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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background:#000; color:#fff;" | ▲ '''임신개혁 단행 당시에 찍힌 사진''' | | colspan="4" style="background:#000; color:#fff;" | ▲ '''임신개혁 단행 당시에 찍힌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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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 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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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사화 이후 보빙사를 파견한 뒤 전등을 설치할 것이 명령된 1873년으로 간주되며, 당시에 부르던 명칭은 '어개신'이 더 대중적이었다. | 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사화 이후 보빙사를 파견한 뒤 전등을 설치할 것이 명령된 1873년으로 간주되며, 당시에 부르던 명칭은 '어개신'이 더 대중적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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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 = 배경 = | ||
==변혁의 조짐== | ==변혁의 조짐== | ||
16세기 임진왜란의 조기 진압, 사르후 전투 파병과 여진정벌, 요동의 농지 개간권 획득 그리고 분열로 인한 중국의 개입 약화 등으로 조선은 다사다난한 세기들을 보내야만 했었다. 자연스레 민간에서는 처음엔 조선이 천명을 이었다고 인정하지 않던 순나라와의 밀무역 활성화를 시작으로 상업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후 중국 무역의 손해를 메꾸기 위한 주변국들, 심지어 장거리에서 중국과 무역하던 국가들까지 조선에 손을 | 16세기 임진왜란의 조기 진압, 사르후 전투 파병과 여진정벌, 요동의 농지 개간권 획득 그리고 분열로 인한 중국의 개입 약화 등으로 조선은 다사다난한 세기들을 보내야만 했었다. 자연스레 민간에서는 처음엔 조선이 천명을 이었다고 인정하지 않던 순나라와의 밀무역 활성화를 시작으로 상업이 대규모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이후 중국 무역의 손해를 메꾸기 위한 주변국들, 심지어 장거리에서 중국과 무역하던 국가들까지 외교적으로 조선에 손을 뻗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이전보다 더 정확한 해외 정보를 입수하고, 효종 시기에 요동정벌로 얻은 농민 차출지인 요동 지방과 외교 활성화와 밀무역에 따른 민간의 해외 무역 활성화도 서서히 시작되면서<ref>이 시기에 비슷한, 아니, 오히려 중국의 부재로 인해 선진문물 도입이 힘들어진 상황이었던 일본과의 무역지수도 이전과는 비교가 안될 수준으로 비대하게 변모했다. 그 탓인지, 조선 중후기와 후기에 들어서는 왜구 문제의 발생 빈도가 미미할 수준으로 낮아졌던 것으로 드러났다.</ref>본격적으로 자본이 쌓이기 시작했다. 중원에서 군벌이 난립하여 확고한 천자국도 불확실한 마당에 흔들리는 성리학관만으로는 파멸적인 국가 부도를 피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진 집권층은 적어도 경제적 부문에선 상업의 확대를 용인은 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조선은 변화한 사회에 기반한 문화의 발달과 상공업의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 ||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문제점들과 서서히 드러난 안동김씨 일가의 무능은 다른 계층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고, 능력있는 이들은 관직에 오르지 못해 현 정국에 대해 분개했다. | 하지만 조선 후기에 들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문제점들과 서서히 드러난 안동김씨 일가의 무능은 다른 계층들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고, 능력있는 이들은 관직에 오르지 못해 현 정국에 대해 분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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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안동김씨 세도가는 개항으로 인해 본인들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것을 간파했고, 급한대로 여러 인재들의 등용에 대한 건을 통과시키거나 서양 문물을 유입시켜 기술발전을 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결과적으로 시스템 자체에 변화가 없던데다 오히려 서민들의 삶은 저렴하고 질 좋은 외국산 물건들의 유입으로 서서히 빈곤해지기 시작한지라 민심이 더 악화되기만 했다. | 한편 안동김씨 세도가는 개항으로 인해 본인들에 대한 여론이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것을 간파했고, 급한대로 여러 인재들의 등용에 대한 건을 통과시키거나 서양 문물을 유입시켜 기술발전을 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으나 결과적으로 시스템 자체에 변화가 없던데다 오히려 서민들의 삶은 저렴하고 질 좋은 외국산 물건들의 유입으로 서서히 빈곤해지기 시작한지라 민심이 더 악화되기만 했다. | ||
또한 조정의 새 정책을 통해 유입된 개화파와 왕도파, 위정척사파들은 '세도정치 척결'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안동김씨 일가를 맹비난하기 시작했고, 이후 | 또한 조정의 새 정책을 통해 유입된 개화파와 왕도파, 위정척사파들은 '세도정치 척결'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안동김씨 일가를 맹비난하기 시작했고, 이후 이향로가 지부상소 도중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기회를 잡은 흥선군 이하응은 안동김씨 세도가 국왕에게 진심어린 충언을 하는 충신도 죽이는 역적이라고 매도하기 시작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고조가 이들의 손을 들어주며 안동 김씨는 3당파의 연대와 이미 치밀한 정치공작으로 넘어간 5군영의 통제권에 힘없이 무너져내렸고, 마침내 1871년 조정의 권력구도가 다시 한 번 정상화되었다. | ||
이후 안정화가 이루어지자, 조선 정부는 외세로부터의 생존과 사회 문제 혁파,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한 길을 찾고하 했다. 이에 따라 격변한 천하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아 제일의 방식을 택하자는 입장이 집권층으로부터 도출되었고 이에 따라 파견된것이 유럽의 보빙사, 중국의 영선사 그리고 상황이 비슷했던 일본의 통신사였다. 약 2년간의 순방을 끝내고 1873년 모인 이들이 종합하여 내린 결론은 같은 동양국가인 일본의 선례를 보아 구미 열강을 따르는 것이 현재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잉데 따라 조선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 이후 국내의 안정화가 이루어지자, 조선 정부는 외세로부터의 생존과 사회 문제 혁파, 그리고 부국강병을 위한 길을 찾고하 했다. 이에 따라 격변한 천하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아 제일의 방식을 택하자는 입장이 집권층으로부터 도출되었고 이에 따라 파견된것이 유럽의 보빙사, 중국의 영선사 그리고 상황이 비슷했던 일본의 통신사였다. 약 2년간의 순방을 끝내고 1873년 모인 이들이 종합하여 내린 결론은 같은 동양국가인 일본의 선례를 보아 구미 열강을 따르는 것이 현재 가장 적합한 방식이라는 판단을 내렸고, 잉데 따라 조선 정부는 주로 구미 열강 국을 따라 잡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였다. | ||
그러는 한편, 왕도파보다 수구적인 위정척사파를 위시한 강경 보수파는 흥선군 이하응의 설득과 유럽과 중국 순방에 대한 충격, 바뀌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정부의 변화로 인해 기존 위정척사들은 노선에서 양이를 위해 양이를 알아본다는 방식으로 노선을 선회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선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방식을 근대적인 제도에 일부 첨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곤 했고, 유럽의 경우에는 본인들의 기준 정당한 제도라고 판단한 독일 제국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 그러는 한편, 왕도파보다 수구적인 위정척사파를 위시한 강경 보수파는 흥선군 이하응의 설득과 유럽과 중국 순방에 대한 충격, 바뀌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는 정부의 변화로 인해 기존 위정척사들은 노선에서 양이를 위해 양이를 알아본다는 방식으로 노선을 선회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선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방식을 근대적인 제도에 일부 첨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드러내곤 했고, 유럽의 경우에는 본인들의 기준 정당한 제도라고 판단한 독일 제국에 대한 연구를 주로 하는 방식으로 성장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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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근대국가의 사민평등적인 사상을 도입하여, 기존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하고 직업을 자유화시키는 한편, 국가적으로 농민을 주로 양성했던 성리학에도 변화를 주어 국가 정책에 부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이 변모시켰고, 이는 훗날 [[국체유학 (아침해의 원유관)|국체유학]]으로 거듭나 단순한 사농공상 폐지의 정당화와 왕도사상 그 이상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공신 및 친정부적이었던 기득권에 대한 배상은 칭제건원 이후 새로운 귀족 제도인 [[사족 (아침해의 원유관)|사족]]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를 넓어진 강토와 높아진 국위에 따른 공신임명의 변화라며 정당화했다. | 또한 근대국가의 사민평등적인 사상을 도입하여, 기존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하고 직업을 자유화시키는 한편, 국가적으로 농민을 주로 양성했던 성리학에도 변화를 주어 국가 정책에 부흥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새로이 변모시켰고, 이는 훗날 [[국체유학 (아침해의 원유관)|국체유학]]으로 거듭나 단순한 사농공상 폐지의 정당화와 왕도사상 그 이상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공신 및 친정부적이었던 기득권에 대한 배상은 칭제건원 이후 새로운 귀족 제도인 [[사족 (아침해의 원유관)|사족]]제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고, 이를 넓어진 강토와 높아진 국위에 따른 공신임명의 변화라며 정당화했다. | ||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는 신문물에 대한 충격으로 피어나긴 시작한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본격적인 국민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원'이 1876년부터 도입되었고,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의 설립에 이어 한국의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한국 은행 또한 1884년에 설립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국가에 꼭 필요한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재산 축적을 원한 공신들과 기회를 꿈꾸는 부농, 혹은 상인들의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 같은 시기에 민간에서는 신문물에 대한 충격으로 피어나긴 시작한 문명 개화의 움직임, 육식 보급과 철도 개통 등과 함께 본격적인 국민의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금융제도에서도 통화단위로 '원'이 1876년부터 도입되었고, 국립은행 조례에 의한 국립은행의 설립에 이어 한국의 통화 발행권을 독점하는 중앙은행으로써, 한국 은행 또한 1884년에 설립되었고, 이를 통해 근대국가에 꼭 필요한 자본주의적 금융제도의 정비도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본 활동에는 재산 축적을 원한 공신들과 기회를 꿈꾸는 부농, 혹은 상인들의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 ||
외교적으로의 최종 목표는 구미 열강과의 동등한 관계였음으로, 불평등 조약 폐지를 위해 위의 개혁과 같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노력을 다하고, 만국공법을 수용하는 한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격들을 금지시켰다. 다만, 여전히 한국을 근대국가로 보지 않았던 열강들의 조치로 인해 불평등 조약의 폐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마침내 한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서야 육상에서의 활약을 통해 열강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정ㅊ | |||
대동아시아 정책의 경우 먼저 몇 년 앞서 개항한 일본과는 역량적인 차이가 나긴 했지만 [[일본국 (아침해의 원유관)|일본]]의 역량 또한 미숙했기에 대등한 관계에서 친선관계를 펼칠 수 있었다. 훗날 개혁 극후반부에 들어서는 각각 만주와 사할린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던지라 당시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그레이트게임에서 육상, 해상을 통해 러시아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이 한국의 대청제국 식민화를 용인하는 결과 또한 가져왔다. 한편 중원 2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송을 가급적 더 높게 치는 정책에서 이어진 친송, 반순으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 후금의 경우 한국 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용도와 [[대청제국 (아침해의 원유관)|후금]]의 지속적인 통상 거부, 그리고 러시아와의 대립 문제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 '정만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대동아시아 정책의 경우 먼저 몇 년 앞서 개항한 일본과는 역량적인 차이가 나긴 했지만 [[일본국 (아침해의 원유관)|일본]]의 역량 또한 미숙했기에 대등한 관계에서 친선관계를 펼칠 수 있었다. 훗날 개혁 극후반부에 들어서는 각각 만주와 사할린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던지라 당시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그레이트게임에서 육상, 해상을 통해 러시아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이 한국의 대청제국 식민화를 용인하는 결과 또한 가져왔다. 한편 중원 2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송을 가급적 더 높게 치는 정책에서 이어진 친송, 반순으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 후금의 경우 한국 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용도와 [[대청제국 (아침해의 원유관)|후금]]의 지속적인 통상 거부, 그리고 러시아와의 대립 문제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 '정만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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