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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2년 2월경, [[김이연]]은 2선의 끝을 준비하던 상태였다. 그는 2선의 끝을 맞이하기 전 에르난데즈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대한민국 남부 주둔군]]이라는 제31보병사단 소속 기지를 건설하였는데, 에르난데즈 주 정부의 심기는 무척 불편하였다. '''에르난데즈의 입장으로선 북부에 대한민국이라는 위험한 잠재적 적이 아예 자신들을 합병하려고 마음을 먹은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였기 때문이다.''' | 2032년 2월경, [[김이연]]은 2선의 끝을 준비하던 상태였다. 그는 2선의 끝을 맞이하기 전 에르난데즈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대한민국 남부 주둔군]]이라는 제31보병사단 소속 기지를 건설하였는데, 에르난데즈 주 정부의 심기는 무척 불편하였다. '''에르난데즈의 입장으로선 북부에 대한민국이라는 위험한 잠재적 적이 아예 자신들을 합병하려고 마음을 먹은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였기 때문이다.''' | ||
2월 19일, 김이연은 에르난데즈에 대한 합병을 국군 인사들과 논의하며, 계획을 하고 있었다. 김이연의 이 같은 합병 정책은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었다. 에르난데즈는 [[에조 공화국]]이나 [[일본 공화국]]을 견제하기 좋은 지역이기도 하며, 동시에 칼루로 가는 항구로도 우수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스페인의 동아시아로서의 세력 확장이 우려되는 와중이었으므로,<ref>[[일본 내전]]때부터 고베시를 일시적으로 4년간 점령하였으며, 중화민국에게 원저우와 타이저우의 할양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물론 결과는 중화민국의 거절.</ref> 진도를 합병해야 한다는 여론 또한 커지기도 하였고, 본인 또한 뜻이 그러하였다, 결과적으로 3월 2일을 D-day로 한 채 대한민국의 준비는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 2월 19일, 김이연은 에르난데즈에 대한 합병을 국군 인사들과 논의하며,전쟁 계획을 하고 있었다. 김이연의 이 같은 합병 정책은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었다. 에르난데즈는 [[에조 공화국]]이나 [[일본 공화국]]을 견제하기 좋은 지역이기도 하며, 동시에 칼루로 가는 항구로도 우수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스페인의 동아시아로서의 세력 확장이 우려되는 와중이었으므로,<ref>[[일본 내전]]때부터 고베시를 일시적으로 4년간 점령하였으며, 중화민국에게 원저우와 타이저우의 할양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물론 결과는 중화민국의 거절.</ref> 진도를 합병해야 한다는 여론 또한 커지기도 하였고, 본인 또한 뜻이 그러하였다, 결과적으로 3월 2일을 D-day로 한 채 대한민국의 준비는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 ||
그러나 군부 내에서도 이 전쟁에 의심을 가지는 장성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25보병사단의 [[유헌기]] 소장은 자신의 희고록인 [제25보병사단장, 유헌기]에서 이렇게 희고하였다. | 그러나 군부 내에서도 이 전쟁에 의심을 가지는 장성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25보병사단의 [[유헌기]] 소장은 자신의 희고록인 [제25보병사단장, 유헌기]에서 이렇게 희고하였다. |
2021년 1월 7일 (목) 17:12 판
1차 에르난데즈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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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스트 전투 당시 폐허가 된 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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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포르투갈 | 대한민국 | ||||||
지휘관 | |||||||
유진 마르코 초이 세오타크 엘로 리 펠리페 7세 호세 압스부르고 타이란놀 카스투야 곤살로 압스부르고 훌리오 스테파노 샤비 토레스 페르난도 보르본 미겔 고야 안토니우 데보시 메르반 코스카 루카스 마르또 카에타누 밀로시 에르난데즈 파견 사단 E군 사령관 |
김이연 이종성 정채준 채병수 박수희 박수염 마진천 유헌기 강횡수 이만주 정중표 설중도 범세준 소건위 해병대 제1사단장 | ||||||
병력 | |||||||
에르난데즈 수호군 |
제11공수특전여단 | ||||||
피해 규모 | |||||||
2만 9천명 |
10만 1천명 |
개요
1차 에르난데즈 전쟁은, 대한민국과 스페인 사이의 에르난데즈(진도) 영유권을 찾기 위해 일어났던 전쟁으로 2년 10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전쟁이다. 대한민국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였으며 앞으로 2131년까지 영유권 주장을 사실상 포기하게 된다.
배경
진도(에르난데즈)는 1898년 미서전쟁에서 패배하여 쿠바와 필리핀을 빼앗긴 스페인이 대한제국으로 부터 구입한 땅이였다. 진도(에르난데즈)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렇게 자연스러히 스페인어를 익히게 되었고, 스페인인들의 이주 또한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러 1910년 대한제국이 한일병합으로 멸망했을 때도 진도만은 스페인 영토로 규정되어 합병되지 않았다. 한편 조선총독부에서 토지 조사 사업을 시작하면 서 부터, 본토에 있는 민중들이 대거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가들 또한 진도로 많이 건너갔었는데. 인세진[1]등 독립운동의 주요 인사들이 많이 활동하였다. 그렇기에 이것이 눈엣가시였던 조선총독부는 1917년 에르난데즈 주 정부에게 부탁하였으나. 돌아온 대답은 아래와 같았다.
“ 에르난데즈는 평화의 장소다. 누굴 잡아가려는건 용납할수없다._ 호세 루옹(에르난데즈 8대 주지사)
”
이와 같은 대답에 조선총독부는 골치가 아플 수 밖에 없었고, 태평양 전쟁 당시에도 나치 독일의 동맹국 스페인 소속인 탓에 함부로 건드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1919년 1.24 광복 이후 독립한 대한민국 정부와 에르난데즈 주 정부는 항상 대립할 때가 많았다.
발발 전
2032년 2월경, 김이연은 2선의 끝을 준비하던 상태였다. 그는 2선의 끝을 맞이하기 전 에르난데즈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대한민국 남부 주둔군이라는 제31보병사단 소속 기지를 건설하였는데, 에르난데즈 주 정부의 심기는 무척 불편하였다. 에르난데즈의 입장으로선 북부에 대한민국이라는 위험한 잠재적 적이 아예 자신들을 합병하려고 마음을 먹은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였기 때문이다.
2월 19일, 김이연은 에르난데즈에 대한 합병을 국군 인사들과 논의하며,전쟁 계획을 하고 있었다. 김이연의 이 같은 합병 정책은 복잡한 사정이 얽혀있었다. 에르난데즈는 에조 공화국이나 일본 공화국을 견제하기 좋은 지역이기도 하며, 동시에 칼루로 가는 항구로도 우수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스페인의 동아시아로서의 세력 확장이 우려되는 와중이었으므로,[2] 진도를 합병해야 한다는 여론 또한 커지기도 하였고, 본인 또한 뜻이 그러하였다, 결과적으로 3월 2일을 D-day로 한 채 대한민국의 준비는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군부 내에서도 이 전쟁에 의심을 가지는 장성들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제25보병사단의 유헌기 소장은 자신의 희고록인 [제25보병사단장, 유헌기]에서 이렇게 희고하였다.
“ 이 작전의 승산성은 난 의심하고 있었다. 초반과 중반에 승승장구한다고 해도, 후반에 갑작스럽게 역전당하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이연 대통령의 야심은 충분히 이해가 가긴 하였지만, 나까지 거기에 휘말리게 된 건 뭔가 억울한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앞날은 장담할 수 없지만, 이 전쟁의 결과가 김이연 대통령 지지율에 영향을 줄 거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난 이 전쟁이 패배로 끝나면 이 군복을 벗을 거라 장담했었다... 그리고 결국 난 군복을 벗었다._ [제25보병사단장, 유헌기]
”
3월 1일, 모든 준비를 맞춘 김이연 정부는, 제3보병사단, 제12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제11기동사단, 제8기동사단 등을 남부 주둔군 기지로 내려보내었고, 3월 2일 새벽 3시 진도대교 코앞에 도착한다.. 그리고 새벽 3시 5분경 진도대교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는 동시에 대한민국 정부는 에르난데즈 주 정부에 선전포고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