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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외지1945-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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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의 외지
광동
広東[1]
Japanese ruling Gwangdong
국기[2] 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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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19일 ~ 1990년 3월 13일[3]
도쿄 조약 이전 독립 이후
중화민국
광둥성
광동국
상징
국가
기미가요(君が代)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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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광동 점령 1938년 9월 7일
도쿄 조약, 공식 양도 1945년 10월 19일
광동 폭동, 광동군정총감 시대 1964년 9월 12일
계엄령 해제 1967년 5월 7일
광동 주가 조작 사건 1971년 3월 8일
광동 의회 설립 1973년 8월 19일
광동 노동쟁의 1976년 10월 10일 ~ 1976년 12월 12일
마츠시타 투신자살 사건 1979년 7월 26일
피의 크리스마스 1984년 12월 25일
광동 철수 및 독립 1990년 3월 13일

지리
면적
218,982 km²
위치
중국 대륙 광동
수부
코슈부(広州府)[4]
접경국
난징 정권
인문환경
공용어
일본어, 광둥어(사실상)
인구
53,217,556명(1988년)[5]
공용 문자
가나 문자, 한자(사실상)
종교
국가신토, 불교, 도교, 기독교 등
정치
국가원수
천황 (天皇)
정부 수반
총독
정치 체제
입헌군주제 (1945년 ~ 1964년)
군정(1964년 ~ 1967년)
입헌군주제(1967년 ~ 1990년)
연호
쇼와 (1945년 ~ 1989년)
헤이세이 (1989년 ~ 1990년)
주요 총독
하타 슌로쿠(1945년 ~ 1950년)[6]
나가노 시게토(1964년 ~ 1968년)
이토 마사요시 (1971년 ~ 1976년)
아베 신타로 (1986년 ~ 1990년)[7]
경제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통화
광동 엔(円)[8]
▲ 1977년(쇼와 52년), 수부 코슈부의 야경 (아메마루마치)
▲ 1980년(쇼와 55년), 홍콩부의 야경[9]
▲ 1985년(쇼와 60년), 코슈부의 야경 (쇼와마치)[10]

개요

제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일본도쿄 조약을 통해 중국의 광동성과 산동성을 전리품으로 할양받으면서 중국 광동 지역에 형성되어 1945년부터 1990년까지 45년간 광동을 지배한 외지(外地). 일본에서는 일본통치시대의 광동(日本統治時代の広東), 광동에서는 일본시대(日本時代)로 칭한다. 물론 실질적으로는 1938년부터 52년간 통치하였다.

상세

일본어로 부르는 명칭은 칸톤(かんとん)이었다. 이 지역은 과거부터도 매우 경제력이 높은 곳이었고 일본은 이 지역의 코슈, 홍콩, 마카오 3개 도시를 "남방의 세 진주(南方の三真珠)라고 부를 정도로 애지중지했다.

광동은 일본의 외지 중 가장 GDP가 높았고 그 가치가 최고급이었다. 이때문에 일본은 만주에 이어 광동을 새로운 공업 거점으로 검토하였고 곧 자이바츠들이 진출해 앞다투어 광동의 자본을 나눠먹었다.

이 때문에 광동은 "기업국가 실험장"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코슈, 홍콩, 마카오 도시의 찬란한 경관과는 별개로, 이러한 부는 일본인과 주진(珠人)이라고 불리는 자이바츠에 붙어 부자가 된 광동인들이 차지했으며, 대다수 노동자의 삶은 궁핍했다.

도시의 급격한 팽창에 적응하지 못해 교외로 밀려난 빈민들은 과거 일본의 하층민 부라쿠민에서 따온 도라쿠민(都寨民)으로 불렸으며 도라쿠(都寨)는 도시 내에서 근대화가 되지 못하고 빈민이 밀집한 지역의 총칭이었다. 일본이 지은 공업지대는 공해를 내뿜었고 공업지대 외곽에는 폐수들이 흘러내려 주강으로 흘러갔다.

이렇듯 개인의 삶의 질은 낮았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기에 광동은 번영하는 지역이었다.

일본은 광동에 광동총독부(広東総督府)를 설치하여 통치했으며, 도(道)를 설치하고 코슈, 홍콩, 마카오를 부(府)로 지정했고 코슈를 광동의 수부로 삼았다. 이는 조센의 식민지 시기를 모방했던 것이었다.

45년간 일본 통치를 겪었다가, 1989년 아시아 혁명에 따른 대일본제국 붕괴 이후 광동국으로 독립하였다.

역사

성립

제국의 실험장

남방의 세 진주

야스다 위기와 광동 폭동. 계엄령 시대

다시 한번 남방의 진주로

광란의 80년대

종료와 몰락

행정구역

광동은 도부제(道府制)를 실시했다. 최상의 행정구역은 도(道)였고 도 휘하에는 시와 군을 설치했다. 이로 인해 광동의 중국식 행정구역은 사실상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도(道)는 21개를 설치했다.

그리고 주요 도시에는 부(府)를 설치하였다. 다만 부 역시도 도의 산하 행정구역이었다. 부 휘하에는 구(区)를 설치했다. 즉 현재 일본으로 친다면 정령지정도시보다 다소 높은 등급 정도라고 할수 있었다. 1946년 도부제 시행 시엔 코슈부(広州府), 홍콩부(香港府), 마카오부(真顔府)를 두었다. 이중 총독부 청사가 소재한 것은 코슈부였다.

1954년에 산두(汕頭), 동관(東莞)을 부로 승격하여 산토부(府深圳)와 도칸부(東莞府)를 추가로 설치하여 5부 체제가 되었고, 1966년에는 추가로 선전(深圳) 및 한구(海口)를 부로 승격해 신센부(深圳府)와 카이코부(海口府)를 설치함으로서 최종 7부 체제를 완성했다.

기초 행정구역은 일본 본토의 시정촌제를 그대로 이식하였다. 정으로 따진 당시 광동 최대 번화가는 코슈부 텐카구(현 텐허구)에 위치했던 아메마루마치. (현 텐위안정)

1990년 해방 시에는 21도 7부 143시 82군 체제에 있었다. 현재 광동국의 행정구역도 부가 도에서 독립해 명칭이 직할시로 변경되고 코슈(광저우)는 특별시가 된것 이외엔 거의 그대로 사용 중이다. 심지어 일본식 시정촌도 그대로 쓴다.

교육

광동도 여느 중국과 같이 당시 문맹률이 매우 높았다. 이에 일본은 광동교육령(1946)을 통해 광동에 의무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광동인도 대일본제국 국적이 부여되었기에 교육권이 있었던 것. 국어는 일본어였으나 광동어도 필수 과목으로 포함해 공용어와 생활어의 이원화하는 교육을 기본으로 했다. 일단 기본적인 방향성은 점진적 동화로 잡았고, 황국신민 교육이 진행되었다.

본토와 같이 소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과정을 실시했다. 의무교육은 소학교 6년이었다. 실질적으로는 당시 광동인들이 소학교 졸업 후 중학교에 진학하기도 버거운 경우가 많았고, 소학교 -> 중학교 진학률이 그리 높지 못했다. 1960년대에 총독부가 중학교 학비를 내린 뒤로는 중학교 진학까진 패시브가 되었으나, 해방 시까지 고등학교 교육 100% 보급은 실패했다. 본토는 일찍이 중학교도 의무교육에 편입되고 고등학교 100% 진학을 달성했으나 교육에서만은 광동인에게 기회가 적었던 셈이다.

대학은 영국이 홍콩에 세워놓은 홍콩대학을 홍콩제국대학으로 개편하고, 코슈부에 코슈제국대학을 설립하여 2개의 국립대학을 개설했다. 이 외에 사립 대학도 총독부의 승인을 받으면 4년제 교육을 할수 있었으나 대부분은 전문학교에서 승격되지 못했다.

본토로의 대학 입학에 대해서는 어떤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입시 시험이 본토와 다른 시험으로 총독부에서 주도하는 전용 시험을 치렀으며, 이를 토대로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게이조제국대학, 와세다대학, 메이지대학 등 본토 대학에 본고사를 치러 진학할수 있었다. 이 시기 광동인으로서 도쿄제대 석박사도 꽤나 많은 수가 배출됐다.

문맹률은 1960년대 중반경 0% 수준을 달성했다.

역대 총독


대일본제국 광동 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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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동 총독은 당시 권력과 위상이 매우 높았다. 조선의 식민지시절보다 더 큰 알짜배기 식민지인 광동의 총독직은 총리직 직행코스로 여겨질 정도였다. 실질적으로 총리에 이어 2인자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었고, 사토 에이사쿠,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다케시타 노보루까지 무려 3명이 광동 총독을 거쳐 총리까지 갔다.

초대 하타 슌로쿠와 2대 고모토 다이사쿠의 1945-1953년은 무관 총독이 임명됐으나, 1953년엔 전 내무대신 오다치 시게오가 부임했으며 1959년엔 자이바츠의 영향력이 커져 자이바츠인 스즈키 데이이치가 총독이 됐다. 하지만 1964년 광동 폭동 이후 광동에 들이닥친 육군에 의해 67년까지 군정기를 겪고, 나가노 시케토 대장이 그대로 68년까지 총독에 재임했다. 하지만 이후 해군의 항의로 인해 광동을 영지로 만들려던 육군의 계획이 실패하고 문민총독을 임명하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11]

평가

오늘날 광동에서 일본시대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으며, 이 시절에 대한 향수가 주요 로망으로 다뤄지는 정도이다. 비록 일본의 이익을 위함이었다지만 광동은 일본에 의해 산업화와 근대화의 시기를 겪었으며, 의무교육이 보급되어 "남방의 진주"라는 명성에 걸맞는 번영을 누렸다. 겉으로 보기에 코슈와 도쿄 사이에는 위화감이 없다고 할 정도로 발전되었었다.

본래 중국에 속할 당시엔 남쪽의 그저 그런 지방 중 하나였던 광동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집중적인 투자를 받아 빛을 봤던 것이다. 물론 광동의 팽창에 대한 부는 일본인과 주진들에게 집중된 측면이 있었으나, 당연히 광동인들도 국민당 정권기에 비해 삶의 질이 크게 향상된 것은 확실했다.

일본은 광동을 남방의 병참기지이자 요충지로서 영구병합하려 시도했고, 각종 동화정책을 실시해 일본어 교육과 광동인의 공무원 임용 자유화, 지원병제 시행 등의 시책을 펼쳤다. 광동인들 역시 이에 충실히 따라 일본 총독부 당국과 현지인의 관계는 대단히 우호적이었다. 광동의 일본 경찰 40%는 현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74년부터는 창씨개명을 허용하여 1990년 당시 광동인의 90%가 일본식으로 이름을 쓰고 있었다. 민주주의도 나름대로 돌아가 1972년 제국 자유화 조치 이후 1973년부터 외지에 의회가 설립되며 광동 의회가 열렸다.

그러나 1989년 대일본제국 붕괴로 인하여 일본이 1990년 3월 광동을 포기해버리면서 일본시대는 일순간에 끝났다. 이때 일본 식민당국이 모두 빠져나가자 광동은 그야말로 공백 상황에 들어섰으며, 정치적으로 환란, 치안의 붕괴, 자이바츠 철수로 인한 경제블록 붕괴 등 여러모로 일본시대보다 생활이 크게 후퇴했다. 일본시대에 대한 향수가 더욱 커지게 된건 해방 후의 혼란 때문이다.

또한 일본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중국은 광동을 되찾아야 할 자신들 고유의 영토로 취급해 군사적 압박을 가하자 안보적으로도 일본의 보호를 받던 시절보다 매우 취약해졌다. 이에 따라 일본시대엔 실시하지 않던 징병제도 실시해야만 했다.

45년간의 동화 정책으로 광동인들은 더이상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기지 않았고, 최소한 광동인으로 정의하거나 상당수는 일본을 조국으로 여겼다. 독립 당시 10대에서 20대 중반 정도까지는 일본어만 할줄 알고 광동어엔 서투른 경우가 많았다. 즉 일본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던 이들에게 있어서 독립은 조국과의 이별이었고, 그 상실감은 일본에 대한 향수로 이어졌다.

이러한 이유는 오늘날 광동국이 매우 친일적인 국가가 된 원인이 되었다. 심지어 골수 일본인의 성향을 가진 일부 노인들은 조국기억회(祖国記憶会)라는 것을 만들어서 자신들끼리 일본식으로 생활하는 커뮤니티를 창설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여기서 조국이란 당연히 일본을 의미한다. 이 외에 일본군에 자원입대해 복무했던 노인들은 일본육군동지회(日本陸軍同志会), 해군전우회(海軍戦友会) 등을 창립해 일본군 시절을 추억하기도 한다.

광동인들은 아예 일본을 조국으로 여기는 부류가 국민의 상당수를 차지하여 "광동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 확립조차 성립이 안되는 지경이다. 해방 시 95%에 이르던 일본어 구사율은 현재도 80%에 육박한다. 이 때문에 차라리 일본과 다시 합방해야 한다는 말도 나오는 지경. "독립하지 않았으면 오늘날 제국의회 의원을 뽑고 있을것이다."라는 식의 푸념도 들리는듯 하다.

여담으로, 정작 일본시대 당시에는 나름 반발이 있는 편이었다. 야스다 위기로 인한 1964년 광동 폭동이 대표적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노동자들의 임금 문제로 인해 터진 것들이 많았다. 1984년 피의 크리스마스는 일본시대의 명암을 명확히 보여준다는 평. 이때문에 결국엔 2등 지나인일 뿐이었다는 회의론도 적지는 않다.

  1. 1947 - 1972 구자체: 廣東
  2. 따로 광동을 상징하는 깃발은 없었고 본토의 일장기(히노마루)가 쓰였다.
  3. 45년.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최소한 50년간 통치했다. 일본군이 광동성 전역을 차지한 것이 1940년, 광저우와 하이난 섬은 1938년에 차지했기 때문이다.
  4. 현 광동국 광저우.
  5. 일본인 포함.
  6. 초대
  7. 말대
  8. 지폐만 광동은행이 발행하였으며, 동전은 일본은행이 발행한 내지의 것을 그대로 통용했다.
  9. 당시 본토의 경제도 매우 잘나가던 시절이었으며 광란의 80년대를 상징하는 사진.
  10. 해방 5년 전으로, 말기로 접어들수록 침체된 모습이 인상적이다.
  11. 광동인들에게는 매우 다행이 아닐수 없었다. 나가노가 철권을 휘두르던 4년간은 광동은 하나의 거대한 닭장이나 다를바 없을 정도로 기혹한 통제가 이뤄졌다. 해군이 보다 못해 나서 바로잡은 것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