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신질서의 황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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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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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문민정부의 몰락과 대공황 ===
=== 일본: 문민정부의 몰락과 대공황 ===
[[일본 (신질서의 황혼)|대일본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며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일청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섬]]을 얻고 [[일러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일가라후토]]과 [[조센]]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바쁘던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수출을 하여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오르며 경제적 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는 짧은 민주주의를 맞이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일본 (신질서의 황혼)|대일본제국]]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며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일청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섬]]을 얻고 [[일러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가라후토]]과 [[조센]]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바쁘던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수출을 하여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오르며 경제적 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는 짧은 민주주의를 맞이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숨을 고르며 다시 생산력을 되찾자 유럽, 미국 등 서방에 비해 열등한 품질을 가진 일본의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올라선 일본 제국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20년간 이어져오던 [[영일동맹]]은 깨져버렸고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해군 규모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와중에 닥친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자 경제권인 [[수도권(일본)|수도권]]을 초토화시켜 일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의 [[쇼와공황]]과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덮치자 일본 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군부의 입김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숨을 고르며 다시 생산력을 되찾자 유럽, 미국 등 서방에 비해 열등한 품질을 가진 일본의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올라선 일본 제국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20년간 이어져오던 [[영일동맹]]은 깨져버렸고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해군 규모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와중에 닥친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자 경제권인 [[수도권(일본)|수도권]]을 초토화시켜 일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의 [[쇼와공황]]과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덮치자 일본 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군부의 입김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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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8년이나 지속된 대전쟁의 승자는 추축국이었다. 연합국 중 국체를 유지나마 한 것은 미국과 독일에 항복하여 왕실을 보존한 영국 뿐이었고 프랑스, 중국, 소련 등은 해체되거나 괴뢰국화 되며 멸망했다.
약 8년이나 지속된 대전쟁의 승자는 추축국이었다. 연합국 중 국체를 유지나마 한 것은 미국과 독일에 항복하여 왕실을 보존한 영국 뿐이었고 프랑스, 중국, 소련 등은 해체되거나 괴뢰국화 되며 멸망했다.


전후, 독일과 일본은 승리하여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올라섰다. 두 나라는 각각 대동아공영권과 아인하이츠팍트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얻고 그를 기반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하며 매우 강대해졌다.
전후, 독일과 일본은 승리하여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올라섰다. 두 나라는 각각 [[대동아공영권]]과 아인하이츠팍트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얻고 그를 기반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하며 매우 강대해졌다.


18세기부터 100년이 넘도록 시대를 풍미하던 서구 식민제국은 모두 붕괴 및 몰락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를 반납하고 독일의 종속국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이제 두 나라의 식민지들은 새로운 주인 일본과 독일로 넘어갔다.
18세기부터 100년이 넘도록 시대를 풍미하던 서구 식민제국은 모두 붕괴 및 몰락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를 반납하고 독일의 종속국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이제 두 나라의 식민지들은 새로운 주인 일본과 독일로 넘어갔다.

2024년 5월 1일 (수) 11:32 판

Destiny634, 2024 - | C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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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第二次世界大戰
World War II
width=100%
기간 1939년 9월 1일 ~1947년 5월 3일[1]
장소 전세계
원인 파시즘의 확산
베르사유 조약의 불공정함
세계 대공황
교전국 연합국 추축국
미국[2]
영국
중화민국
프랑스[3]
자유프랑스[4]
소련[5]
그 외 기타 연합국들
대독일국
이탈리아 왕국
대일본제국[6]
그 외 기타 추축국들
지휘관 연합국 추축국
토마스 듀이
해리. S. 트루먼
조지 6세폐위
윈스턴 처칠
장제스
마오쩌둥
샤를 드 골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주코프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
베니토 무솔리니
쇼와 덴노
도조 히데키
야마모토 이소로쿠
그 외 기타 추축국들
결과 추축국의 승리, 연합국의 패망
영향
초강대국 미국, 독일, 일본 등장, 냉전 체제 대두
OFN, 아인하이츠팍트, 대동아공영권 개설
서구 식민제국의 몰락

개요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또는 1937년 7월 7일 일본의 중국 침공부터 1947년 지나사변의 종결까지 약 세계 각지에서 8~10년간 치뤄진 전쟁이다. 1939년 추축국이 일으키고 연합국이 맞서면서 1억명 이상의 민간인/군인이 숨졌고, 수많은 경제 기반 시설과 도시들이 파괴되어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라고 불린다. 또한 1990년대까지 세계 패권의 중심이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식민제국에서 미국과 독일, 일본 3극으로 옮겨간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배경

일본: 문민정부의 몰락과 대공황

대일본제국메이지 유신 이후 성공적인 근대화를 이룩하며 많은 발전을 이루어냈다. 일청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섬을 얻고 일러전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가라후토조센을 병합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바쁘던 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많은 수출을 하여 경제적으로도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으로 떠오르며 경제적 부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대표되는 짧은 민주주의를 맞이하며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의 종전 이후 유럽 국가들이 숨을 고르며 다시 생산력을 되찾자 유럽, 미국 등 서방에 비해 열등한 품질을 가진 일본의 산업은 경쟁력을 잃고 수출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의 새로운 열강으로 올라선 일본 제국을 서서히 견제하기 시작했다. 20년간 이어져오던 영일동맹은 깨져버렸고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의해 해군 규모를 제한받게 되었다. 이와중에 닥친 관동 대지진은 일본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자 경제권인 수도권을 초토화시켜 일본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다. 설상가상으로 1927년의 쇼와공황과 1929년 미국발 대공황이 덮치자 일본 경제는 더욱 수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에 군부의 입김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극우 보수 세력과 청년 장교층은 국민들의 불만 감정을 앞세워 정부에 대한 암살 및 쿠테타를 일으켰으며, 관동군은 민간 정부의 통제를 무시한 채 멋대로 날뛰며 만주를 침공하고 청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로 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일본은 산업은 크게 성장했으나 자체적으로 자원은 매우 부족해 해외의 수입으로부터 크게 의존하였고 그런 상황에서 천연자원이 넘치는 만주의 점령은 일본의 생명줄로서 크게 지지 받았다,

그러나 만주국에 대한 세계의 여론이 부정적으로 흐르자 군부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도록 정부를 압박하였고,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사실상 고립주의 외교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누카이 쓰요시 내각이 만주에서 일본군을 철수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급진파 장교들에게 암살당하고 후임으로 군인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총리가 되어 정당정치를 단절시키자 군부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치를 장악해가던 군부는 크게 두가지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하나는 황도파로 이들은 일본의 모든 재벌, 기득권 등을 타파하고 쇼와 덴노에게 전권으로 주어 국가적인 개조를 실시하자는 일명 "쇼와 유신"을 주장하는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통제파로 이들은 황도파의 주장에 크게 반대하며 자본주의입헌군주제의 유지-강화를 주장했었다.

황도파가 주장하던 쇼와 유신은 1930년대 극우 사상가들의 목표로, 일본의 부패한 기득권층을 처단하고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자는 매우 국가주의적 사상이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에 만연하던 빈부격차와 사회불안을 내면에 담고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은 대공황으로 말미암은 경제 악화, 미국의 [이민법]과 동북역치로 인해 만주에서의 영향력을 대폭 상실하는 등 대외상 불안전화로 말미암아 군부 급진 세력이나 우익 단체를 중심으로 한때 좋았던 시절 메이지 유신의 정신 부흥과 천황의 친정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급속도로 높아졌다. 대외적으로는 서방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통제파는 이러한 황도파의 주장에 반대했다. 이들은 군의 문민통제가 존중되고 입헌군주제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여긴 것은 물론 소련과 중국에 대한 외교적 입장도 정반대로 대립했다. 암살 당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 이후 집권한 사이토 마코토 내각에서 황도파는 통제파에 밀려 서서히 중앙 정계에서 밀려났으며, 이로 인한 불만이 쌓이자 결국 1936년 2월 26일, 20대 청년 황도파 장교들이 주축이 되어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2.26 사건)

2.26 사건을 일어난 당시는 이미 황도파가 육군성 중앙을 장악한 통제파에 상당히 밀려난 때로, 항거한 황도파 장교들은 대게 20대의 소위부터 대위가 중심이 된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들은 초기 도쿄의 주요 정부 기관을 점거하고 사이토 마코토[7], 다카하시 고레키요[8], 스즈키 간타로[9]등 일본 최고위층 인사들을 대거 습격해 대다수를 살해했다. 황도파의 최우선 목표였던 당시 현직 일본 총리인 오카다 게이스케는 겨우 이들을 피해 차량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했던 쇼와 덴노가 황도파가 항거에 매우 격노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부덕을 탓하며 당황하던 천황이였지만 스즈키 간타로를 비롯한 쇼와 덴노가 신임하는 주요 중신들이 쿠데타 군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중상을 입은 것이 결정적으로 쇼와 덴노의 노여움을 초래하였다.[10] 2월 27일 천황 명의의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졌고, 쇼와 유신을 외치던 황도파는 순식간에 명분을 잃고 혼란에 빠져 일부는 자결을 시도했다. 다음날 군부는 병력 23,841명을 투입하여 본격적인 무력 진압 태세에 돌입하였으며 육군 뿐만 아니라 해군 또한 해군 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코토가 살해 당한 것에 분노해 함대를 끌고와 진압에 참여했다.[11]

결국 황도파는 투항하기 시작했다. 2월 29일 오후 2시 무렵 병사들과 하사관들이 먼저 투항했고 오후 5시에는 장교들 중 노나카 시로 대위와 고노 히사시 대위가 자결했다. 나머지 현역 장교 17명과 예비역 장교 3명은 체포되어 파면과 동시에 재판에 회부되었다. 현역 총리 암살 사건이었던 5.15 사건을 일으킨 이들이 가벼운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으므로 이들도 그와 비슷한 처분을 기대했으나 앞서와 달리 천황의 이름을 팔아먹은 데다 단순 테러 수준을 넘긴 본격적인 쿠데타였기에 중형이 선고됐다. 그 해 7월 쿠데타에 가담한 현역 육군 장교 16명은 사형 판결을 받고 "천황 폐하 만세!(天皇陛下万歳!)"를 외치면서 총살되었다.

이렇게 2·26 사건으로 황도파가 완전히 자멸해버리자 일본 군부 내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 통제파는 세계의 열강 각국에서의 집산주의 대두, 대공황에 대해 효용성을 나타낸 블록 경제에 대한 선망이 나타나면서 당초의 결성 목적・본분으로부터 천천히 빗나가 합법적으로 정부에 압력을 가하거나 자신들과 맞지 않는 정부의 외교 정책에 대해 "통수권 침범"을 방패로 공공연히 비협력적인 태도・행동을 취하는 군 파벌로 변해갔다. 이들을 근대적인 군비나 생산 기구의 정비에 근거하는 총력전에 대응한 고도국방국가를 구상했다.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지나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폭주하기 시작한 일본은 아시아를 서구 열강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 정책에 기반하여 팽창주의, 군국주의적 행보를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미국과의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되었다. 이후 1940년 대독일국이탈리아 왕국과의 삼국 동맹 조약 체결로 추축국의 일원이 된다.

유럽: 베르사유 조약의 족쇄

제1차 세계 대전은 유럽의 지정학적 지도를 근본에서부터 뒤바꿔놓았다. 동맹국이 패배하면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이 사라지고 1917년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소련이 수립되었다. 한편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루마니아, 그리스와 같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승전한 연합국은 영토를 늘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면서 새로운 국민 국가들이 등장했다.

미래에 있을 또 다른 세계 대전을 막기 위해 1919년 파리 강화회담 기간에 국제 연맹이 수립되었다. 국제 연맹의 목표는 집단안전보장, 육해군 군축, 평화적인 협상과 중재를 통한 국제 분쟁 해결로 무력 분쟁을 막는 일이었다.[12]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강력한 평화주의적 정서가 퍼졌음에도 불구하고[13] 동시기 유럽 여러 국가에서 민족통일주의보복주의내셔널리즘이 대두되었다. 이런 정서는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에게 부과된 상당한 영토, 식민지, 재정적 손실이 다가오며 독일에 두드러지게 발생했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자국 본토 영토의 13%와 모든 식민지를 상실했으며 독일과 타국과의 합병도 금지되었으며 배상금이 부과되었고 독일군의 규모와 전쟁능력도 상당한 제한을 받았다.[14]

1918년에서 1919년 사이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해체하고 민주정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전간기 기간 새 공화국의 지지층과 이를 반대하는 우익좌익 강경 반대파가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편 이탈리아는 협상국의 일원으로 전후 영토가 늘어났다. 하지만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가 참전하는 대신 보장했던 여러 약속이 평화 협상에서 전혀 이행되지 않은 것에 분노했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끄는 이탈리아 파시즘 운동은 내셔널리즘, 전체주의, 계급협조론적 의제를 가지고 대의민주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 좌파, 자유주의 세력을 탄압하며 이탈리아를 세계 강대국으로 만들고 "신로마 제국"을 세우겠다는 공격적인 확장주의적 외교정책을 추구하며 이탈리아의 정권을 장악했다.[15]

파일:무솔리니와 히틀러.jpg
베니토 무솔리니(왼쪽)과 아돌프 히틀러(오른쪽)

아돌프 히틀러는 1923년 독일 정부 전복 시도는 실패하였으나 결국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라이히스탁(의회)가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독일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급진적이고 인종주의적 배경을 가진 세계 질서의 전환을 부르짖으면서 민주주의를 폐기하고 대규모 재무장에 들어갔다.[16] 한편 프랑스는 동맹국을 잡아두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가 전적으로 다룰 수 있다는 협정을 맺었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식민지로 두길 원했다. 1935년 초에는 자르 분지 지역이 합법적으로 독일과 병합되고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의 폐기를 선언하며 재무장 계획을 가속화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17]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1935년 4월 군사 세계화의 중요한 단계를 밟고 있는 독일을 막기 위해 스트레사 전선을 결성했다. 하지만 같은 해 6월 영국이 독일과 독자적인 해군 협정을 맺어 독일의 제한을 완화시켜 버렸다. 동유럽의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러는 독일을 우려한 소련은 프랑스에게 접근해 상호 원조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하지만 조약 발효 직전 프랑스-소련 상호 원조 조약을 국제 연맹의 관료제 체계를 거치도록 요구하면서 본질적인 조약 약속 자체가 무력화되었다.[18]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우려한 미국은 같은 해 8월 중립법을 제정했다.[19]

1936년 3월 히틀러는 라인란트에 독일군을 진주시켜 베르사유 조약과 로카르노 조약을 무력화시켰다.[20] 1936년 10월에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로마-베를린 추축국을 결성했다. 한달 후 독일과 일본이 방공 협정에 서명했고 다음 해에는 이탈리아도 방공 협정에 서명했다.

전개

1939년과 1940년, 대독일국독소 불가침조약 없이도 손 쉽게 폴란드프랑스를 짓밟을 수 있었다. 또한 그 과정에서 고립된 벨기에에 갇힌 영국군, 프랑스군, 벨기에군을 히틀러가 직접 명령하여 구데리안의 기갑 부대가 갈아버리며 다이나모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로 당선되긴 했지만 뉴딜 정책은 별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 결과 공화당이 의석 수를 크게 늘리고 민주당에서는 남부 민주당원들이 목소리를 내면서 뉴딜은 더 탄력을 잃었다. 이렇게 인기가 떨어진 루스벨트는 8년의 임기는 잘 마쳤지만 3선 도전까지는 무리수라고 생각해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고 대신 자신의 측근 해리 홉킨스를 내보냈다. 박빙의 선거 끝에 공화당 내 온건파 토마스 듀이가 당선되었다. 그러나 듀이는 상처받은 미국을 치료할 수 없었고 몇몇 부분은 더욱 악화시켰다.

그렇게 미국은 독일이 유럽을 정복하고 영국이 유럽 민주주의의 마지막 등불이 된 상황에서 영국군과 함께 독일과 이탈리아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영국군은 걸레짝이 된 육군을 부여잡고 어떻게든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항전하였고 미군과 함께 횃불 작전을 성공시켰으며, 마켓 가든 작전을 개시, 걸레짝이 되어버린 군대를 가지고도 독일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는 것엔 성공했다.

그러나 대영제국의 상징과도 같았던 영국 해군은 독일 공수부대와 이탈리아 해병대가 스페인의 묵인 하에 지브롤터를 점령해 지중해에 갇혀버렸으며, 끝내 그 어떠한 군사적 보호를 받지 못한 영국 본토 브리튼 섬은 무방비 상태에 빠지고, 이후 1944년 10월, 바다사자 작전이 벌어지며 본토를 빈집털이당한 대영제국과 연합군은 북아일랜드에 고립당한다. 브리튼 섬에서의 대패로 인해 유럽 지역을 향한 발판을 잃어버렸고, 그렇게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독일과 이탈리아 추축군은 아프리카를 수복, 끝내 서부전선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승리로 돌아갔고 영국은 독일과의 굴욕적인 '런던 조약'을 체결, 독일의 '보호' 아래에 '자유 국가'로 남게 된다.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벌어졌다. 모스크바 전투는 독일의 압승으로 끝났고 소련의 명령 체계는 그대로 무너져내렸다. 이에 소련군은 혼란에 빠졌고 수 갈래로 찢어진 다음, 그대로 A-A선우랄 산맥 근방까지 밀려나버린다. 쿠데타가 벌어져 스탈린이 폭사하였고, 알렉산드르 예고로프가 정권을 잡았다. 아르한겔스크를 수도로 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지만, 이 쿠데타는 소련을 내전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레닌의 사망 18주년인 1942년 1월 21일, 그렇게 소련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아르한겔스크의 신소련 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같은 해 12월 7일, 일본진주만 공습을 벌이며 미국은 대비하지 않았던 전쟁에 끌려 들어간다. 일본은 모든 것들을 걸고 미국과 전쟁을 준비했지만, 미국은 경제난에 허덕이는 시민들을 먹여살리는 것도 힘들었다. 그 상황에서 엔터프라이즈와 다른 한 척의 항공모함이 진주만에서 가라앉았고 진주만의 유류저장고 역시 파괴되었다. 미 해군은 연합함대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태평양을 휩쓰는 모습을 손가락을 빨며 바라본다.

1944년 전쟁 중이라는 명분과 민주당의 헨리 A. 월리스가 진보당을 창당하며 분열된 어부지리 덕에 재선된 듀이 대통령은 미군이 언젠가는 라이히스탁황거에 들이닥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믿는 사람은 적었다. 하지만 독일을 상대로는 패배했어도, 일본을 상대로는 승산이 있었다. 초반에 크게 밀려나긴 했었지만 미국은 막강한 산업력을 기반으로 일본을 압도해갔다.

츠지 마사노부임팔 작전을 성공시키며 중화민국을 지원할 수 없게 되었지만, 미국은 현실 태평양 전쟁에서 하였던 도약 작전을 통해 빼앗겼던 태평양 섬들을 차례로 수복, 일본군을 이오지마까지 밀어냈다. 마침내 미 해병대는 이오지마에 상륙했는데, 지원하러 온 미 함대가 일본 함대와의 함대결전 중 유인전술에 걸려 대패하였으며 상륙한 해병대는 대량으로 항복하는 참사가 발생한다. 이렇게 미국의 공세가 둔화되었다.

다만 일본 해군 역시 큰 피해를 입은데다 맨해튼 계획 역시 결실을 맺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맨해튼 계획은 대공황이 극복되지 못 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가중된 경제 손실로 인해 지지부진했고, 결국 독일이 핵개발 경쟁에서 앞지르고 만다.

1945년 7월 4일, 맨해튼 계획이 결실을 맺기 수개월 전, 일본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독일 폭격기가 진주만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진주만에 또 가해진 핵폭격은 하와이의 해군기지로써의 가치를 상실시켰고 윌리엄 홀시, 체스터 니미츠도 핵폭탄 폭발 여파로 인해 전사하였다.

5만여 명이란 거대한 피해는 이미 가난에 시달리던 미국 시민들의 전의를 완전히 꺾어버린다. 독립기념일에 벌어진 이 참사에 미국인들은 전의를 잃었다. 다음날 듀이는 뉴멕시코로 부터 맨해튼 계획의 완성을 보고 받지만 너무 늦은 결실이었다. 결국 듀이는 아카기 갑판 위에서 굴욕적인 종전 조약에 서명했다. 아카기 조약이라고 불리는 이 조약에 따라 미국은 하와이알류샨 열도를 포함한 태평양 속령들을 양도했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석유 금수조치 역시 해제해야 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연합국은 중화민국이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에 지원을 보내줄 국가들은 대부분 독일과 일본에 이미 패배했고, 위기를 극복하고 재정비된 일본군의 공세를 막을만한 여력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했고 일본군은 셔먼의 바다로의 행진우습게 보일 정도의 초토화 작전을 펼치며 충칭시로 향했다. 마오쩌둥장제스는 충칭에서 연합해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1947년, 한때 충칭이었던 잔해 더미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백제성 폐허 위에서 "아시아와 우리 시대의 평화"를 선언했다. 이렇게 제2차 세계 대전추축국의 승리로 끝났다.

결과와 영향

약 8년이나 지속된 대전쟁의 승자는 추축국이었다. 연합국 중 국체를 유지나마 한 것은 미국과 독일에 항복하여 왕실을 보존한 영국 뿐이었고 프랑스, 중국, 소련 등은 해체되거나 괴뢰국화 되며 멸망했다.

전후, 독일과 일본은 승리하여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올라섰다. 두 나라는 각각 대동아공영권과 아인하이츠팍트라는 거대한 식민지를 얻고 그를 기반으로 엄청난 경제성장을 하며 매우 강대해졌다.

18세기부터 100년이 넘도록 시대를 풍미하던 서구 식민제국은 모두 붕괴 및 몰락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든 식민지를 반납하고 독일의 종속국 신세가 되어야 했으며, 이제 두 나라의 식민지들은 새로운 주인 일본과 독일로 넘어갔다.

그리고 세계는 다극 체제에서 미국 / 일본 / 독일 세 나라의 3극 체제로 전환되게 되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1947년부터 일본이 태평양 자결권 선언을 발표하고 대일본제국 붕괴에 이르는 1989년까지 이것이 이어졌다. 이를 바로 냉전(冷戦, Cold War)이라고 하는 시대이다.

대체로 현재 국제질서의 근간을 만들었다. 동남아의 국가들도 일단은 일본에 의해 독립됐던 것이며, 아프리카 대륙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에 의해 분할된 경계가 대체로 그대로 이어졌다. 거기다 독일과 일본은 현재까지도 당시에 쌓아올린 국력으로 강력한 끝발을 가지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냉전 종료 후에도 다시는 세계 강대국으로 올라서지 못했다.

이 외에 콩고물을 얻어먹은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신흥 강국에 올라섰으며, 현재도 G7에 속할만큼 나름 강력하다.

러시아의 경우 이 전쟁으로 파괴된 뒤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러시아는 단일 국가 자체가 해체를 맞이했다. 군벌 내전으로 인하여 황폐화된 러시아는 냉전 종식 이후엔 노보시비르스크 군벌에 의해 대강의 영역이나마 통합되어 러시아 연방을 선포했으나 주요 영토를 모두 잃은 채였다.

  1. 1945년 8월 15일에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선이 종료되어 굵직한 전투는 끝났으나 아직 장개석 정권의 저항이 남았었다.
  2. 1941 ~ 1945
  3. ~ 1940
  4. 1940 ~ 1945
  5. 1941 ~ 1942
  6. 1940 ~
  7. 제3대, 5대 조선 총독, 제30대 일본 총리. 사건 당시에는 내대신(內大臣)이라는 천황을 보좌하는 직책이었다.
  8. 제20대 일본 총리.
  9. 15년 가까이 궁내성의 시종장을 지내며, 쇼와 덴노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인물로, 런던 해군 군축조약의 책임자로써 황도파로부터 간신으로 찍힌 인물이었다.
  10. 위에 황도파가 습격한 인물들을 잘보면, 하나 같이 전부 쇼와 덴노와 두터운 관계를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다.
  11. 나가토 등 도쿄 앞바다에 있던 제1함대 예하 함정들이 2월 27일 원대복귀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전투배치지시와 함께 함포를 주요 육군 주둔지에 조준하고 여차하면 발포할 준비를 했다.
  12. 틀:뉴스 인용
  13. Ingram 2006, 76–78쪽.
  14. Kantowicz 1999, 149쪽.
  15. Shaw 2000, 35쪽.
  16. Brody 1999, 4쪽.
  17. Zalampas 1989, 62쪽.
  18. Mandelbaum 1988, 96쪽; Record 2005, 50쪽.
  19. Schmitz 2000, 124쪽.
  20. Adamthwaite 1992, 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