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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황후였고, 부군인 광서제와 본인이 영민한 사람이었던 덕택에 현대의 평가는 동정이 약간 섞인채로 매우 우호적이다. 아울러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황후의 신분이었던 데다가 광서제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제위를 선양하면서 효목경황후는 서태후처럼 정치면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을 여지조차도 없었다. 그리고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항일투쟁을 외치며 만주족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이끌어 내어 전쟁에 도움을 주었고 본인의 장신구를 정부에  기증해 재정을 보태는 등 솔선수범하였다.
망국의 황후였고, 부군인 광서제와 본인이 똑똑한 사람이었던 덕택에 현대의 평가는 동정이 약간 섞인채 매우 우호적이다. 아울러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황후의 신분이었던 데다가 광서제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제위를 선양하면서 효목경황후는 서태후처럼 정치면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을 여지조차도 없었다. 아울러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항일투쟁을 외치며 만주족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이끌어 내어 전쟁에 도움을 주었고 본인의 장신구를 정부에  기증해 재정을 보태는 등 솔선수범하였다.
 
굉장히 영민하고 당찬 인물이었다. 광서제에게 황제의 위엄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하여 20년간 서태후의 꼭두각시 황제로 살던 그가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여러 근대화 조치를 밀어붙이게 하였고 [[광서천궁]]과 [[의화단 운동 (동방)|의화단 운동]]을 거치며 망국에 다다라서야 황권을 되찾은 광서제를 도와 정사를 돌보기도 했으며 서양 국가들을 이간질하여 윈난의 벌목권을 지켜내는등 직접 정치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2021년 8월 6일 (금) 17:57 판


동방의 불란서 세계관
청 광서제 정실황후
효목경황후 | 孝穆景皇后
존호 덕임왕후 (德林王后)
장경태후 (章敬太后)
시호 효목인헌위무덕순현재원의경황후
孝穆仁憲魏武德純顯載元毅景皇后
출생 1876년 2월 27일
청나라 직예성 베이징
사망 1981년 6월 30일 (105세)
대한국 심양도급시 인경궁
능묘 숭릉(崇陵)
재위 청의 황후
1901년 10월 6일 ~ 1909년 2월 14일
만왕후 / 만왕태후
1909년 2월 15일 ~ 1981년 6월 30일
인경궁 장경태후
1951년 7월 6일 ~ 1981년 6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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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타랍(他他拉) → 김(金)
서설(瑞雪) → 희영(喜英)
배우자 덕종 광서제
자녀 2남 2녀

개요

광서제의 두번째 정실황후로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이다. 본래 후궁출신으로 광서제의 총애를 받아 황귀비에 책봉되었으나 의화단 운동 이후 광서제가 복위되자 곧바로 황후에 책봉되었다.

광서제가 양종에게 제위를 선양한 후 만왕후(滿王后)에 봉해졌다. 1951년에는 무종으로부터 장경태후(章敬太后)라는 존호를 받으며 선대황후로 인정받았다. 사후에는 황후의 예에 맞추어 국장을 치렀으며 시호도 효목경황후(孝穆景皇后)로 올려졌다.

생애

입궁

환란의 시기

만왕후(滿王后)

사진관 할머니

1952년 평소 사진 찍는 것을 즐겨하던 그녀는 76살이라는 노구를 이끌고 심양에 사진관을 연다. 사진관 이름은 아름다운 거울이라는 의미의 화경(華鏡). 그녀는 아침에 일찍 궁을 나서 사진관에서 일하다 저녁에 돌아오는 생활을 승하할때까지 반복한다. 전문 사진술을 배우고 여러 최신 카메라를 능숙히 다룰줄 알았던 태후의 사진관은 대흥행하며 5,60년대 한국에 사진촬영 열풍을 불러오기까지 했다. 사진관 화경은 가족사진과 결혼사진만 찍어주었고 비용은 무료였다. 처음에는 오는 사람들마다 찍어주었지만 사람이 너무 몰려들어 태후의 경호에 문제가 생겨 예약제로 바뀌었는데, 한번 예약하면 몇개월 후에나 찍을 수 있었다.

승하

평가

망국의 황후였고, 부군인 광서제와 본인이 똑똑한 사람이었던 덕택에 현대의 평가는 동정이 약간 섞인채 매우 우호적이다. 아울러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황후의 신분이었던 데다가 광서제가 뭔가 해보기도 전에 제위를 선양하면서 효목경황후는 서태후처럼 정치면에서 부정적 평가를 받을 여지조차도 없었다. 아울러 아시아 태평양 전쟁 당시 항일투쟁을 외치며 만주족의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이끌어 내어 전쟁에 도움을 주었고 본인의 장신구를 정부에 기증해 재정을 보태는 등 솔선수범하였다.

굉장히 영민하고 당찬 인물이었다. 광서제에게 황제의 위엄을 되찾아야 한다고 조언하여 20년간 서태후의 꼭두각시 황제로 살던 그가 변법자강운동이라는 여러 근대화 조치를 밀어붙이게 하였고 광서천궁의화단 운동을 거치며 망국에 다다라서야 황권을 되찾은 광서제를 도와 정사를 돌보기도 했으며 서양 국가들을 이간질하여 윈난의 벌목권을 지켜내는등 직접 정치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