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본제국 (우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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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정상화와 [[대동아연맹]] 설립 ===
=== 외교 정상화와 [[대동아연맹]] 설립 ===
1942년 소련과의 협상으로 성공적으로 북진 정책을 종료한 일본은 현상 판도 유지와 괴뢰국의 대일본 합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의 괴뢰국으로는 만주국, 몽골, 몽강, 투바, 극동 시베리아 공화국, 부랴트가 있었는데, 이 국가들을 전부 자국의 영토로 만드는 것을 추진한 것이다. 주민투표에 따라 만주국이 1944년 총 93.5%의 투표율이 71.1%의 찬성으로 대일본제국에 합병되었고 이후 1945년에는 몽골, 몽강, 투바, 부랴트가 각각 86.4%, 83.3%, 71.2%, 78.4%의 찬성으로 대일본제국에 합병되었다.


== 지리 ==
== 지리 ==

2022년 1월 22일 (토) 01:46 판

대일본제국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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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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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본제국
大日本帝國 | Empire of Japan
국기 국장
八宏一宇 萬族協華 尊皇討奸
팔굉일우 만족협화 존황토간
상징
국가 기미가요 ( (きみ) ())
국화 벚꽃, 국화
국수 일본 꿩
역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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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데이쿄 (帝京)
북위 37° 34′ 00″ 동경 126° 58′ 41″
최대 도시 도쿄 (東京)
북위 35° 41′ 22.4″ 동경 139° 41′ 30.2″
면적 5,814,552.4km2 | 세계 7위
접경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중화민국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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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2억 9,244만명 | 세계 3위
밀도 50.29명/km2
출산율 1.9명 (1983년)
기대수명 75세 (1983년)
민족 내지인 44.1%
만주계 23.4%
조선계 14.3%
화계 10.3%
몽골계 2.9%
러시아계 2.0%
기타 2.0%
공용어 일본어
공용 문자 가나, 한자
종교 국교 없음 (정교 분리)
분포 불교 51.2%
기독교 3.6%
기타 종교 2.2%
무종교 43.0%
군대 대일본제국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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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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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혼합 경제
GDP
(PPP)
$7조 4,297억 7,600만 | 세계 1위 (1984년)
1인당 $25,400
GDP
(명목)
$4조 1,526억 4,800만 | 세계 2위 (1984년)
1인당 $14,200
수출
입액
수출 $3,445억 6,000만 | 세계 1위 (1984년)
수입 $3,146억 7,600만 | 세계 2위 (1984년)
외환보유액 $1조 6,780억 3,100만 (1982년)
신용등급 무디스 Aa2
S&P A-
Fitch AA-
화폐 공식 화폐 일본 엔(¥, 円)
ISO 4217 JPY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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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쇼와(昭和)
시간대 GMT+07:00~09:00(일본 표준시)
운전 방향 좌측통행
도량형 SI 단위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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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가입 국제연맹 가입: 1920년
국제연맹 탈퇴: 1933년
국제연합 재가입: 1951년
대동아연맹 가입 1953년 (창립국)
ccTLD
.jp
국가 코드
JPN, EJP, JP, 382
위치

개요

대일본제국(일본어: 大日本帝國 (だい にっぽん ていこく) 다이닛폰데이코쿠[*]), 줄여서 일본(일본어: 日本 (にっぽん))은 동아시아에 위치한 입헌군주제 국가이다. 수도는 데이쿄이며 최대 도시는 도쿄이다. 국가 원수인 천황은 히로히토, 정부 수반인 국무경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이다.

본래 일본은 일본 열도에 국한된 섬나라였으나, 1868년 대정봉환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동아시아에서 가장 일찍 근대화되었고 이후 비서구권의 최초이자 유일한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여 조선, 대만, 만주 등을 합병하며 그 영토를 넓혔다. 현재와 같은 영토를 지니게 된 것은 1943년 극동사변을 통해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시베리아 지역의 주권을 인정받은 이후이다.

메이지 유신 자체가 무신들의 주도로 일어난만큼 국가 초기에는 군국주의적인 면이 강했으나, 1913년 내지는 1918년부터 진행된 다이쇼 데모크라시를 통하여 근대적인 의원내각제 민주주의 국가로 발돋움하였다.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치안유지법 등이 발동되면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시대적인 배경과 전시 준비 체제로 인하여 국가가 불안정해졌으나, 이에 반발하는 청년 장교들이 주도한 1936년의 2.26 혁명을 시작으로 쇼와 유신이 진행되어 현재와 같은 체제가 정착하였다.

1984년 현재 기준으로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군사력, 외교적 영향력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소련, 미국과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이다. 1953년 UN에 재가입한 이후 1960년 상임이사국이 되었으며, 유엔에 가입한 것과 같은 해에 자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들의 국제 정치, 군사, 경제적 연합인 대동아연맹을 설립하여 현재까지 의장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상징

국호

일본의 공식적인 국호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다. 그러나 대일본제국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940년대이며, 그 이전에는 대일본국(大日本國), 일본국(日本國), 일본제국(日本帝國), 대일본(大日本) 등의 일관되지 않은 표현들이 서류 상으로 사용되었다. 쇼와 유신이 이뤄진 이후, 초대 국무경으로 취임한 기타 잇키가 이를 시정하고자 공식적인 국호를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정하고 국제적인 조약 및 서류에서 사용하도록 함으로서 현재와 같은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다.

약칭으로는 일본(日本)과 일본제국(日本帝國)이 주로 사용된다. 일본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전인 아스카 시대에는 왜국(倭國)이 공식적인 명칭이었으며, 701년의 다이호 율령 반포 당시 왜국의 명칭이 일본으로 바뀌었다. 그 외에는 야마토(大和)라는 명칭도 대중적으로 널리 쓰이는 일본의 별칭(別稱)이다.

국제적으로는 일본국(日本國)의 중국식 발음이었던 지펀구를 마르코 폴로가 라틴 문자로 옮긴 Zipangu가 Japan이라는 단어로 변형되어 보통 일본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일본 측의 공식적인 명칭은 Empire of Japan이며, 드물게 Empire of Great Japan 혹은 Greater Japanese Empire라는 표현도 사용된다.

국기

대일본제국의 법정 국기
일장기 | 히노마루
日章旗 | 日の丸
빨간색 (#AA4455) 하얀색 (#FFFFFF)

일본의 공식적인 국기인 일장기(日章旗)는 일본 민족의 상징으로서 수천년간 사용되어온 깃발이었다. 공식적인 국기로 채택된 것은 메이지 3년(1870년) 2월 27일의 일이다. 하지만 가마쿠라 시대 때부터 일장기와 디자인이 유사한 니시키노미하타가 사용되어왔기 때문에 일본을 상징하는 요소로서 일장기가 사용되어온 기간은 가늠할 수 없이 길다. 공식적인 명칭인 일장기보다도 히노마루(日の丸)라는 별명으로 더 자주 불리는 깃발이다.

속 일본기에 따르면, 701년 몬무 덴노가 태양을 나타낸 깃발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 역사상 최초로 태양 상징 깃발을 사용한 사례이지만, 흰색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는 아니었다. 다만 바탕에 원 하나라는 디자인은 고대나 현대에나 같았고, 이 깃발은 일본의 조정을 상징하는 깃발로서 사용되었다. 늦어도 16세기 이전에는 빨간색 동그라미에 하얀 바탕이 디자인이 되는 현대 모양의 일장기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에도 시대 때부터 상선에 흰 바탕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려넣은 상징을 사용하게 되면서 일장기는 국제적으로 일본을 상징하는 국기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욱일기 역시 일장기와 마찬가지로 국가적인 상징으로 사용되지만, 공식적인 국기는 아니며 군기(軍旗)로 사용된다. 하지만 욱일기 역시 일장기에 못지 않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국기에 준하는 대접을 받고 있다.

국가


(きみ) () (임금의 치세)

일본의 국가는 <기미가요>이다. <기미가요>는 국가치고 분위기가 매우 어두우며, 단 11마디의 단가로만 되어있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적인 요소가 들어가있는 것도 특징이다.

기미가요는 가사가 먼저 나왔고 곡은 나중에 붙었다. 912년 편찬된 <고금 와카집>에 익명의 단가로 처음 등장하였는데, 이후 여러 문헌에 수록되며 장수를 기원하는 노래로써 신분에 관계없이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랑받았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이뤄진 이후, 일본에는 자국을 상징할만한 국가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프란츠 에케르트가 기미가요에 현재의 곡조를 붙여 곡을 완성하였다. 20세기 들어 기미가요는 천황을 기리는 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기 시작했다.

<기미가요> 이외에도 <바다에 가면>(海行かば) 역시 국가에 준하는 지위를 가지고 군가(軍歌) 및 준국가로서 사용된다. 이 노래는 비교적 늦은 1937년 작곡되었으며, 쇼와 유신극동사변이라는 국내외적인 정세에 맞춰 준국가로 사용되어졌다.

역사

쇼와 유신

2.26 혁명 당시 혁명군의 깃발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이뤄진 이래 많은 사회적인 부분에서의 개혁이 있었으나, 근대 자본주의의 도입 과정으로 인하여 오히려 지주권이 강화되었고 이는 소작농의 증가를 불러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1920년대의 간토 대지진, 쇼와대공황 등 여러가지 경제난으로 인해 일본 농촌의 경제 사정은 악화되어갔으나 일본의 주요 정치인들과 군장성들은 이를 무시하고 거대 재벌들의 이권을 수호하는데 앞장섰다.

이러한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1937년 2월 26일, 빈농 출신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로 구성된 쿠데타군이 궐기하여, 사이토 마코토 등 군정재계의 유력 인사들을 암살하고 히로히토 천황의 인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하였으니 이를 2.26 혁명이라고 부른다. 1937년 3월 2일 일본 신정부는 쇼와 친정 체제였으나 실질적으로 기타 잇키가 실권을 가지고 신정부를 이끌었다. 기타 잇키는 쇼와 유신의 명목 아래에 의회를 해산하고 기존의 내각제를 해체, 내각총리대신의 이름을 국무경으로 바꾸고, 재벌 기업들을 해체하며 보통 선거권을 시행하는 등의 각종 파천황적 개혁들을 추진하였다. 또한 조선과 대만의 참정권을 인정하였고, 사회주의적인 개혁을 통하여 일본의 경제 체제를 개편하였다.

1938년 6월 1일, 기존의 대일본제국 헌법을 수정한 헌법이 시행됨에 따라 내각총리대신제도는 폐지되고, 화족과 귀족원도 폐지되었으며 그 자리를 각각 국무경과 참의원이 대체하였다. 중의원의 의석 역시 종전의 466석에서 600석으로 증가했고 초대 참의원 선거도 개편된 중의원 선거와 함께 치뤄졌다. 기타 잇키와 이시와라 간지 등의 유신 인사들이 창당한 유신제국당이 전체 600석중 522석을 차지해 초압승하였고 초대 국무경으로 기타 잇키가 취임하게 되었다.

극동사변

2.26 혁명 이전까지는 일본 육군 내 파벌중 지소 반미 반중파였던 통제파가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새로이 집권한 황도파는 반소 친중 지미파였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을 견제하려던 기존의 일본 육군과는 달리 소련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급한 혁명 이후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공산주의자, 식민지 독립론자들도 기승을 부렸기 때문에 이들을 탄압할 적절한 명분 역시 필요했고 이 때문에 신생 일본 정부는 소련을 공격하고 국민적인 결속을 추구하고 소련의 대 동아시아 영향력을 항구적으로 차단하고자 하였다.

1938년 1월 7일, 신징 조약을 통하여 일본은 내몽골 및 만주국에 대한 문제에서 중화민국 정부에 양해를 구해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대신 일본제국이 향후 15년간 내전으로 폐허가 된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할 것과, 공산당 세력을 분쇄하는데 군사적 힘을 지원할 것임을 약속하는 등 중화민국에 유리한 내용도 많았다. 아무튼간에 중화민국과 대일본제국의 동맹 협상을 통하여 대소련 및 공산당 공동 전선을 펼 수 있었고 1939년 말엽 공산당 세력을 중국 본토에서 쫓아내는데에도 성공하였다.

연해주로 진격하는 일중 연합군

그리고 1940년 2월 12일, 대일본제국과 중화민국의 연합군은 러시아의 패권주의적인 세력 팽창을 저지하기 위하여 소련을 공격함을 선언하였고, 그렇게 중국-일본 연합군과 소련의 전쟁인 극동사변이 발발하였다. 극동사변 당시 일본군과 중국군은 보급에서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던데다가 소련 측의 전쟁 준비가 미비하였으므로 단숨에 바이칼 호수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의 막대한 공업력을 통해 소련은 1940년 9월 재반격에 나섰고 1940년 11월 캄차카 상륙 작전에서 일본군 1만 8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대참패를 겪는다.

그러나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급습하며 상황은 반전되었다. 히틀러는 전선이 양분된 상태에서 쉽게 소련을 점령할 수 있다고 믿었고, 이미 인구 수에서만 3배의 차이가 났던 중국-일본 동맹을 상대하기 버거워했던 소련은 결국 대독일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억지로 일본-중국 동맹군과 평화 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1942년 1월, 이르쿠츠크 조약을 통하여 중화민국은 소련에게 빼앗겼던 위구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회복하였고 일본은 극동 시베리아 지역과 몽골, 투바, 부랴트 지역의 영유권을 획득했다. 이 조약을 체결하는 대신, 일본과 중화민국은 20년간 소련을 침공하기 않으며 소련에 유상으로 전쟁 물자를 공급하기로 하였다.

외교 정상화와 대동아연맹 설립

1942년 소련과의 협상으로 성공적으로 북진 정책을 종료한 일본은 현상 판도 유지와 괴뢰국의 대일본 합병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의 괴뢰국으로는 만주국, 몽골, 몽강, 투바, 극동 시베리아 공화국, 부랴트가 있었는데, 이 국가들을 전부 자국의 영토로 만드는 것을 추진한 것이다. 주민투표에 따라 만주국이 1944년 총 93.5%의 투표율이 71.1%의 찬성으로 대일본제국에 합병되었고 이후 1945년에는 몽골, 몽강, 투바, 부랴트가 각각 86.4%, 83.3%, 71.2%, 78.4%의 찬성으로 대일본제국에 합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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