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진
카모이 모시르, 푸하이 구룬
河震
Хациен, カムイモシ, 契丹/女直
Бохай улс, ᡦᡠᡥᠠᡳ ᡤᡠᡵᡠᠨ, , Hadin(Kasandres Bohainae)
표어 “一個極東"
하나의 극동
수도 카무이 코탄カムイコタン
최대 도시 천경용천부川京龍泉府
 

하진(중국어: 河震)은 북해도(北海道), 사할린 섬(庫頁島), 쿠릴 열도(千島列島) 등을 영토로 하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위시한 다민족 영토 복합체이며, 이러한 영토 복합체는 수많은 영방정치체(領邦政治體)로 구성된다. 수도는 카무이 코탄(カムイコタン)이다.[1] 수많은 봉읍국가(封邑國家)들이 발해-송전(渤海-松前) 계통의 황제를 상위 군주로 삼는 동군연합(同君聯合)의 형태로 결집해 있으며, 또 황제는 형식상으로 이들 국가의 지도자에게 각각의 영토를 분봉하기에 봉건제적 정치 성격도 강하게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역사

북방 문명의 성립

예맥인들의 도래

본래 동부여(東夫餘)는 해부루(解夫婁)가 건국하여 두만강 유역에 존속했던 예맥계의 나라였다. 고구려(高句麗) 시조인 추모왕(鄒牟王)의 속국(屬國)이었으나 도중에 반(叛)했기에 광개토대왕의 정벌을 받게 되었으며, 410년에 동부여의 수도였던 여성(餘城)이 함락되자 말례왕(末禮王)[2]은 수만 명의 유민들을 이끌고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고구려군의 추격을 피해 해협을 건너 섬으로 건너간 후 그 곳에 정착했다고 한다.[주 1]

사할린 섬의 토착민족들은 점차 예맥계 유민들의 정주 문화로 흡수되었으며, 서단산 문화(西團山文化)와 같은 선진 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부여 사회와 유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예맥계 유민들은 점차 지배층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게되었으며, 영고(迎鼓)의 제천행사가 정기적으로 개최되며 부여 법률의 영향을 받은 책법을 통한 처벌의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고구려를 비롯한 한반도계는 이들의 나라를 '유귀국(流鬼)'이라고 부르며 존재를 인식했으며, 특히 고구려문자명왕(文咨明王)은 만주 지방에 남아있던 잔왕(孱王)의 북부여 세력을 멸망시킨 후, 부여의 실질적인 후신이 된 유귀국을 정벌하려고도 했다.[주 2]

북발해의 수립

정치

하진의 중앙 정부는 황제를 국가 원수로 삼는 의원내각제(단원제)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의회의 의원은 각 소속국에서 인구에 비례하여 선출하며, 주로 다수당의 당수가 의회에서 행정 수반으로 선출된다. 이 행정 수반은 내각대내상(内閣大内相)이라고 부른다.

행정

경제

사회

국방

각주

  1. 아이누어(アィヌイタㇰ)로 '신이 사는 곳'을 의미한다. 예맥계에서는 이곳을 '흥안부'(興安部)라고 부르기도 한다.
  2. '말례'(末禮)는 시호가 아닌 이름이다. 시호에 대해서는 학설이 분분하여 이름으로 기재한다.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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