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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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은 45개 주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하는 DC에서 승리했다. 골드워터는 홈스테이트와 딥 사우스의 다섯 주를 휩쓸었고, 대부분은 1877년 재건 시대 이후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이 백인 투표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민주당이 버몬트에서 승리한 1992년 이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메인에서 승리한 1912년 이후 최초의 선거였다. 반대로 이것은 공화당이 조지아를 확보한 최초의 선거이기도 했다.
존슨은 45개 주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하는 DC에서 승리했다. 골드워터는 홈스테이트와 딥 사우스의 다섯 주를 휩쓸었고, 대부분은 1877년 재건 시대 이후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이 백인 투표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민주당이 버몬트에서 승리한 1992년 이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메인에서 승리한 1912년 이후 최초의 선거였다. 반대로 이것은 공화당이 조지아를 확보한 최초의 선거이기도 했다.


이것은 민주당 후보가 아이다호, 유타, 와이오밍,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네브래스카, 캔자스, 오클라호마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알래스카를 확보한 유일한 선거였다. 따라서 이 선거는 중서부 지역 전체가 민주당에 투표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 이후 아이오와와 오리건은 1988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고,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일리노이, 몬태나, 네바다, 뉴햄프셔, 뉴저지, 뉴멕시코, 버몬트는 1992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으며, 인디애나와 버지니아는 2008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또한 이 선거를 마지막으로 민주당은 지금까지 선거인단을 400명 이상 확보한 적이 없다.
이것은 민주당 후보가 아이다호, 유타, 와이오밍, 네브래스카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알래스카를 확보한 유일한 선거였다. 따라서 이 선거는 중서부 지역 전체가 민주당에 투표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 이후 콜로라도, 뉴햄프셔, 버몬트는 1992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존슨의 압도적 승리는 많은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의 [[1964년 미국 선거|패배]]와 경향을 같이했다. 이후 제89대 의회는 1965년 사회보장법 개정안과 투표권법 등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64년의 선거는 골드워터의 실패로 현대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미국 정치에 있어서 장기적인 재편성의 시작을 알렸다. 공화당으로의 보수주의자들의 집결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80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승리 때 절정에 달했다.
존슨의 압도적 승리는 많은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의 [[1964년 미국 선거|패배]]와 경향을 같이했다. 이후 제89대 의회는 1965년 사회보장법 개정안과 선거권법 등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64년의 선거는 골드워터의 실패로 현대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미국 정치에 있어서 장기적인 재편성의 시작을 알렸다. 공화당으로의 보수주의자들의 집결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84년 [[로널드 레이건 (51주)|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재선 때 절정에 달했다.


==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
==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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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 운동 ===
=== 선거 운동 ===
[[File:Civilrightsact1964.jpg|thumb|right|[[1964년 민권법]]의 첫 페이지]]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선거 전체에 있어서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넓힐 수는 없었다. 공화당 전당대회 직전, 그는 1964년 민권법에 반대하는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존슨은 케네디의 죽음 이후 민권법의 의지를 계승해 법안 통과를 주도했다. 골드워터는 1957년과 1960년 민권법과 인종차별 철폐를 담은 수정헌법 24조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골드워터는 인종차별 철폐의 문제는 연방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 권리라고 여겼고, 1964년 법안이 위헌이라고 생각했다. 이 법안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골드워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1960년대 초반 골드워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파산한 뉴딜 상점"이라고 비난했고, 전직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그를 용서하거나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선거 전체에 있어서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넓힐 수는 없었다. 공화당 전당대회 직전, 그는 1964년 민권법에 반대하는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존슨은 케네디의 죽음 이후 민권법의 의지를 계승해 법안 통과를 주도했다. 골드워터는 1957년과 1960년 민권법과 인종차별 철폐를 담은 수정헌법 24조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골드워터는 인종차별 철폐의 문제는 연방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 권리라고 여겼고, 1964년 법안이 위헌이라고 생각했다. 이 법안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골드워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1960년대 초반 골드워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파산한 뉴딜 상점"이라고 비난했고, 전직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그를 용서하거나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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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선거에서 닉슨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20%가 존슨을 지지했다. 존슨은 압도적 승리로 공화당 보수파 하원의원들을 몰아냈고, 초당적 연합체인 보수 연합을 넘어서는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선거는 수정헌법 제23조에 따라 컬럼비아 특별구가 참여한 첫 번째 선거이다.
1960년 선거에서 닉슨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20%가 존슨을 지지했다. 존슨은 압도적 승리로 공화당 보수파 하원의원들을 몰아냈고, 초당적 연합체인 보수 연합을 넘어서는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선거는 수정헌법 제23조에 따라 컬럼비아 특별구가 참여한 첫 번째 선거이다.


또한 존슨은 이전에 FDR이 보유했던 두 개의 기록을 깨뜨렸다. 하나는 대선에 처음 출마한 주요 정당 후보가 확보한 가장 많은 선거인단이었던 1932년의 472명을 제친 493명을 확보했다. 또 다른 하나는 루즈벨트가 득표한 60.8%를 뛰어넘은 63.3%의 국민득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기록은 1984년 로널드 레이건이 528명을 확보하며 깨졌다. 하지만 두 번째 기록은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당선자 득표율로 남아 있다.<gallery widths="500px" heights="317px">
또한 존슨은 이전에 FDR이 보유했던 두 개의 기록을 깨뜨렸다. 하나는 대선에 처음 출마한 주요 정당 후보가 확보한 가장 많은 선거인단이었던 1932년의 472명을 제친 493명을 확보했다. 또 다른 하나는 루즈벨트가 득표한 60.8%를 뛰어넘은 63.3%의 국민득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기록은 1976년 [[지미 카터]]가 503명을 확보하며 깨졌다. 하지만 두 번째 기록은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당선자 득표율로 남아 있다.
 
===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F8F9FA; border:2px solid #0d164a;"
|+ style="background:#0d164a; color:#fff;" | 선거 결과
! rowspan="2" style="background:#EAECF0;" |대통령 후보
! rowspan="2" style="background:#EAECF0;"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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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owspan="2" style="background:#EAECF0;" |선거인단
|-
! style="background:#EAECF0;" |득표수
! style="background:#EAECF0;" |득표율
|-
|'''[[린든 B. 존슨]]'''
|'''민주당'''
|'''텍사스'''
| style="text-align:right;" |'''52,137,928'''
| style="text-align:right;" |'''63.26%'''
| style="text-align:right;" |'''493'''
|-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애리조나
| style="text-align:right;" |29,559,905
| style="text-align:right;" |35.86%
| style="text-align:right;" |47
|-
|'''에릭 하스'''
|사회주의노동당
|뉴욕
| style="text-align:right;" |345,189
| style="text-align:right;" |0.42%
| style="text-align:right;" |0
|-
|'''클리프턴 드베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일리노이
| style="text-align:right;" |112,706
| style="text-align:right;" |0.14%
| style="text-align:right;" |0
|-
|'''해럴드 문'''
|금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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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right;" |29,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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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right;" |0
|-
|'''존 캐스퍼'''
|주권민주당
|뉴욕
| style="text-align:right;" |7,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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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셉 B. 라이트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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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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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text-align:right;"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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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5" style="background:#EAECF0;" |선거인단 과반수
| style="text-align:right;" |271
|}
 
=== 카운티별 득표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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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1964 US presidential election results map by county.svg|카운티별 득표 결과.
File:1964 US presidential election results map by county.svg|카운티별 득표 결과.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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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둘러보기==
{{린든 B. 존슨 둘러보기}}
 
==각주==
[[분류:51번째 주]]
[[분류:51번째 주]]

2023년 7월 26일 (수) 14:02 기준 최신판

19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6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존슨 493인 (91.3%)
(13.0%) 47인 골드워터
1960년 11월 8일
1960 대선
1964년 11월 3일
1964 대선
1968년 11월 5일
1968 대선
투표율 62.0%
투표자 82,420,944표
선거일시 1964년 11월 3일 5시 ~ 4일 6시 (UST)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린든 B. 존슨
부통령
휴버트 험프리
공화당
대통령
배리 골드워터
부통령
윌리엄 E. 밀러
선거인단
493 47인
전국득표
63.3%
52,137,928표
35.9%
29,559,905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민주당
 린든 B. 존슨
휴버트 험프리  

1964년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1964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는 1964년 11월 3일 실시된 미국의 45번째 대통령 선거이다. 현직 민주당 대통령인 린든 B. 존슨공화당 후보인 배리 골드워터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63.3%의 득표율로 존슨은 1820년 대선 이후 모든 후보가 받은 득표율 중 가장 높은 득표율을 받았다.

존슨은 1963년 11월 22일 취임하며 암살당한 전임자인 케네디 행정부의 연속성을 강조했다. 그는 앨라배마의 조지 왈레스 주지사를 경선에서 가볍게 이기고 지명되었다. 또한 존슨은 전당대회에서 미네소타의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공화당은 경선에서 애리조나의 강경보수파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선택해, 뉴욕의 자유파 넬슨 록펠러와 펜실베이니아의 윌리엄 스크랜턴 주지사를 탈락시켰다.

존슨은 민권법 통과를 주도했고, 위대한 사회로 알려진 일련의 빈곤퇴치 정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골드워터는 감세, 작은 정부 철학을 지지했으며, 1957년과 1960년의 민권법 운동을 지지했지만, 남부에서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64년에 와서는 개인의 자유와 주의 권리를 침해한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골드워터를 위험한 극단주의자로 규정하는 시도를 성공했으며, 성공의 가장 큰 지분은 TV 광고 "데이지"였다. 공화당은 온건파와 보수파로 나뉘어 있었고, 록펠러와 다른 온건파 지도자들은 골드워터를 도와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거부했다. 존슨은 선거운동 기간 동안 모든 여론조사에서 큰 격차로 선두를 달렸다.

존슨은 45개 주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투표하는 DC에서 승리했다. 골드워터는 홈스테이트와 딥 사우스의 다섯 주를 휩쓸었고, 대부분은 1877년 재건 시대 이후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던 지역이었다. 민주당이 백인 투표에서 승리한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었다. 이것은 민주당이 버몬트에서 승리한 1992년 이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메인에서 승리한 1912년 이후 최초의 선거였다. 반대로 이것은 공화당이 조지아를 확보한 최초의 선거이기도 했다.

이것은 민주당 후보가 아이다호, 유타, 와이오밍, 네브래스카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민주당이 알래스카를 확보한 유일한 선거였다. 따라서 이 선거는 중서부 지역 전체가 민주당에 투표한 마지막 대통령 선거였다. 이후 콜로라도, 뉴햄프셔, 버몬트는 1992년까지 민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존슨의 압도적 승리는 많은 보수파 공화당 의원들의 패배와 경향을 같이했다. 이후 제89대 의회는 1965년 사회보장법 개정안과 선거권법 등 주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64년의 선거는 골드워터의 실패로 현대 보수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미국 정치에 있어서 장기적인 재편성의 시작을 알렸다. 공화당으로의 보수주의자들의 집결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1984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재선 때 절정에 달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케네디 대통령과 영부인, 암살 직전

케네디 대통령은 1964년 재선을 위한 선거 운동의 첫 번째 기간인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암살당했다. 지지자들은 지도력있는 대통령의 상실로 충격을 받고 슬퍼했으며, 야당 후보나 의원들은 살해당한 정치인의 정책에 반대하기 어려운 입장에 취했다.

애도 기간 동안 공화당 지도부는 공화당 의원들과 후보들에게 무례하게 보이지 않도록 정치적 발언의 수위를 낮출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주요 후보자들은 1964년 1월까지 따로 선거 운동이나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지 않았으며, 그 이후에야 1차 선거운동 기간이 재개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정치 전문가들은 케네디의 암살이 국가를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후보

민주당

민주당 (51주)
민주당 (51주)
1964년 민주당 지명 후보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휴버트 험프리
Hubert Humphrey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제36대
미합중국 부통령
(1963–1969)
미국 상원의원(미네소타)
(1949–1964, 1971-1978)

후보군

존슨 대통령 이외의 유일한 후보는 당시 앨라배마 주지사였던 조지 왈레스 였는데, 그는 여러 북부 프라이머리에 출마했지만 그의 입후보는 북부 유권자들 사이에서 그저 주권(州權) 철학을 홍보한다고 느껴졌을 뿐이었다. 왈레스는 남부 대의원의 지지를 기대하면서도 민주당 후보 지명을 놓고 존슨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존슨은 프라이머리에서 이미 1,106,999표를 확보한 상황이었다.

전당대회에서 미시시피 자유민주당은 미시시피 공식 대의원들이 백인만이 입후보할 수 있는 제도에 의해 선출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도 민주당 대의원의 수를 할당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의 자유파 지도자들은 미시시피 자유민주당과 미시시피 민주당의 두 정당에 각각 대의원을 분할하는 것을 지지했다. 존손은 미시시피 민주당 대의원들은 어차피 골드워터에 투표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유민주당의 요구를 들어주면 남부를 잃을 것을 우려했다. 결국 휴버트 험프리, 월터 로이터, 로이 윌킨스, 마틴 루터 킹, 바야드 러스틴을 포함한 민권운동 지지자들은 자유민주당이 두 명의 대의원을 가지고, 미시시피 민주당은 민주당의 결과를 따라야하며, 앞으로 민주당 전당대회는 차별적 여론조사에 의한 대의원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미시시피와 앨라배마에서 온 많은 백인 대의원들이 서약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고 전당대회를 떠났다. 결국 존슨은 루이지애나, 앨라배마, 미시시피, 조지아, 사우스캐롤라이나를 잃었다.

존슨은 로버트 F. 케네디와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그의 전당대회 출마를 경계했다. 하지만 로버트 케네디는 부통령 후보 자리를 요구하려 했다. 존슨은 이런 상황을 눈치채자 마자 자신의 내각 구성원 중 누구도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위협을 사전에 차단했다. 또한 존슨은 1964년 전당대회에서 예정된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 순서를 지명이 이미 끝난 다음 날로 변경하여,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이 경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1964년 민주당 전당대회 직후 케네디는 존슨의 내각을 떠나 뉴욕 주의 연방 상원의원으로 출마하고 당선되었다. 존슨은 자유주의적이면서 민권운동가였던 미네소타 출신의 휴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을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공화당

공화당 (51주)
공화당 (51주)
1964년 공화당 지명 후보
배리 골드워터
Barry Goldwater
윌리엄 E. 밀러
William E. Miller
대통령 후보 부통령 후보
미국 상원의원(애리조나)
(1953–1965, 1969-1987)
미국 하원의원(뉴욕)
(1951–1965)

프라이머리

1964년 공화당은 보수파와 온건 자유파 사이의 갈등으로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케네디에게 참패한 리처드 닉슨 전 부통령은 이번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공화당의 두 파벌 모두에게 지지 받던 닉슨 전 부통령의 불출마로 보수파와 온건파는 후보로 지명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보수주의자들은 애리조나 주의 상원인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했다. 보수파는 역사적으로 미국 중서부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1950년대부터 남부와 서부에서 힘을 키우고 있었고, 골드워터의 핵심 지지기반은 교외의 보수주의 공화당원이었다. 보수파는 개인의 권리와 기업의 자유를 중시했으며, 사회복지 정책에 반대하는 감세와 작은 정부를 지지했다. 보수파는 북동부에 기반을 둔 온건파가 공화당을 통제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하던 차였다. 보수파은 온건파의 정치 철학이 민주당과 거의 같다고 믿었다. 골드워터의 공화당 후보 지명에 맞서는 상대는 넬슨 록펠러로 뉴욕 주지사이자 공화당 자유파의 오랜 지도자였다.

처음에는 록펠러가 골드워터를 상대로 앞서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록펠러가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 지 2년 만에 재혼을 결정한 것 때문에 록펠러가 혼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루머가 확산되었다. 이것은 많은 공화당 내의 보수주의자들과 여성 유권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대부분은 록펠러를 "상간남"이라고 불렀다. 그의 재혼 후 공화당 내에서 록펠러에 대한 지지는 하룻밤 만에 20%p를 잃었다. 조지 H.W. 부시 대통령의 부친인 코네티컷의 프레스콧 부시 상원의원은 이 문제에 대해 록펠러를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공화당이 위대한 국가의 지도자를 뽑는 자리에,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자를 후보로 올려야 할 정도의 수준으로 떨어졌습니까? 성년 자녀를 둔 아내와 이혼하고, 네 명의 아이와 남편을 버리고 젊은 여자가 자신과 결혼한 것을 우리가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뉴햄프셔의 첫 번째 프라이머리에서 록펠러와 골드워터는 모두 자신의 일방적인 승리를 기대했지만, 엉뚱하게도 닉슨 부통령의 러닝메이트였던 헨리 캐벗 로지 주니어에게 승리를 넘겨줘야 했다. 로지는 출마를 선언하지도 않은 후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매사추세츠와 뉴저지 프라이머리가 개최되기 전에 공화당 후보 지명을 원하지 않는다고 발표했기 때문에, 이후에 득표하는 일은 없었다.

뉴햄프셔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골드워터는 일리노이, 텍사스, 인디애나 프라이머리에서 무난하게 승리하였으며, 또 다수의 주 코커스에서 우승했고 더 많은 대의원을 확보했다. 한편 록펠러는 골드워터를 상대로 웨스트버지니아와 오리건 프라이머리에서 승리했다. 록펠러는 주로 북동부의 여러 주 코커스에서 승리했다.

골드워터와 록펠러의 마지막 대결은 캘리포니아 프라이머리였다. 그의 재혼과 관련된 비난에도 불구하고, 록펠러는 캘리포니아의 대부분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렸고, 프라이머리 개최 사흘 전 아들 넬슨 록펠러 주니어를 낳았을 때 그는 자신의 경선에서 승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아들의 출산은 간통 문제를 선거 전면으로 끌고 들어오게 되었고, 록펠러는 순식간에 지지율이 빠지기 시작했다. 골드워터는 51 - 48의 좁은 격차로 프라이머리를 승리했고, 록펠러를 경쟁자에서 배제하는 것에 성공했다. 록펠러의 실패와 함께 온건파와 자유주의자들은 벤실베이니아 주지사인 윌리엄 스크랜튼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공화당 전당대회가 시작되면서 골드워터는 인기 있는 후보로 여겨졌다. 이것은 공화당이 더욱 보수적으로 전환되는 시작을 의미했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전당대회였다.

전당대회

캘리포니아 데일리시티의 카우팰리스 경기장에서 열린 1964년 공화당 전당대회는 가장 씁쓸한 대회 중 하나였다. 당의 온건파와 보수파는 공개적으로 서로에 대한 경멸을 표시했다. 록펠러는 연설을 위해 연단에 올라왔을 때 큰 소리로 야유를 받았으며, 록펠러는 지지 않고 당내 보수주의자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이 때문에 이를 듣던 보수주의자들이 그에게 소리질렀다. 적은 수의 온건파 대의원이 골드워터를 막기 위해 스크랜턴으로 결집하려 시도했지만, 골드워터의 대의원은 압도적인 표차로 1차 투표에서 승리를 견인하였다.

부통령 후보는 무명의 공화당 전국위원회 의장 윌리엄 E. 밀러에게 돌아갔다. 밀러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대통령 존슨에 대항해왔기 때문이었다. 이 경선은 1952년부터 1976년까지 모두 출마했던 닉슨이 입후보하지 않은 유일한 전당대회였다.

그는 지명을 수락하면서 "나는 자유를 수호하는 극단주의는 악역이 아님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선이 아님을 말씀드리겠습니다"라며 많은 온건파들을 고의적으로 조롱했다. 결국 온건파의 다수는 가을의 선거에서 민주당의 존슨에게 표를 주게되었다.

선거 과정

선거 운동

1964년 민권법의 첫 페이지

골드워터는 보수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것은 성공했지만, 선거 전체에 있어서 공화당의 지지 기반을 넓힐 수는 없었다. 공화당 전당대회 직전, 그는 1964년 민권법에 반대하는 의결권을 행사함으로써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공화당 지지자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존슨은 케네디의 죽음 이후 민권법의 의지를 계승해 법안 통과를 주도했다. 골드워터는 1957년과 1960년 민권법과 인종차별 철폐를 담은 수정헌법 24조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골드워터는 인종차별 철폐의 문제는 연방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주의 권리라고 여겼고, 1964년 법안이 위헌이라고 생각했다. 이 법안에 노골적으로 반대한 골드워터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지지를 완전히 상실했다. 1960년대 초반 골드워터는 아이젠하워 행정부를 "파산한 뉴딜 상점"이라고 비난했고, 전직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는 그를 용서하거나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1961년 12월, 그는 기자회견에서 "우리 나라에서 바다로 떠내려갔으면 하는 곳이 두 곳 있다. 하나는 동부고 하나는 사우스코리아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가 지금보다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는데, 이는 동부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보장 정책, 그리고 민주당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사우스코리아에 대한 혐오감을 나타내는 발언이었다. 그의 발언은 존슨의 TV 광고로 전국으로 송출되며 결국 자신의 목을 옥죄는 꼴이 되었다. 또한 골드워터는 가장 유명한 카페에서 미군이 소련의 크레믈린에 핵폭탄을 한 발 넣어줘야 한다고 농담한 적도 있었다.

골드워터는 또 유명한 많은 온건파 공화당원들이 자신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지 않는 것으로 지지기반에 큰 타격을 입었다. 뉴욕의 넬슨 록펠러 주지사와 미시간의 조지 W. 롬니 주지사는 민권법에 대한 골드워터의 입장을 보고 지지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를 위한 선거운동을 돕지 않았다. 한편 리처드 닉슨 전 부통령과 윌리엄 스크랜턴 펜실베이니아 주지사는 그의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지만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심지어 일부 공화당 온건파는 "존슨을 위한 공화당"을 조직했지만, 대부분의 공화당 정치인들은 그들과 엮이는 것을 피했다.

팩트 매거진은 골드워터에 대해 전국의 정신과 의사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해 골드워터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해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에 부적하다는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많은 언론에 인용되었으며, 이 때문에 미국 정신과 의학회의 윤리지침이 변경되었다. 팩트 매거진은 명예훼손에서 패소하여 골드워터에게 75000달러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해야 했다.

만약 아이젠하워가 골드워터를 강력히 지지했다면 골드워터는 선거 운동에서 분명한 이점이 있었을 것이다. 골드워터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은 할리우드의 유명인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레이건은 골드워터를 지지하는 TV연설을 진행했으며, 이 연설은 전국의 TV 방송국에서 송출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많은 역사가들은 이 당시 레이건이 한 "추징을 위한 시간" 연설이 레이건이 배우에서 정치인으로 변모한 시점이라고 분석한다. 이후 1966년 레이건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 선출되었다.

한편 존슨 대통령은 공산주의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통킹 만 사건이 발생한 후, 북베트남은 미국이 습격의 배후에 있다고 주장했다. 존슨은 즉시 흐루시쵸프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소련에 북베트남이 미국 군함을 공격하지 않도록 설득해줄 것을 요청했다. 다음날인 8월 3일 남베트남은 케이프 빈슨과 쿠아론을 습격했다. 그날 밤 뇌우가 한창일 때 USS 매독스는 전보를 가로챘고, 전보의 내용은 북베트남 초계함들이 남베트남을 공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존슨은 베트남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고, 골드워터를 그저 말만 늘어놓는 매파처럼 보이게 했다.

광고 및 슬로건

존슨은 자신을 온건파로 자리 매김하고 골드워터를 극단주의자로 인식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골드워터는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전쟁, 핵무기, 경제에 대해 틱틱 던지는 발언을 하는 버릇이 있었다. 존슨은 9월 7일 그 유명한 "데이지 걸" 광고를 송출했다. 이 광고는 어린 소녀가 들판에서 데이지 꽃잎을 따서 세고, 카운트다운이 보이며 핵 폭발을 교차시키는 장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존슨의 또 다른 광고는 일전에는 아이젠하워에 투표했지만, 지금은 골드워터를 지지하지 않는 한 남자의 독백을 담아냈으며, 이런 광고는 유권자들이 골드워터를 극우 후보로 보게 만들었다. 골드워터의 슬로건인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은 그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를 민주당이 비틀어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은 그가 핵버튼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와 같은 식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존슨은 모든 주에서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집중되어 있었다. 존슨의 모든 TV 광고는 11월 3일 존슨 대통령에 투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선거운동은 1964년 10월 20일 허버트 후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일주일 동안 중단되었는데, 이는 애도의 기간 동안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 무례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후버는 노환으로 사망했다. 두 후보자 모두 그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존슨은 선거 운동 전반에 걸쳐 모든 여론조사를 엄청난 격차로 이끌었다.

결과

선거는 1964년 11월 3일 실시되었다. 존슨은 국민투표에서 골드워터를 꺾고 63%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1824년 이후 모든 대통령 선거 당선자의 득표율 중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 결국 골드워터는 자신의 고향인 애리조나와 루이지애나, 미시시피, 조지아, 앨라배마,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다섯 개의 딥 사우스 주에서만 승리했는데, 이들은 민주당의 민권 정책 때문에 점점 더 민주당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골드워터에 투표한 5개의 남부 주는 그를 지지하기 위한 극적인 표심의 변화를 보였다. 예를 들면, 1936년 민주당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97%를 득표한 미시시피에서는 골드워터가 87%의 득표를 얻었다. 이 5주 중에서 루이지애나 만이 재건 시대 이후 한 번이라도 공화당을 선택했던 유일한 주였다. 미시시피, 앨라배마, 사우스캐롤라이나는 재건 시대 이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에 투표하지 않았고, 조지아는 재건 시대에도 공화당에 투표한 적이 없었다. 즉, 골드워터는 조지아에서 승리한 최초의 공화당 주자였다.

1964년 선거는 남부의 주요 전환점이었고, 민주당의 과거 '단단한 남부'가 공화당의 요새가 된 기점이었다. 그럼에도 존슨은 여전히 이전의 남부 연합에 가담한 11개 주에서 51%의 지지를 받아 다수의 선택을 받았다. 한편 존슨은 버몬트에서 승리한 첫 민주당 대선주자였고, 공화당이 분열된 1912년 우드로 윌슨에 이어 20세기에 메인에서 승리한 두 번째 민주당 후보였다. 메인과 버몬트는 FDR의 전무후무한 4연임 가운데에서도 한 번도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유이한 주였다.

1960년 선거에서 닉슨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20%가 존슨을 지지했다. 존슨은 압도적 승리로 공화당 보수파 하원의원들을 몰아냈고, 초당적 연합체인 보수 연합을 넘어서는 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선거는 수정헌법 제23조에 따라 컬럼비아 특별구가 참여한 첫 번째 선거이다.

또한 존슨은 이전에 FDR이 보유했던 두 개의 기록을 깨뜨렸다. 하나는 대선에 처음 출마한 주요 정당 후보가 확보한 가장 많은 선거인단이었던 1932년의 472명을 제친 493명을 확보했다. 또 다른 하나는 루즈벨트가 득표한 60.8%를 뛰어넘은 63.3%의 국민득표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기록은 1976년 지미 카터가 503명을 확보하며 깨졌다. 하지만 두 번째 기록은 현재까지도 가장 높은 당선자 득표율로 남아 있다.

선거 결과

선거 결과
대통령 후보 정당 홈스테이트 득표 선거인단
득표수 득표율
린든 B. 존슨 민주당 텍사스 52,137,928 63.26% 493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애리조나 29,559,905 35.86% 47
에릭 하스 사회주의노동당 뉴욕 345,189 0.42% 0
클리프턴 드베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일리노이 112,706 0.14% 0
해럴드 문 금주당 미시간 29,267 0.04% 0
존 캐스퍼 주권민주당 뉴욕 7,253 0.01% 0
조셉 B. 라이트번 헌법당 웨스트버지니아 5,121 0.01% 0
기타 223,575 0.27% 0
합계 82,420,944 100% 540
선거인단 과반수 271

카운티별 득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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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