은 대한조선국은 1948년 자유민주주의 선거를 시행하며 제1세계 국가로서의 노선을 걷는다. 비슷한 시기,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내전 끝에 공산당이 승리하여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중국은 1951년 인민해방군을 동원해서 티베트를 무력 병합하고, 50년대 중반부터 국내외 상황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불안정한 조선과의 국경을 확정지을 필요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