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시오의 역사
あきしお史
История Акисио

아오나리몬의 변 (일본어: 藍成門の変 () 아오나리몬노 헨[*]) 혹은 아오나리몬 사변은 1912년 4월 12일 금요일 13시 경, 나카야마 성 (당대의 침례정사단 청사)의 아오나리몬에서 아키시오 제1공화국의 사절단이 암살당한 사건이다. 침례정사단은 이것을 아키시오 측의 조작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아키시오는 침례정사단 측이 자객을 시켜 사절단을 살해한 것이라고 여겨 이를 빌미삼아 채무 전쟁을 일으켜 침례정사단을 멸망시킨다.

배경

침례정사단 정변으로 카미가와 요시노부를 암살한 뒤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침례정사단은, 요시노부의 어린 손자 카미가와 카즈나리를 표면 상의 쇼군으로 옹립하고 수상직을 만들어 집단 지도 체제를 이어갔다. 문제는 이들이 카미가와 요시노부만큼 국가를 꾸려갈 능력이 전무한, 막말로 서양 학문에 심취한 침례교 동아리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력을 잡기 위해 침례정사단의 아카이 마루노리 (赤井丸則)[1], 우나즈 타카이치 (宇奈津高市)를 비롯한 요인들은 이케다 철검대와 메이지 정부를 찾아가 "혁명을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원하는대로 해드릴 테니 돈 좀 빌려주세요!" 라고 사정해 엄청난 채무를 받아냈다. [2] 그렇게 해서 빌려온 돈을 침례정사단원들이 개인적인 일에 썼다는 사관이 여태까지는 팽배했지만, 사실은 일제와 아키시오에서 침례정사단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만든 낭설. 미국과 영국에서 신무기를 도입해 군대를 개편하고 정치, 경제, 문화에 걸쳐 여러 제도를 미국식으로 개선하는데 돈을 사용했더. 물론 무이타 시게키요 (六田繁淸) 같은 이들은 개인적인 용도로 일부를 횡령해가기도 하였으며, 무이타 같은 이들이 판을 친 것도 침례정사단 정권이 몰락하는데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토지 개혁과 통화 개혁, 소베 항 개항으로 어느 정도 수입이 차오르면서 재정이 안정화되자, 당시 수상 아카이 마루노리는 30년에 걸쳐 채무를 상환하는 계획을 수립한다. 실제로 효과가 없던건 아니라서 일단 1892년까지 메이지 정부로부터 빌렸던 2만 5천 엔 (円)을 모두 상환하였다. 이것은 이자까지 합쳐서 갚은 것인데 쌀 한가마니가 5엔이던 시대였다. 그러나 철검대에 빌린 빚 10만 엔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일본에 진 빚을 갚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찼으므로[3] 1955년까지 천천히 분납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철검대는 애초에 빚을 빌미로 신페이 제도를 집어삼킬 계획을 세워놨기 때문에[4]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10만 엔이라는 거금을 빌려준 것이었으므로 1955년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거야 일단 철검대의 채권을 승계한 아키시오 제1공화국 정부는 침례정사단의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대신 당초 연간 1할 5푼의 이자를 더 치는 조건에서 연간 4할 (=연이율 40%)이자를 치는 것으로 바꾸기를 강요하였다. 1910년에 들어서는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침례정사단은 아키시오에 35만 엔에 이르는 채무를 지게 된다.

연간 4할을 18년 동안 했을 뿐인데 10만 엔이 어떻게 35만 엔이 되냐고? 걱정마시라. 다 방법이 있다. [5]

경과

금요일에 만나요

참고 문헌

  • 《침례정사단의 숨겨진 얼굴》, 형태만, 2010년.

각주

  1. 마루노리는 "둥그런 김"(..)이라는 뜻이다. 침례정사단원들은 가명을 만들어 사용했다. 본명은 불명.
  2. 아키마타 료타로(秋侯凉太郎)의 소설인 《해당화의 나라 일어나다》 (1959년)에서는 아카이 마루노리가 도게자를 하며 철검대장에게 애원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는 아키시오 최초의 신문이었던 국영 공화신보의 보도 (1873년 10월 16일자)를 각색한 것이다.
  3. 당시 침례정사단의 세율은 66%에 이르렀다. (1890년) 힘들게 벌면 반 이상을 뜯어가는 상황이었으므로 국민들의 조세저항이 엄청났다!
  4. 흑막 이 계획의 최초 입안자는 히라무네 유타카 (平棟 豊)로, 초대 국립은행장과 아키시오 재무성 장관을 지냈다.
  5. 담당관을 매수해 장부를 조작해서 이자를 두번 쳐서 올리거나 1년치를 한달치로 바꿔 올렸다. 애초에 빚으로 말려죽일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