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영제 (동방의 등불): 두 판 사이의 차이

편집 요약 없음
편집 요약 없음
107번째 줄: 107번째 줄:
|-
|-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참전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참전
|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br>서울 진공 작전<br>경인공란<br>베트남 전쟁
|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br>서울 진공 작전<br>경인공란<br>베트남 전쟁<br>한중전쟁
|-
|-
|}</div></div>
|}</div></div>

2022년 3월 22일 (화) 20:38 판

파일:대한제국 용보.svg
대한제국 황제
[ 펼치기 · 접기 ]
초대 제2대 제3대
고종 광무제 순종 융희제 혜조 의화제
제4대 제5대 제6대
무종 흥영제 명덕제 성화제
추존
태조 고황제 · 세종 시황제 · 진종 소황제 · 장조 의황제 · 정조 선황제 · 순조 숙황제 · 문조 익황제 · 헌종 성황제 · 철종 장황제
대한제국 국무총리대신 · 대한제국 부총리 · 대한제국 참의원의장 · 대한제국 민의원의장 · 대한제국 대법원장
대한제국 제4대 황제
무종 흥영제 | 武宗 興永帝
출생 1907년 11월 15일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즉위 1957년 6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덕궁 인정문
사망 1990년 8월 7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능묘 무릉(武陵)
재위 대한제국 제4대 황제
1955년 8월 16일 ~ 1980년 5월 31일
대한제국 태상황
1980년 6월 1일 ~ 1990년 8월 7일
[ 펼치기 · 접기 ]
본관 전주 이씨
연(衍)
부모 부황 혜조 의화제, 모후 연원황후
형제자매 3남 5녀 중 장남
배우자 수전황후
자녀 2남 1녀
학력 미국해군사관학교 (B.S.)
평남대학교 (정치외교학 / 석사)
종교 가톨릭(세례명: 세례자 요한)
신체 173cm
아명 성길(成吉)
사강(士岡)
염석(念石)
친왕호 건친왕(義親王)
묘호 무종(武宗)
시호 자인온유덕성순수황제
(慈仁溫裕德性純粹皇帝)
연호 흥영(興永)
절일 천추경절(千秋慶節)
군사 경력
임관 미국해군사관학교
복무 미합중국 해군
1929년 ~ 1945년
대한제국 국군
1945년 ~ 1980년
최종 계급 대령(미합중국 해군)
대원수(대한제국 국군)
참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
서울 진공 작전
경인공란
베트남 전쟁
한중전쟁

개요

무종 흥영제대한제국의 제4대 황제이다.

생애

1907년 당시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혜조 의화제의 장남으로 미국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황제 중 유일[1]하게 해외(미국)에서 태어난 황제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초중고교를 졸업했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로 임관하였다. 그 후 미군에 종군해 미해군 장교로서 태평양 전선에서 일본 제국군에 대항하는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태평양 전쟁 참전 이후 미국 OSS 요원으로도 참가하여 광복군과 함께 서울 진공 작전을 성공시켜 1945년 8월 20일 서울에서 조선 해방 선언을 발표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경인공란 당시에는 북한의 남침을 예상하고 대비하여 1950년 12월 25일 김일성 반군을 만주로 축출시키고 1951년 7월 27일에는 공산당 잔군까지 완전 토벌하여 북진통일을 완수하였다.

1955년 부황 혜조 의화제의 뒤를 이어 황제위에 즉위하나 총리였던 이승만과 권력다툼을 벌이게 된다. 1960년 이승만의 최측근 인사였던 이범석을 사주하여 친위 쿠데타인 경자정변을 일으켰으며, 입헌군주정을 전복시켜 친일파를 숙청한 뒤 중앙청에서 친정을 선언하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민족의 광복과 통일을 완수한 위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국민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친위 쿠테타를 했어도 오히려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었다.

친정을 선언한 뒤 한국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사실상의 전제군주제를 구축했고,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을 통한 산업화와 군비 증강을 주도하였다. 또한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고 한일기본조약 및 한일동맹을 주도했다. 그러나 경자혁명 당시 언론을 친황실 어용언론만 남기고 모두 폐간시킨데다 보도지침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묵살했고 야권 정치인을 탄압함과 동시에 각종 시위를 탄압하는 등의 반민주적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1976년 발생한 한중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대신 중국의 경인공란 참전 사실을 인정하고 백두산의 영유권과 수풍댐의 모든 전력, 장산군도를 한국이 영유하는 등 내용이 담긴 평화협정을 1976년 6월 25일 체결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핵무기 개발과 한일동맹을 두고 미국과의 갈등이 1970년대 후반이후 심화되었고 그뒤로도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기도 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김대중 복권 시위를 하던 전남대생을 경찰이 발포하여 사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광주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흥영제와 이범석 총리는 전남 경찰국장을 해임하며 끝내려 했으나 오히려 시민들은 내각의 사과를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였다. 결국 흥영제와 이범석 총리는 강경 진압으로 대응했으나 반작용으로 경신혁명이 발생하고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5월 27일 친정을 내려놓고 다시 권력을 민정에 이양한다는 선언을 하였다. 동시에 황위를 장남인 명덕제에게 양위하며 20년의 친정시대를 끝내고 생전퇴위했다.

생전퇴위 후로는 과거의 긍정적 평가를 독재로 다 까먹어서 부정적 평가가 심해진데다가 민주화이후 황실에 대한 비판도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에 독재자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래서 태상황이였지만 태상황다운 행보를 보이지도 못했다. 1990년 8월 7일 운현궁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후에는 비교적 공과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자는 움직임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김영삼 당시 총리는 이에 대해 공반과반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평가하기도 했었다.

기타

  1. 조선으로 확대하면 조선 현종이 중국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