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중전쟁 발발 직전, 양국 전력 비교

리반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2월 26일 (화) 15:19 판 (새 문서: {{동아합중국 타이틀}} 해당 문서는 동중전쟁(東中戰爭) 이전 동아제국(東亞帝國)과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聯合政府)의 전...)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해당 문서는 동중전쟁(東中戰爭) 이전 동아제국(東亞帝國)과 중화민국 연합정부(中華民國聯合政府)의 전력을 비교하는 문서다.

전쟁 이전 동아제국의 상황

당시 동아제국(東亞帝國)은 중화민국 연합정부와의 전쟁 외에도 대소련(對蘇聯), 대미(對美), 대영(對英)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군비를 증강시키고 있었다. 또한 동아제국은 1936년 6월, 「제국국방방침(帝國國防方針)」, 「국방소요전력(國防所要戰力)」, 「용병강령(用兵綱領)」을 개정하였으며 이를 통해 속전속결을 위주로 하여 작전 초기의 위력을 강력하게 발휘할 것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만약 동아제국을 중국을 비롯하여 미합중국(美合衆國)과 소련(蘇聯)과 추가적인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동아제국이 갖추고 있는 국력만으로는 장기전을 이끌어가지 못할 것이라 계산했기 때문이다.

이에 동아제국 군부(東亞帝國軍府)는 강대국들과의 장기전 수행을 위해 1936년 8월, 「국방대강(國防大綱)」을 제정하여 국방준비의 확충을 우선순위로 두고 군사공업투자를 대량으로 증가시켰다. 그 결과, 1938년 동아제국의 군사공업투자는 22.3억 위안(分)으로 1936년에 비해 대략 2.7배 증가했는데, 이는 당시 공업생산 총 투자액의 65.8%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또한 1932년부터 1938년까지 동아제국의 공업생산은 평균 성장률 10.7%로 급속도로 증가함에 따라 1938년에는 동아제국의 공업 총생산액이 65억 달러($)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동아제국 총 국민경제의 대략 75%를 차지하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공업생산의 투자로 당시 동아제국의 무기 및 장비 연간 생산 능력은 항공기 1,600여 대를 비롯하여 대구경화포 780문, 전차 350대, 차량 9,700대 수준이었으며, 조선(造船) 능력은 5만 3천 여 톤이었다. 그리고 보병 개인화기와 소구경화포 등의 생산능력은 대규모 전쟁 시의 필요한 수요량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다. 또한 동아제국은 대규모의 군사공업투자와 군비를 동시에 증가시켰다. 1938년도 동아제국 육군 예산은 7억 8천만 위안, 해군은 7억 1천만 위안으로 동아제국 정부 전체예산의 50%에 달하였다. 이러한 동아제국의 군사 공업의 발전과 대량의 군비 투자는 동아제국 군사력의 질적·양적 수준의 발전으르 아주 빠르게 진행시킬 수 있었다. 또한 동아제국을 구성하는 구성국들과 식민지를 비롯한 해외 무역 경로를 통해 상당한 양의 자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전쟁 이전 중화민국의 상황

한편, 중국은 당시 4억 2,000만 명에 이르는 인구와 900만 ㎢에 달하는 엄청난 국토 면적을 소유하여 동아제국보다 인구 및 영토 면에서 몇 배의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중국의 자원은 대부분 개발되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개발된 지역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산업은 수공업이 주를 이루고 있어 1938년 공업생산은 외자 기업 생산량을 포함하여 중국 경제의 10% 안팎에 불과했고, 공업 총생산량은 13.5억 달러에 불과했다.

중국의 무기 생산능력은 겨우 보병의 개인화기 및 중화기, 소구경 정도의 화포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이었으며, 전차와 차량 등의 생산능력은 보유하지 못했다. 함정과 항공기는 일부 소량 생산할 수 있었으나, 부품은 대부분 외국 수입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은 천연자원이 풍부하였지만 산업 시설이 극도로 미비하였고, 특히 군수산업부문에서 경무기를 제조할 수 있는 부분 이외에 비행기, 전차, 화포, 차량 등은 완전히 수입에만 의존해야 했다. 동중전쟁(東中戰爭) 직전 중국과 동아제국의 국력은 개량적으로 비교하면, 국토와 인구 면에서만 중국이 동아제국을 앞설 뿐 공업능력이나 주요 무기 생산수준에서는 중국이 크게 뒤떨어졌다.

전쟁 직전 동아제국군의 군사력

전쟁 직전, 동아제국 육군은 17개 상비사단[1], 4개 혼성여단, 4개 기병여단, 5개 포병여단, 3개 전차연대 등 총 4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속별로는 동북관군(東北關軍), 한국군(韓國軍), 만주군(滿洲軍)을 비롯해 타이완-류큐 주둔군(台灣-琉球駐屯軍)까지 구분되어 있었다 동원능력 면에서는 동아제국은 징병제를 실시하여, 총동원 가능한 병력은 현역병을 포함해 497만여 명이었고, 실제 전투가용병력은 이 중 제1보충역과 제2보충역을 제외한 190여만 명 정도였다.

동아제국 해군은 주력함(主力艦) 9척(27.2만 톤), 항공모함(航空母艦) 4척(6.9만 톤), 순양함(巡洋艦) 33척(21.5만 톤), 구축함(驅逐艦) 102척(12.6만 톤)을 포함하여 총 280여 척으로, 배수량은 116만 톤이었다. 이 외에 건조중이었던 주력함 및 항공모함 4척, 순양함 4척, 구축함 12척 등이 있었다. 이러한 해군력은 당시 미국, 영국에 이어 세계 3위였다. 이 중 중국 방명늘 담당한 것은 제4함대였다. 제4함대는 제1차 상하이 사변(第一次上海事變) 당시에 조직되어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중국 연해와 장강 유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예하에 제12전대, 제14전대, 제21수뢰전대 및 상하이 해병상륙대가 있었다.

동아제국은 공군이 별도의 군종으로 분류되지 않고 항공부대들은 육군과 해군 예하에 각각 소속되어 있었는데, 육군과 해군을 합한 총 1,600여 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쟁 직전 중화민국의 군사력

한편, 중국 육군은 총 170개 사단(師團), 45개의 독립여단(獨立旅團), 기병 6개 사단(師團) 및 6개의 독립기병여단(獨立騎兵旅團), 포병 4개 사단(師團) 및 20여 개의 독립단(獨立團)과 특수 병종 부대로 구성되어 총 병력은 200여만 명이었다. 그러나 지방군은 명목상 중앙 정부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지만, 실제 부대의 지휘 권한은 지방의 실력자 혹은 군벌들에게 있었고, 이들 부대들은 개편된 국민당군(國民黨軍)과 비교할 때 질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동원 제도는 징병제와 모병제를 혼합한 형태였으나 징병제는 시작되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며, 특히 군대의 군수보급과 인원보충 등의 각 방면에서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중국 해군은 총 5개 함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중 해군부 직할의 제1함대(총 12척, 배수량 1만 7천 톤), 제2함대(총 19척, 배수량 1만 톤), 연습(練習)함대(총 2척, 배수량 4천 톤), 순방함(총 14척, 4천 톤)을 포함하여 전체 직속해군함대 배수량은 대략 4만 여톤이었다. 제3함대는 총 14척의 함정으로 배수량은 1만 4,700톤 이었으며, 제4함대(광동강방, 廣東江防)은 총 24척으로 배수량 8천 톤이었다. 그 밖에 전뢰학교(電雷學校) 등에서 보유한 함정의 총 배수량은 2,000톤 이었다. 전쟁 발발 전 중국의 해군 함정은 총 120여 척으로 배수량은 총 6만여 톤이었다. 이러한 중국의 해군력은 배수량 116만여 톤인 동아제국 해군과 비교하면 고작 1/19밖에 되질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중국 함정들은 오래되었기에 전투력 수준이 낮았을 뿐 아니라, 배수량이 작아 원해(遠海) 작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중국 공군은 3개 폭격대대, 3개 구축대대, 2개 정찰대대, 1개 공격대대로 총 9개 대대 예하에 26개의 중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대대 이외에 직속 5개 중대 및 4개 수송대를 추가적으로 보유했다. 전쟁 발잘 전에 중국 공군은 전국에 총 600여 대의 항공기가 있었으며, 주요 비행장 12곳을 포함하여 전국에 총 262개의 비행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양성된 조종사는 대략 3천 명에 달했다.

각주

  1. 1936년, 협화 시대(協和時代) 선언 이전까지 합중병단(合衆兵端)이 사단 편제의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