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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의 원유관}} | {{아침해의 원유관}} | ||
{{대한제국 관련 틀}} | {{대한제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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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padding:0px;" | [[파일:임신개혁단행.jpg| | | colspan="4" style="padding:0px;" | [[파일:임신개혁단행.jpg|510p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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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span="4" style="background:#000; color:#fff;" | ▲ '''임신개혁 단행 당시에 찍힌 사진''' | | colspan="4" style="background:#000; color:#fff;" | ▲ '''임신개혁 단행 당시에 찍힌 사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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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목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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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개요 = | = 개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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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사화 이후 보빙사를 파견한 뒤 전등을 설치할 것이 명령된 1873년으로 간주되며, 당시에 부르던 명칭은 '어개신'이 더 대중적이었다. | 역사학에서 분류한 시기는 사화 이후 보빙사를 파견한 뒤 전등을 설치할 것이 명령된 1873년으로 간주되며, 당시에 부르던 명칭은 '어개신'이 더 대중적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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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display:inline-block; width:100%;margin:0px auto 5px; border-radius: 8px; overflow: hidden;opacity:1;box-shadow:0px 0px 3px rgba(0,0,0,0.6);padding:23px 8px 10px;background:rgba(255,255,255,0.1);"> | |||
= 배경 = | = 배경 = | ||
==변혁의 조짐== | ==변혁의 조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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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시아 정책의 경우 먼저 몇 년 앞서 개항한 일본과는 역량적인 차이가 나긴 했지만 [[일본국 (아침해의 원유관)|일본]]의 역량 또한 미숙했기에 대등한 관계에서 친선관계를 펼칠 수 있었다. 훗날 개혁 극후반부에 들어서는 각각 만주와 사할린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던지라 당시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그레이트게임에서 육상, 해상을 통해 러시아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이 한국의 대청제국 식민화를 용인하는 결과 또한 가져왔다. 한편 중원 2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송을 가급적 더 높게 치는 정책에서 이어진 친송, 반순으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 후금의 경우 한국 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용도와 [[대청제국 (아침해의 원유관)|후금]]의 지속적인 통상 거부, 그리고 러시아와의 대립 문제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 '정만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대동아시아 정책의 경우 먼저 몇 년 앞서 개항한 일본과는 역량적인 차이가 나긴 했지만 [[일본국 (아침해의 원유관)|일본]]의 역량 또한 미숙했기에 대등한 관계에서 친선관계를 펼칠 수 있었다. 훗날 개혁 극후반부에 들어서는 각각 만주와 사할린에서 러시아와의 갈등이 일어나고 있던지라 당시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그레이트게임에서 육상, 해상을 통해 러시아를 완전히 포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영국이 한국의 대청제국 식민화를 용인하는 결과 또한 가져왔다. 한편 중원 2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송을 가급적 더 높게 치는 정책에서 이어진 친송, 반순으로 요약할 수 있었으며, 후금의 경우 한국 내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용도와 [[대청제국 (아침해의 원유관)|후금]]의 지속적인 통상 거부, 그리고 러시아와의 대립 문제로 인해 대한제국 내에서 '정만론'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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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침해의 원유관]] | [[분류:아침해의 원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