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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갑'''({{llang|zh|李龍甲, [[1887년]] [[3월 6일]] - [[1952년]] [[4월 17일]]}})은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과 [[동중전쟁]](東中戰爭) 동안 활약했던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의 소속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 군인이자 사상가이다. [[동북관군]](東北關軍)의 총지휘관으로서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킨 뒤에 몽골의 왕공족,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를 내몽골의 황제로 추대하여 [[몽강제국]](蒙疆帝國)이라는 괴뢰국을 건국했다.
'''이용갑'''({{llang|zh|李龍甲, [[1887년]] [[3월 6일]] - [[1952년]] [[4월 17일]]}})은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과 [[동중전쟁]](東中戰爭) 동안 활약했던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의 소속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 군인이자 사상가이다. [[동북관군]](東北關軍)의 총지휘관으로서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킨 뒤에 몽골의 왕공족,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를 내몽골의 황제로 추대하여 [[몽강제국]](蒙疆帝國)이라는 괴뢰국을 건국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처럼 [[아시아주의자]](東亞論自)로서 [[몽강 제국]]을 [[만족협화]](萬族協和)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다민족 공상 사회로서 구상하며 최종적으로 [[단일동아연방]](單一東亞聯邦)을 건설하여 [[동아시아]](東亞細亞)의 화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비범한 사상가였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데므치그돈로브]]의 철권 통치와 자신의 이상 통치를 두고 대립하였으며 [[동북관군]] [[헌병]]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진웨이화]](金伟華) [[참장]](參將)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만주국]](滿洲國)으로 귀국하였고, [[장쉐량]](張學良)의 [[제1 합중병단]](第日 合衆兵團) 내 [[제16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처럼 [[아시아주의자]](東亞論自)로서 [[몽강 제국]]을 [[만족협화]](萬族協和)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다민족 공상 사회로서 구상하며 최종적으로 [[단일동아연방]](單一東亞聯邦)을 건설하여 [[동아시아]](東亞細亞)의 화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비범한 사상가였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데므치그돈로브]]의 철권 통치와 자신의 이상 통치를 두고 대립하였으며 [[동북관군]] [[헌병]]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진웨이화]](金伟華) [[참장]](參將)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만주국]](滿洲國)으로 귀국하였으며, [[합중국 참모본부]](合衆國 參謀本府)의 부국장, [[장쉐량]](張學良)의 [[제1 합중병단]](第日 合衆兵團) 내 [[제16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생애==
[[1887년]] [[3월 6일]], [[공주부]](公州郡) [[회인군]](懷仁郡)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대한제국]](大韓帝國) 내 종8품 문관이었다. 당시 [[충청남도]](忠淸南道) 지방은 산업 개발이 지지부진한 지역이었으나, 1890년대 후반부터 [[고종]](高宗)과 [[개화당]](開化黨)을 주도로 이루어진 [[광무개혁]](光武改革) 이후로 군사력 강화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장교 및 군사 엘리트 양성을 위해 지방 주요 거점 내 [[군사유년학교]](軍事幼年學校)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1903년에 '공주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6년에는 '제국중앙유년학교'에 진학, 1909년에는 [[대한육군무관학교]](大韓陸軍武官學校)에 16기로 졸업했다. 그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 체제의 확립 이전 기간인 1911년부터 1917년까지는 [[대한제국 상무영]](大韓帝國 商務營) 소속의 정보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이용갑은 [[대한제국 상무영|상무영]]에서 활동하는 동안 대한제국의 지방 군사 상황은 물론, [[일본제국]](日本帝國)과 [[도쿠가와 막부국]](徳川幕府國)간의 군사 대립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시아주의]]는 이 기간동안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동래부]](東萊郡)에서 만난 [[일산회]](一山會)<ref>[[입정종]](立正宗) 계열의 신흥 종교인</ref> 신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분류:동아합중국 관련]]
[[분류:동아합중국 관련]]

2019년 1월 18일 (금) 22:52 판

이용갑
李龍甲
생애 1887년 3월 6일 - 1952년 4월 17일
출생지 대한제국 대한제국, 공주부 회인군
사망지 만주국 만주국, 흑룡강성 이춘시
별명 몽강의 국부(蒙疆の國父)
정당 몽강군정당(夢疆軍政黨)
학력 동아합중국 합중국 육군대학교 졸업
복무 동아합중국 합중국 육군 소속 대한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09년 ~ 1945년
최종 계급 참장 참장(參將)
지휘 보병 제2연대 연대장
참모본부 제2국장
제16사단 사단장
주요 참전 동일 전쟁(東日戰爭)
동중 전쟁(東中戰爭)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
기타 이력 몽강 제국 집정관
(1933년 ~1935년)
헤이허 대학 명예교수
(1939년 ~ 1940년)

석원완이(石原莞爾)와는 무언가 마음이 맞는 것 같다. 본화(本和)의 가르침을 널리 펴려는 현명한 왕들과 본화(本和)를 믿지 않으려는 많은 어리석은 왕들의 다툼이 될 때에는, 여기서 세계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는 공통의 생각…비로소 전 세계 국가들이 참회하고 깨달아, 본화(本和)의 큰 위신력을 두려워해서, 세 가지 큰 비법의 큰 진리를 생각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세계 각국의 왕과 신하 모두가 이 평화로운 시대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1932년 세계평화회론(世界平和悔論)

이용갑(중국어: 李龍甲, 1887년 3월 6일 - 1952년 4월 17일)은 제2차 세계대전(第二次世界大戰)과 동중전쟁(東中戰爭) 동안 활약했던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의 소속국,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치 군인이자 사상가이다. 동북관군(東北關軍)의 총지휘관으로서 열하사변(熱河事變)을 일으킨 뒤에 몽골의 왕공족, 데므치그돈로브(德穆楚克棟魯普)를 내몽골의 황제로 추대하여 몽강제국(蒙疆帝國)이라는 괴뢰국을 건국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처럼 아시아주의자(東亞論自)로서 몽강 제국만족협화(萬族協和)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다민족 공상 사회로서 구상하며 최종적으로 단일동아연방(單一東亞聯邦)을 건설하여 동아시아(東亞細亞)의 화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비범한 사상가였음을 알 수 있다. 1935년, 데므치그돈로브의 철권 통치와 자신의 이상 통치를 두고 대립하였으며 동북관군 헌병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 진웨이화(金伟華) 참장(參將)과의 투쟁에서 패배하여 만주국(滿洲國)으로 귀국하였으며, 합중국 참모본부(合衆國 參謀本府)의 부국장, 장쉐량(張學良)의 제1 합중병단(第日 合衆兵團) 내 제16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생애

1887년 3월 6일, 공주부(公州郡) 회인군(懷仁郡)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대한제국(大韓帝國) 내 종8품 문관이었다. 당시 충청남도(忠淸南道) 지방은 산업 개발이 지지부진한 지역이었으나, 1890년대 후반부터 고종(高宗)과 개화당(開化黨)을 주도로 이루어진 광무개혁(光武改革) 이후로 군사력 강화에 힘쓰기 시작하면서 장교 및 군사 엘리트 양성을 위해 지방 주요 거점 내 군사유년학교(軍事幼年學校)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는 1903년에 '공주군사유년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06년에는 '제국중앙유년학교'에 진학, 1909년에는 대한육군무관학교(大韓陸軍武官學校)에 16기로 졸업했다. 그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으며, 동아합중국(東亞合衆國) 체제의 확립 이전 기간인 1911년부터 1917년까지는 대한제국 상무영(大韓帝國 商務營) 소속의 정보 군인으로서 활동했다.

이용갑은 상무영에서 활동하는 동안 대한제국의 지방 군사 상황은 물론, 일본제국(日本帝國)과 도쿠가와 막부국(徳川幕府國)간의 군사 대립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시아주의는 이 기간동안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동래부(東萊郡)에서 만난 일산회(一山會)[1] 신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열렬한 신도가 되었다.

  1. 입정종(立正宗) 계열의 신흥 종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