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보기 도움말: 데스크톱, 크롬, 제이위키 벡터 스킨 베이스 | 제작: Ernst | 프로젝트: Project 1988 | 모집: 사용자토론 | 세계관: 크리크 & 빌레
오슬로 봉기 (1989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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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구의 일부의 일부 | |||||||
오슬로 봉기 당시 저항군의 참호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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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 |||||||
GETO : 우폴벤 독일 |
NATO : 노르웨이 지하국 영국 왕립 국외 정부 | ||||||
지휘관 | |||||||
부르크하르트 폰 팔켄하우젠 랄프 디트리히 요하네스 바이스 |
욘 비르켈란 스테펜 온사게르 스톨레 이베르센 안드레 숄세르 디앤드리 체임벌린 | ||||||
군대 | |||||||
병력 | |||||||
독일: 5개 사단 1,761개의 대포 74대의 전차 67,226명의 병사 |
노르웨이: 전체: 5개 사단 222개의 대포 3대의 전차 178,982명의 병사 | ||||||
피해 규모 | |||||||
민간인: 223명 사망 및 실종 138+명 부상 |
민간인: 152,651+명 사망 및 실종 |
오슬로 봉기(노르웨이어: Oslo oppstanden, 영어: Oslo uprising, 독일어: Oslo aufstand)는 제3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슬로를 우폴벤 독일에게서 해방시키기 위해 영국 왕립 국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노르웨이 지하국가 휘하의 오슬로 저항군이 일으킨 일제 봉기이다. 당시 영국 왕립 국외 정부, 과들루프 프랑스, 미합중국의 연합군이 우폴벤 독일의 치하에 놓은 노르웨이의 서해안에 상륙하던 것과 시기를 같이했다. 그러나 북대서양 조약군은 회네포스 코앞에서 독일군에 의해 진격이 저지되었고, 그 사이 독일군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폴란드 봉기군을 진압했다. 봉기를 시작한 이래 28일동안 오슬로는 독일군의 잔혹한 진압 아래 파괴되었다. 바르샤바 봉기는 제3차 세계 대전 저항운동사에서 첫 대규모 군사행동이다.
봉기는 1989년 1월 8일 시작되었다. 노르웨이 지하국은 북대서양 조약군이 오슬로로 진격중이던 것(킹피셔 작전)과 보조를 맞추어 노르웨이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키려 계획했으며, 오슬로 봉기는 이 상위 계획의 일부였다. 노르웨이 저항운동가들의 목표는 우선 첫째로 독일 점령군을 도시에서 몰아내어 독일이라는 거악에 맞서는 싸움에 힘을 보태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르웨이로 통하는 관문인 오슬로를 장악하여 적의 보급을 방해하고 지원군의 노르웨이 전역 참여를 지연시킴으로써 킹피셔 작전의 일부로써 작용되기를 기대했고 나아가 노르웨이의 해방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였다.
봉기 초기 단계에서 오슬로 저항군과 영국 왕립 국외 정부의 특수작전군은 오슬로 중심가 대부분을 점령, 해방구로 삼는 데 성공했다. 이에 호응하여 북대서양 조약군은 저항군들의 오슬로 장악 소식을 듣고 오슬로로의 진격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윽고 독일의 후방 예비군과 폴란드인 사이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1월 15일 영국군 휘하의 제4침투연대가 바다를 통해 오슬로로 증원 되었다. 이 뿐 아니라 곳곳에서 노르웨이인들이 오슬로 봉기군에 가담했고 연합군이 가까워질수록 연합군 해군항공대와 공군으로부터 더 많은 보급품과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오슬로 봉기 때 발생한 사상자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오슬로 저항군 중 65,000 여명이 죽고 11,000 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 노르웨이 민간인이 150,000 ~ 200,000 명 죽었으며, 대부분이 독일 공군의 폭격에 의한 희생자였다. 독일군 사상자는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해서 12,000 명 이상이고 부상자는 32,000 여명이었다. 오슬로 봉기의 주도세력인 노르웨이 저항군과 지하국은 봉기 실패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배경
1988년, 공산주의 진영으로부터의 압력으로부터 무능했던 노르웨이 정부에 의해 평화적으로 노르웨이는 독일에 병합되었다. 합병 발표가 있었던 날부터 계속해서 시민들은 비폭력 시위를 하였으며, 무능한 정부 대신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정부로 노르웨이 지하정부이 수립되었고 이들에 의해 노르웨이 지하국이 미국에서 건국되었다. 이들은 그 아래에 무장 독립 세력을 양성하였는데 그 부대가 바로 노르웨이 저항군이다. 이들은 꾸준히 국내로 무기를 포함한 물자를 이송했으며 가끔씩은 독일 군사 창고를 급습하여 전차나 견인포와 같은 군병기를 탈취하였다. 또한, 이들은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일원으로 인정받아 연합국과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독립의 기회를 노렸다.
이에 1989년, 미영프 연합군이 노르웨이 서해안에 상륙하는 킹피셔 작전 시행을 확실히 하자 이에 맞추어 눈보라 작전이란 이름의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봉기를 준비하였다. 이를 조금은 눈치 챈 독일군은 독일 북부와 덴마크, 스웨덴에 주둔 중인 여러 군대를 노르웨이의 주요도시인 베르겐과 오슬로 사이로 이동시켰다. 독일 해군도 1989년부터 해안지역에 대규모 기뢰를 매설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뿐 아니라1988년에는 80만 명이었던 노르웨이 주둔군의 수가 1989년이 되어서는 170만 명으로 증강되고 있었다.
자세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작전 시행일을 합의한 연합군은 1월 7일 킹피셔 작전으로 교두보가 확보되었을 때, 눈보라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 노르웨이군 총사령관인 욘 비르켈란 장군은 오슬로와 베르겐 그리고 스웨덴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을 중점으로 봉기를 계획하고 민병들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지난 합병 때에 무장해제된 노르웨이군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월 7일, 오슬로에 상륙한 영국 제2침투연대를 포함하여 약 15만 명의 저항 세력이 오슬로로 모였다.
봉기 개시
1월 7일 베르겐을 처음으로하여 대규모 상륙작전인 킹피셔 작전이 시행되었다. 이후 오전 7시에 연합군은 베르겐에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30분 뒤에는 헤우게순, 스타방에르 마지막으로 오전 8시에 트론헤임을 확보함을 확인한 알렉산더 스펜서 영국 총사령관은 오전 8시 13분 욘 비르켈란 노르웨이 총사령관에 눈보라 작전 지시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은 북쪽의 트롬쇠와 스테인셰르을 시작으로 뢰로스와 같은 글롬마 강 곳곳의 도시에서 마지막으로는 오슬로와 릴레스트룀에서 봉기가 시작되었다. 오슬로에서 봉기가 시작된 시점은 오전 11시 30분 즈음이었다. 이로서 계획대로 독일군의 육상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하는 것에 성공하였고 북부지역은 손쉽게 도시를 점령할 수 있었다.
오슬로 저항군 15만 명 중 선봉 유격대 3만 명은 9개의 구획으로 나누어둔 활동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켜서 치안군을 수적으로 제압하였고, 본격적으로 봉기가 시작된 1월 8일에는 이미 노르웨이 왕궁, 병원, 공장, 발전소, 관공서, 요새와 기차역과 같은 주요 시설을 점령하였으며, 외부로 통하는 지하철 터널은 미리 준비한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막거나 바리케이트를 세웠다. 지상에서도 정오에 이르러서는 공원에는 참호들이 세워지고 도로에는 바리케이트가 즐비하게 되었다. 오슬로 중앙 기차역과 노르웨이 왕궁, 오슬로 시청에는 방공포대가 세워졌으며 지하철역은 지휘소로 변하였다. 오후에는 잔존한 독일 치안군이 규합하여 중앙 기차역을 공격하여 총격전이 있었고 이로 인해 치안군 50 여명과 봉기군 68명이 전사했다. 오후 9시, 영국군으로부터 공수받은 보급품을 오슬로 가르데르모엔 국제공항에서 오슬로 봉기군에 보급하였다.
1월 9일, 노르웨이 저항군은 오슬로의 시가지를 완전히 요새화하였다. 이날, 도이치 국방군 사령부(MKD)는 스웨덴에 주둔 중인 67,000 여명의 후방 예비대를 오슬로로 이동시켜 포위된 독일군의 퇴로를 확보하며 빠른 지원이 가능하도록 계획했다. 연합군은 오전 9시와 11시에 각각 플롬과 노토덴, 리우칸의 독일 방어선을 타개하는데 성공했다. 오슬로 저항군은 1월 14일까지 오슬로와 그 광역권에서 가장 넓은 작전반경과 활동능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진압
도이치 국방군 사령부(MKD)가 예상한 일자보다는 조금 늦은 1월 14일 저녁 5시에 독일 후방 예비대 소속의 5개의 사단이 릴레스트룀에 도착했고 봉기 진압이 시작되었다. 봉기 진압 담당자였던 랄프 디트리히 장군은 최대한 민간인 피해를 줄이기를 원했으며 항공지원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정이 되기 직전에 릴레스트룀을 완전히 장악했다. 릴레스트룀을 장악한 뒤, 랄프 디트리히 장군은 부르크하르트 폰 팔켄하우젠 북유럽 총사령관의 오슬로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그들의 진군이 멈춘 사이, 오슬로 저항군은 마지막일지 모르는 보급품을 공항에서 가져와 릴레스트룀 북부의 다리를 건너 오슬로로 진입했다. 독일군이 릴레스트룀에 주둔한다는 것을 알게된 봉기군은 즉시 연합군에 전보를 보내었고 연합군은 항공 지원과 증원을 약속하였다.
1월 15일 새벽 6시부터 영국군 제4침투연대가 오슬로 항구에 상륙하면서 봉기군의 병력은 총 17만 여명이 되었다. 또한, 그들이 가져온 보급품은 모두 지하 시설로 옮겨져 보관되어 봉기 기간 내내 큰 도움이 되었다. 새벽 8시 독일군은 그 군대를 두 집단으로 나누어 각각 오슬로를 남부와 동부에서 압박하였다. 주요 시설이 밀집된 시가지와 가까운 남부에서는 제211기갑척탄병사단과 제324보병사단이 오전 10시부터 오슬로 중앙 기차역으로 공격을 가하였다. 공격이 까다로운 동쪽에서는 제178경보병사단과 제326보병사단, 제722후방보병사단이 정오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다. 정오를 살짝 넘겨 예비대로 릴레스트룀에 남겨두었던 제3263보병여단이 영국군의 공습에 큰 피해를 입었고 그들은 재편성을 위해 스웨덴으로 후퇴하여야 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독일 사령부의 부르크하르트 폰 팔켄하우젠은 즉시 제1항공군의 일부를 스웨덴으로 차출하여 항공 지원을 하게하였다. 그 날이 밤에 다다를 즈음에 중앙 기차역은 독일 대포와 전차의 화력 공세에 밀렸지만, 끝끝내 자정까지 기차역을 완전히 넘겨주지 않았다. 동부에서는 봉기군의 막강한 저항에 독일군 피해가 급속히 늘어났으며 이에 경악한 사령부는 오슬로 폭격 명령을 하달하였다.
1월 16일 새벽 7시, 독일 제1항공군 소속 폭격기 8기와 전투기 23기가 오슬로 상공에서 항공 지원을 하였다. 특히나 동부 지역에 공격이 집중되었다.
종지부
전투서열
독일군
제178경보병사단 | 제324보병사단 | 제326보병사단 | 제722후방보병사단 | 제211기갑척탄병사단 | 치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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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군
제1사단 | 제2사단 | 제8사단 | 제10민병단 | 특수작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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