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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헌정 국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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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군사반란
三一五軍事反亂
Coup d'état of March fifteenth
Statskupp femtende mars
[ 쿠데타 요약도 | 펼치기 · 접기 ]
기간
2020년 3월 15일 오후 8시 ~ 9시
장소
노르웨이 왕국 오슬로시 전역
유토 공화국 제1군단 주둔지
원인
윌리엄 바를 향한 정치적 공세
윌리엄 바의 권력욕 및 정국 주도권 상실에 대한 불안
충돌 세력
노르웨이 왕국 내각 윌리엄 바
보수당 세력 일부
결과
윌리엄 바 영구 추방
윌리엄 바의 유토 망명
영향
마크롱의 정계 은퇴
보수당 해체
노르웨이 토착 정치세력 와해

개요

새로운 국왕 전하께서 즉위하시고 난 뒤, 3ㆍ15 군사 반란 등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으나, 우리 노르웨이 국민은 정의와 자유의 정신으로 반정부군을 심판하였고...

노르웨이 헌법 전문

2020년 3월 15일 윌리엄 바가 일으킨 반란이다. 정식 명칭은 3.15 군사반란이나 위키는 표제어상 알기 쉽도록 반란군의 수괴의 이름을 따 윌리엄 바 반란이라 한다.

전개

배경

윌리엄 바는 노르웨이 극 초기 시절부터 합류하였으며, 2020년 2월 24일에는 오슬로 시장에 취임하여, 꽤 적극적인 시정활동을 펼쳤다.

2020년 3월 13일, 최초의 민선 지방선거가 열리던 시기, 차기 시장직을 얻고자 했던 윌리엄 바민주참여당을 탈당하고 보수당에 입당한다는 입장을 밝히자, 이승배[1]가 앞장서서 '민주참여당 당원이었던 시절에도 보수당의 당적을 갖고 있던 '이중당적자'였다는 주장을 근거로 윌리엄 바를 '정당법' 위반으로 고소하였다. 비록 얼마안가 고소는 취하했으나, 당시는 지방선거 기간으로 보수당과 민주참여당의 양자구도였던지라 파급력은 엄청났다. 고소를 취하한 민주참여당이승배는 방향을 틀어, 정치적 공세를 몰아붙이기 시작하였고, 얼마안가 마크롱 총리의 성명을 통해 윌리엄 바는 시장직에서 면직되었다.

이중당적 의혹에 대한 윌리엄 바 공식 입장 윌리엄 바의 시장직 면직 소식

시정활동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윌리엄 바에게 면직은 매우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윌리엄 바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복직 시켜줄 것을 공개적으로 호소하고 마크롱 총리에게 개인적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대영인들이 정치공세에 합류하여 더더욱 그를 몰아붙이며 사태는 더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현 상황에 회의감을 느끼던 마크롱 총리가 사임하고 이승배가 임시 총리로 임명[2]되면서 그의 복직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마크롱 총리에게 공개적으로 호소하는 윌리엄 바

발발

결국 처절한 호소를 이어오던 윌리엄 바는 안으로는 보수당 주요 인사를 포섭하려 시도하고, 밖으로는 유토 세력의 지원을 앞세워 쿠데타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총리실은 행정안전부의 탱크 동원에 대해 국방부 또한 이에 적극 가담했다고 판단하여, 보수당 소속인 오토 루게 국방부장관을 즉각 경질하고 긴급체포령을 선포하였으며, 계엄령을 선포한다. 결국 노르웨이 왕실전자정부관리실의 개입으로 윌리엄 바오토 루게를 비롯한 주도 세력 일당이 노르웨이에서 추방되면서 사태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탱크 투입을 지시하는 윌리엄 바 현황을 브리핑하는 윌리엄 바

유토의 개입 부정

3월 15일 당시 유토 황제인 좀비는 전자정부관리실윌리엄 바를 국가내란의 죄목으로 추방한다는 공포문에 'UTO는 쿠데타에 군사지원을 약속한 사실이 없음'이라며 못박았고, 유토와 이 반란은 관계 없는 사실이라며 노르웨이 국내에 떠들석한 유토개입론, 유토책임론 등의 관련 주장을 일축했다.

당시 전자정부관리실장이였던 이사미 국왕이승배 총리윌리엄 바에 대한 유토 내 처벌을 촉구했으나, 유토는 무응답의 기조를 계속해서 유지했고 노르웨이 내각이 여러 차례 이와 관련한 서신을 보냈으나 유토 내에서 노르웨이인들이 추방당하면서 노르웨이와 유토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자세한 내용은 참고.

유토의 개입이 없었다는 좀비의 공식 입장 / 이에 처벌을 촉구하는 모습

평가

사태 직후, 대영인들에 의해 장악된 정치권은 윌리엄 바와 유토를 강하게 질타하며, 오토 루게를 비롯한 보수당에 대해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마크롱 총리 사임 이후 안그래도 하락세를 걷고있던 보수당은 결국 해체수순을 밟게되었다.

심지어 동년 11월 8월 발생한 노르웨이 주권수호운동 당시에도 하우겐 국왕은 윌리엄 바의 쿠데타는 분명한 국가와 왕실에 대한 반란이며 재해석의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관련문서


  1. 당시 민주참여당 소속
  2. 당시 국왕이었던 하랄 5세가 임명. 결국 이 선택이 사태를 파멸로 몰아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