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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양국간 평화조약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상항 및 하와이에 대해 미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긴장상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본은 태평양 전체와 상항까지를 할양한 아카기 조약의 영토에서 한 뼘의 땅도 내줄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기에 협상은 진전되지 못했다.
그렇게 양국간 평화조약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상항 및 하와이에 대해 미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긴장상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본은 태평양 전체와 상항까지를 할양한 아카기 조약의 영토에서 한 뼘의 땅도 내줄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기에 협상은 진전되지 못했다.
그러나 1989년 [[대동아공영권 붕괴]]가 일어나고 일본의 입장이 예전만 못하게 되면서 상황에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일본의 새롭게 집권한 보수 본류파, [[가네무라 슌에이]]를 위시한 세력은 미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이 서방과의 관계개선으로의 첫걸음으로 판단했기에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미국에게 평화조약 체결을 다시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가네무라 내각 및 이어진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이어간 끝에, 1996년 일미 평화조약의 대강이 정해졌다. 상항과 일부 태평양 제도는 반환하되 하와이는 독립시켜서 양국의 완충지대로 두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되었다. 하와이를 포기한 것에 대하여 군부에서 반발이 나와 [[1996년 육군 쿠데타 모의 사건]]이라는 굴곡도 있었으나 조약은 최종 합의를 향해갔다.
그리고 1997년 2월, 터키의 앙카라에서 만난 미국과 일본 측 대표는 공동성명문을 작성하고 최종 조약문에 날인함으로서 '''일미태평양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1960년 이카기 조약 파기 이후 37년 만에 양국간 종전이 이루어졌다.


== 구조약 전문 ==
== 구조약 전문 ==

2024년 5월 15일 (수) 19:00 판

Destiny634, 2024 - | CC-0


日米間太平洋平和に関する条約
Treaty on Pacific Peace between the U.S. and Japan

개요

일미태평양평화조약(日米太平洋平和条約), 정식 명칭 일미간 태평양평화에 관한 조약(日米間太平洋平和に関する条約)은 1997년 2월 12일 미국일본 간에 체결된 조약이다. 이는 1960년 아카기 조약 파기 이래 이어져온 일본과 미국의 적대관계를 약 40년 만에 공식적으로 청산하였다.

경제 위기에 놓인 일본이 사실상 미국을 상대로 냉전에서의 총체적 패배를 인정했다는 의의로서 진정한 의미의 냉전 종식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일본은 이 조약으로 하와이를 독립시켰고, 1945년 아카기 조약으로 성립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 조약항, 그리고 하와이를 기준으로 하여 그 동쪽의 태평양 제도들을 미국으로 반환했다.

그 대가로 일본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비밀군사정보보호협정 등을 얻어내 일단 중요한 파트너국 중 하나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양국은 여러 부문에서 대립하는 상태에 있기는 하다.

배경

제2차 세계대전을 추축국의 승리로 종결시킨 아카기 조약은 1960년 이를 굴욕 조약이라고 주장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서 파기되었다. 이로서 미일 간의 2차 세계대전 종전은 1960년을 기점으로 무효화 되었으며, 1960년부터 1997년까지 37년간 명목상 미국과 일본은 언제든 전쟁이 가능한 휴전 상태에 놓여 있던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다.

이는 미국 정계에도, 일본 정계에도 상당한 부담이 되는 일이었으며 아카기 조약의 재정산과 평화조약 체결은 냉전기간 내내 양국의 숙원사업이었다. 하지만 평화조약 체결에 대해 일본은 아카기 조약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미국은 불평등조약은 맺을 수 없다고 맞서며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특히 일본의 국력이 강력했던 60년대 후반-70년대에 이르고, 1974년 후쿠다 다케오 내각 하의 일본이 아예 아카기 조약 원안고수를 들고 나오면서(후쿠다 원칙) 일미 양국간 관계는 완전히 얼어붙는다. 사실 아카기 조약 재정산을 원했던 것은 일본 내의 대정익찬회 중도파와 진보파 측이었고, 주도권을 쥐고 있던 익찬회 보수파와 군부는 오히려 미국과의 휴전 상태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좋아서 개선 의지가 없었다.

그렇게 양국간 평화조약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상항 및 하와이에 대해 미국이 영유권을 주장하며 무력시위를 벌이는 등 긴장상태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본은 태평양 전체와 상항까지를 할양한 아카기 조약의 영토에서 한 뼘의 땅도 내줄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기에 협상은 진전되지 못했다.

그러나 1989년 대동아공영권 붕괴가 일어나고 일본의 입장이 예전만 못하게 되면서 상황에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일본의 새롭게 집권한 보수 본류파, 가네무라 슌에이를 위시한 세력은 미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이 서방과의 관계개선으로의 첫걸음으로 판단했기에 이전까지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미국에게 평화조약 체결을 다시 제안하게 된다.

그렇게 가네무라 내각 및 이어진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미국과의 협의를 이어간 끝에, 1996년 일미 평화조약의 대강이 정해졌다. 상항과 일부 태평양 제도는 반환하되 하와이는 독립시켜서 양국의 완충지대로 두는 안이 유력하게 검토되었다. 하와이를 포기한 것에 대하여 군부에서 반발이 나와 1996년 육군 쿠데타 모의 사건이라는 굴곡도 있었으나 조약은 최종 합의를 향해갔다.

그리고 1997년 2월, 터키의 앙카라에서 만난 미국과 일본 측 대표는 공동성명문을 작성하고 최종 조약문에 날인함으로서 일미태평양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서 1960년 이카기 조약 파기 이후 37년 만에 양국간 종전이 이루어졌다.

구조약 전문

서문
미합중국과 대일본제국은 1930년대 이래로 양국 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하여 깊이 상호의 책임에 대해 통감하고, 오늘에 이르러 상호간의 우호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공감을 이루었다.


이제 양국은 이 조약을 통하여 더욱 건설적인 상호 협력국의 관계로 나아갈 것이며, 또한 양국은 향후 다시 과거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상호의 우의를 더욱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우정으로서 다질 것이다.

이에 미합중국과 대일본제국 양국은 향후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의 평화를 호지하기를 간절히 희망하는 마음에서 1997년 2월 12일 이와 같이 미일간 태평양 평화에 관한 조약을 체결한다.


조항

제1조 미합중국과 대일본제국은 향후의 상호간 우호를 위하는 차원에서 1945년 8월 15일 당시 대일본제국 항공모함 아카기에서 체결된 미일간 태평양전쟁 종전 조약을 파기함을 확인한다. 다만 조약을 파기하되 일부 조항에 대하여는 참조한다.

제2조 대일본제국은 현재 통치하고 있는 하와이가 독립하도록 허가한다. 하와이 국가는 상호 영세중립국으로 두기로 하며 양국은 개입하지 않는다. 국가의 설립 과정에서 하와이 주민들은 2년의 기간을 두고 하와이를 퇴거하여 미합중국과 대일본제국 중 하나의 국적을 택일할수 있으나, 1999년 3월 12일까지 퇴거하지 않을 경우 새롭게 창설될 하와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간주한다. 대일본제국에 본적을 둔 일본국 국적자는 조건없이 대일본제국으로 귀환한다.

제3조 양국은 향후의 특별한 우호관계를 위하여 태평양 제도의 영유권을 전면 재협상하기로 한다. 대체적인 양국 태평양 경계 협상의 대전제는 하와이를 중심으로 하여 그 서부에 위치한 제도들을 대일본제국이, 그 동부를 미합중국이 통치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경계는 추후 양국이 조사단을 파견하여 확정한다. 미합중국에 양도되는 태평양 제도 지역의거주자 중 본적을 대일본제국에 둔 대일본제국 국적자는 조건없이 일본국으로 귀환하며, 본적이 해당 지역인 자는 미합중국 시민권을 부여한다.

제4조 대일본제국이 아카기 조약을 통하여 조차한 미합중국 내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 항구 조차지는 미합중국으로 반환된다. 다만 주민의 의사를 고려하여, 이 지역에 거주하는 자들 중 미합중국 귀속을 원하지 않는 경우 2년을 기한으로 퇴거할수 있으며, 퇴거 시 대일본제국 국적을 희망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대일본제국 국적이 부여된다. 1999년 3월 12일까지 퇴거하지 않을 경우 미합중국 시민권자로 간주한다.

제5조 대일본제국이 아카기 조약을 통해 미합중국으로부터 획득한 얄류샨 열도, 현재 대일본제국 얄류샨 총독부를 미합중국으로 반환한다.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거주자들은 2년을 기한으로 미합중국과 대일본제국의 국적을 선택할수 있다. 다만 대일본제국에 본적을 가진 대일본제국 국적자는 조건없이 대일본제국으로 귀환한다.

제6조 양국은 향후 상호 안보상의 군사정보를 긴밀히 공유한다. 이는 양국이 상호간의 군사적 협력까지도 점진적으로 추진할 것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추후 협정이 체결될 것이며, 이를 가칭 일미비밀군사정보보호협정으로 한다. 협정은 본 조약 발효 후 1년 내로 체결한다.

제7조 미합중국은 대일본제국의 영토 할양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충분한 배상금을 달러로 지급한다. 이 규모는 대략 120억 달러로 하며 금을 기준으로 한다.

제8조 미합중국과 대일본제국은 양국간의 우호를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추후 자유무역협정(FTA)를 체결하기로 한다. 이 자유무역은 양국이 자유 시장경제의 체제 하에서 원활한 무역을 진행하고 상호간의 긍정적 효과를 기대하기 위함이다. 협정은 본 조약 발효 후 1년 내로 체결한다.

제9조 미합중국은 이 조약을 통해 이미 충분한 이익을 얻었음을 인정하고, 국가 차원에서 태평양 전쟁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을 포기한다. 또한 아카기 조약에서 미합중국이 당시 대일본제국에 지급한 배상금에 대하여도 미합중국은 이것이 엄연한 조약의 일부임을 인정하며 환원을 요구하지 않는다.

제10조 본 조약은 체결로부터 30일 후인 1997년 3월 12일부터 그 효력이 발효된다.


1997년(헤이세이 9년) 2월 12일

미합중국을 위하여
대일본제국 외무대신 가네무라 코유

대일본제국 천황 폐하를 위하여
미합중국 국무장관 워런 미노어 크리스토퍼


반응

일본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매우 분노했다. 국민들은 태평양 제도의 절반 및 샌프란시스코를 미국으로 반환하고, 심지어 요충지인 하와이를 독립시킨 이 조약에 대하여 "대미 굴욕조약"이라며 강력히 반발했으며 오부치 게이조 내각은 지지율이 6%로 폭락해버리기도 했다.

1997년 3월 1일부터 일본 전역에서 조약 취소와 총리 사임을 요구하는 반미투쟁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대동아성전의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으로 통해 얻어낸 보석과도 같은 태평양을 적국인 미국에 내주고, 그 대가라는 것이 소위 "전략적 파트너"라는 미 속국화에 불과하다고 격앙되었다.

일본인들은 이미 수십년간 냉전의 한 축으로 초강대국 국밈으로서 살아온 터에 변화된 현실, 특히 정부의 미국에 대한 굴복을 받아들이지 못하며 이것이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졌다.

욱일기를 들고 행진하는 도쿄의 반미투쟁 시위대
게이조시청 앞에서 벌어지는 반미투쟁

본래 총리를 옹호하던 일본자유당도 점점 여론이 악화하자 사임을 촉구했으며, 천황도 간접적으로 총리가 사임해야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1997년 3월 25일 오부치가 반미투쟁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으나 조약은 끝내 물려지지 않았다.

다만 후임을 맡게 된 모리 요시로 신임 총리는 일본내의 여론을 어느정도 감안하여 하와이 공화국의 중립화 조항을 삭제[1]하는 것으로 조약을 약간 개정하기는 했다. 사실상 반미투쟁의 핵심이 하와이 중립화였기에 이 부분에선 새 정부와 미국 모두 물러섰던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을 제외한 다른 조항에 대해서 양보는 없었고, 사실 반미투쟁 자체가 오부치 퇴진 운동으로 변질되었던지라 오부치가 사임한 상황에서 시위는 사그라 들어갔으며 조약의 잉크는 그대로 굳어졌다.

이후 오부치의 총리직은 하시모토 류타로가 이어받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여당 일본자유당의 지지도가 폭락하면서 5월 벌어진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대참패했으며 입헌민정당이 제1당이 된다.

그러나 민정당도 혁신계를 모두 합해봐야 보수가 더 많아 내각 구성이 불가능한 상황에 자유당이 일본국민당에 보수연대를 제안하여 6월 22일 자유-국민-공명 연립내각을 구성해 국민당의 모리 요시로를 총리로 지명, 동년 8월 20일 자유당과 국민당이 합당해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어 현재의 정치지형을 만들기도 한 사건이다.

다만, 현재에 이르러 이 조약은 미국과의 적대적 관계 종료라는 큰 이점을 일본에 가져온지라 재평가되고 있는 추세이다. 어떻게 보면 1941년의 미국 영토를 모두 토해내지 않은것만 해도 선방한 협정이었다. 특히 하와이가 미국에 넘어가지 않고 친일국가로 독립한데다 괌 등을 일본 영유로 유지했다.

파기론

일미조약 파기론은 주로 일본 내 강경파, 자세히는 자민당의 보수방류 세력에서 아베 신조의 집권을 계기로 등장하기 시작한 국가주의, 민족주의적 담론이다. 이들은 1945년의 아카기 조약은 정당한 승전의 대가였고, 이것을 재정산하는데 동의한 오부치 게이조 등은 매국노라고 주장, 즉시 조약을 파기하고 하와이의 일본 복귀를 추진하며 심지어 상항 재점령을 주장한다.

  1. 즉 친일국가화가 가능하도록 하는것. 당시 하와이에는 일본 자본이 매우 컸기에 중립화를 해제한다면 친일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