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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9일 (화) 08:18 판
동중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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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의 태평양 전쟁[1]의 일부 | |||||||
시계 방향으로 가스마스크를 착용한 IEN 소속 해군 상륙대의 상하이 전투, 1946년 대륙타통작전 당시 활용된 1식 중기관총, 난징 대학살 당시 친화이 강에 놓인 희생자들과 제국 군인, 우한 전투 당시 중화민국군의 기관총 진지, 충칭 대공습, 1944년 인도, 중화민국의 X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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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연합국: 중화민국 연합정부 |
대동아공영권: 동아제국 | ||||||
해외 지원국 일본 해외정부 (1945-) 비시 프랑스 (1943-1945) 프랑스 제4공화국 (1945-) |
동아 협력국 몽강제국 (1939-) 신강왕국 (1939-) 왕징웨이 정권 (1942-) 중화소비에트공화국(-1942) 대동항군자치정부 (1940-) 중화민국 연성정부 (-1942) 중화민국 유신정부 (-1942) | ||||||
지휘관 | |||||||
장제스 |
아이신기오로 푸이 | ||||||
병력 | |||||||
8,700,000여 명 미 항공기 1300대 (1945-1951) |
1,984,000 명 부역자 980,000여 명 전차 3,000대 항공기 12,000대 이상 | ||||||
피해 규모 | |||||||
3,720,000여 명 전사 1,956,000여 명 부상 민간인 사상자 및 피난민 23,000,000명 |
455,000-700,000여 명 전사 1,172,200여 명 부상 총합계 150-200만명 사상 |
동중전쟁(중국어: 東中戰爭)은 1939년 7월 7일 동아제국(東亞帝國)의 중국 대륙 침략으로 시작되어 1951년 제2차 세계 대전(第二次世界大戰)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중화민국과 동아제국 사이의 대규모 전쟁이다. 중화권 국가에서는 중국 항동 전쟁(중국어: 中國抗東戰爭), 일본국(日本國)에서는 지나 사변(シナ事變)[2], 서구권에서는 중국-동아시아 전쟁(Sino-East Asia War)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동중전쟁은 20세기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1933년 이후로 두 나라 사이에 간헐적으로 교전이 있었으나, 전면전은 1939년 이후로 시작되었으며, 동아제국의 연합국(聯合國)에 대한 항복과 함께 1951년 9월 2일에 종료되었다. 전쟁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 온 동아제국의 제국주의(帝國主義) 정책의 결과였으며, 원료와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을 정치·군사적으로 지배하려는 속셈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민족주의(民族主義)와 연성자결주의(聯省自決主義)는 전쟁을 중화민국의 승리로 이끌었다. 1939년 이전에는 양쪽이 다양한 이유로 소규모, 국지적 전투를 벌였다. 1933년 9월 18일,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은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켰고, 그 연장에서 일어난 1939년의 루거우차오 사건(중국어: 盧溝橋事件, 한국어: 노구교 사건)으로 두 나라 간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의 기간에는 중국이 단독으로 동아제국에 맞섰으며 진주만 공습 이후 동중 전쟁은 더 큰 규모의 제2차 세계 대전에 포함되었다. 이후 동아제국군의 전력은 급속히 쇠퇴했고 1949년 즈음에 동아제국은 이른바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을 개시하면서 반격을 꾀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951년 8월 15일의 황제, 아이신기오로 푸이(愛新覺羅溥儀)와 이강(李堈)이 연합군에게 발표한 무조건 항복 선언과 같은 해 9월 2일 연합국에 대한 동아제국의 항복 문서 조인식을 끝으로 동중전쟁 역시 종결되었다. 사상자는 2000만명이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