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란제이위키의 편집자이다. 들어가기에 앞서 이 문서는 자의적으로 서술되었음을 알린다.

1 세계관 및 창작물

감동란의 세계관 및 창작물
세계관 창작물
린크 프로젝트(2019~2021) 숲에서 기다릴게(2021)
라마-환상교차로 판타지 유니버스(2022. 6.~) 숲에서 기다릴게(2022. 8~10.) 아마기 씨 부디 한 번 더 렌탈!(2022. 8.~) 스이히 공주는 무료해(2022. 8~10.)
어서오세요 환원시에(2022. 6~8.)
라시리온(2022~)
수은과 홍조(2022. 8.~)
기울임체휴재 · 취소선종료 및 중단 · 노란 바탕합작

2 기본 정보

2.1 행보

타 커뮤니티에서의 정쟁(政爭)과 관리자로부터의 구속에 환멸을 느껴 제이위키로 도피한 케이스이다. 과거 이곳에서 활동한 전적이 있으나, 앞서의 환멸감으로 새로이 계정을 만들어 활동한다. 본래 유동닉이란 활동명을 사용했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감동란으로 닉변했다.

주로 제이위키에서 활동하지만 산하에 있는 저스트보드에서도 활발히 활동하는 편. 사견글 이외에는 창작에 도움 혹 참고가 된다고 생각하는 글을 공유하고 있다.

2022년 9월 경, 제이콘을 만들었다.

2.2 면면

  • 과거만큼 서적을 많이 접하지는 않다지만 간간히 읽는 편이다. 주로 인문학 주제의 비문학을 읽고, 소설이나 문학책에는 손을 대지 않는 편이다. 에세이류의 '힐링' 서적과 자기계발서, '부자 되는 법' 따위의 서적을 혐오한다.
  • 단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글쓰기 스타일로, 만연체가 심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 틀을 잘 다루지 못한다. 표 하나 만드는 데에도 쩔쩔맬 정도. 그래서 보통은 문서를 순수 글로만 때우는 편이다.
  • 유일하다시피 한 벡터 스킨 사용자였지만 2022년 10월을 기점으로 리버티 스킨으로 갈아탔다.

3 세계상

3.1 견해

요새는 토머스 네일마누엘 데란다를 위시로 한 신유물론맑스의 철학, 신민족주의 전반에 관심이 있습니다. 내가 생각한 짤막한 의견들은 후술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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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항녕과 푸코, 카진스키 등 근대회의론자들의 이념을 받아들이어 진보사관과 근대성에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다. 근대란 본질적으로 중세의 단절의 아닌 중세의 연속, 즉슨 '신중세'였으며 베버의 말마따나 탈주술화되었지만 과학과 자본주의라는 이름 하에 재주술화되었다. 진보사관은 필연적으로 미래를 향한 이상향을 그릴 수 밖에 없는데, 그로 인해 과거와 현재는 그저 '미래로 이행할 수 있는 환승역 내지 징검돌'로 치환되고 본연을 잃어버리는 꼴을 주장하며 그러한 꼴 또한 종용한다.
  • 니체와 들뢰즈의 견해를 받아들여 상대성을 옹호하고 본질주의를 배척하는 사고관을 가지고 있다. 필시 모든 가치는 내재된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만남에 의해 창발된다고 생각한다. 벤야민의 말마따나 "모든 이념은 하나의 태양이고, 그래서 태양(항성들)이 서로 관계하듯이, 각 이념은 그와 비슷한 것과 관계한다. 그런 본성들의 울리는 관계가 진리이다.". ("의미는 만남에서 탄생한다. 이보다 자명한 진리는 없다. 세계의 의미 또한 그렇다. 세계의 의미가 만남에서 탄생한다는 것은, 애당초 세계에 목적은 존재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 있다는 사실만의 반복이다.")
  • 반서방주의자이다. 미국과 구미권의 국가들을 자유와 민주의 이름으로 세계화라는 폭력을 행하는 제국주의 국가라고 생각하지만 그의 대안으로 신냉전의 레드팀인 중국러시아의 권위주의적 민주주의에 찬동하지도 않는다. 단지, 세계의 문화적 다양성을 자본주의의 이름으로 탈곡하는 미국의 일원론적 행보에 관하여 지양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알렉산드르 두긴이 말하는 다극체제에 찬동하지도 않는데, 그의 전통주의적 사상은 그렇다치손 다극체제를 '세계화의 지역적 버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호페의 말마따나 수천의 리히텐슈타인이 필요하다.
  • 파시즘이 가지는 매너분트적-전우애적 가치와 생기론적 이념에 호의적이다. 이것과 더불어 자유와 민주를 최고라 생각하는 현 통념적 실태에 의해 파시즘의 '좋은 부분' 또한 부당하게 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하여 인종주의와 인종분리주의, 제국주의에 긍정적 입장인 것은 아니다. 인종은 근본적으로 '상상의 공동체'이며 근대시기에 수없이 많은 출판물의 출판에 힘입어 생산된 수없이 많은 관념적 세계관의 일종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민족주의는 물론 백인우월주의에도 반대한다. 제국주의의 경우, 고립주의를 옹호하기에 반대한다. 다만, 후술하였듯이 군주정에 찬동하는 모양새에서 드러나듯이 '내정적 제국주의'에 관해서는 긍정적으로 본다.
  • 물리적 폭력에 관해 우호적인 입장이며 이는 조르주 소렐과 니체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결과이다. 정교화되고 세분화된 근대적 폭력의 이전에 실제적이며 물질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원초적인 폭력이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폭력의 모습이 가장 순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순수한 모습의 폭력이 혁명적인 '진정한 예외상태'로 이행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옹호하는 면면이 더욱이 크다.
  • 그렇다고 하여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추파를 던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반대로, 민주주의자도 아니다.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의사결정의 '대행'에 반대한다. 프랑코의 말마따나 인민의 의지는 투표함 따위를 통해 발현되지 않는다. 아마도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듯하다. 그렇다고 하여 권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데 이러한 면모는 군주정에 찬동하는 모양새에서 잘 나타난다. 정확히는 아나키즘이라는 무정부 상태, 인간의 삶이 수렵에서 농업으로 교체되기 이전의 떠돌이 사회는 인지혁명에 의해 근본적으로 신화적 가치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토양을 내재한다. 수렵적 아나키즘의 삶의 형태와 정착적-농업적 히에라르키인 군주정의 갈등과 교체에서 일어나는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은 어째서 필자가 위계질서와 아나키즘 양자를 어떻게 동시에 수용하게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 경제적으로는 극우이다. 맑스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기는 했어도 이전에 오스트리아 학파자유지상주의 경제관의 영향을 지독하게 많이 받았다. 때문에 정치 성향 테스트를 시도하면 경제적 방임주의 내지 자본주의가 8-90%를 기록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허나 이는 옛날 이야기이고 더는 아니다. 자본의 재전유 문제에 관해서는 능동적인 입장에 서 있다.
  • 아이러니하게도 생산수단의 공유와 사유재산의 철폐에 관하여서는 비교적 긍정적인 입장이다.
  • 동성결혼의 합법화에 관하여서는 찬성하는 모양새를 띠는데, 이의 배후에 자본주의적 풍요와 퇴락이 기반한다는 점은 확실히 해야 할 것이다. 동성애는 분명하게 자연스러운, 그저 존재론적 현상일 뿐이지만 이 현상은 얼마간 서구적 퇴폐를 기조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부분적으로 동성결혼 또한 재고될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은 명백해진다. 물질적으로 풍요스러워진 현대에 자본순응적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에서 탈피한 파시즘적(극기적인 초극의 형태는 아닐지라도)인 비합리주의의 철학이 요청되는 까닭은 대표적으로 이러한 경우에서 찾을 수 있겠다.
  • 더불어 최상의 동성애 형태는 고대 그리스 '신성부대'의 전우애적 가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순수한 소렐주의적 폭력을 행사하고 전장에서 땀과 피를 흘리며 역동하는 식의 정신적 합일을 이루었다. 서구적 퇴폐와 현대 극우의 자연주의의 오류에 의거한 동성애 혐오와는 동떨어져 아예 편견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 고대의 군대는 그 자체로 가공할 전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허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게 소이탄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자 관점이 달라졌다. 적어도, 유라시아주의자들은 기술철학에 관심이 없거나 무지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 지적재산권의 독점적 행보에 관하여 반대 입장이다. 다시 말해, 해적주의자이다.
  • 현대 극우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하는데, 그러한 오류가 적용되는 부분은 대표적으로 동성애의 문제에서이다.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그저 전체 파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빙산의 일각인 소수적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성애의 '욕구'가 아닌 동성애에 관한 욕구에만 오로지 자신의 비판논조를 함축시킨다. 고대 그리스의 신성부대적 매너분트의 사례를 망각하고 자연주의의 오류에 입각한 운동이 진실성의 측면에서 그리 오래 갈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대한 것은 동성애, 그리고 이성애를 비롯한 '사랑'의 입장에서이다. 자유연애를 비롯한 근대시기에 비롯된 이른바 '사랑의 점증'은 필연적으로 서구적 퇴폐의 점증과 방종주의의 확산을 불러일으켰음의 사실은 마땅하다. 중대한 비판점은 동성애가 아닌 이성애, 나아가 애(愛)인 '사랑 전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정의는 『향연』에서 등장하였듯이 고래로의 복귀를 꾀하는 일종의 대변신이 이루어져야함이 의당 적절하다.
  • 대기업과 자본투기를 위시로 하는 금융적 자본주의와 시장의 순환과 유통을 골자로 하는 자유시장을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사유하는 시장에 관한 극단적 옹호의 관점은 후자의 것으로서, 대기업의 문어발식 독점체제와는 궤를 달리하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공유의 아고라(Agorism)를 반체제경제를 통하여 방법론으로 수립하는 것이 신시대의 서막을 정초하기 위해서라면 요구가 된다고 본다. 물론 전자는 지양하여야 할 입장이라고 생각을 한다.
  • 이슬람에 호의적이며 가끔 무지성 찬양성 발언을 일삼곤 한다. 실제로 필자는 샤하다를 외친 무슬림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냉담자이다.
  • "모 당원동지가 다른 당원동지에게 <할로윈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냐>라고 물었는데, 그 당원동지는 이런 말을 하더라. <인민대중을 문화적으로 조직하는 데에는 그러니까 유흥의 경우로서 즐길거리로 향유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게 '미제'에서 수입되어 온 무언가의 담론으로 생각하면 어찌 보면 민족주의적으로 비춰지어 '우리' 문화나 비-코스모폴리탄적인 인류애적이지 못한 사고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해서 이 얘기를 왜 하냐면, 나는 이 말에 대해서 보론을 따로 할려고 했는데 자신감이 없어서 못 했음. 뭐 여튼 할로윈과 외래예술에 관한 나의 관점은 <인민대중을 조직할 수 있는 기제로서 작용할 수도 있고 향유거리가 될 수도 있단 것은 맞으나, 언뜻 보면 자본주의적 퇴락이라는 이름 하에 대중을 게으르고 나태하게 만들 수 있는 '방종'의 말로로 치닫을 수 있다> 식으로 생각을 하는데."
  • "반출생주의자들은 문제의 생산을 멈추는 것을 해결한다고 보는 오류에 빠져있다는 것이 본인쟝의 중론"
  • "우울증을 겪는 내가 생각하건데 우울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본다. 그것은 정신적 귀족의 우울증과, 정신적 노예의 우울증이다./귀족은 단순히 우울하지만은 않다. 그들이 우울한 이유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특수하기에, 또한 풍파를 맞아 계속적으로 마모되는 외로운 극점이라서이다. 하지만 그들은 우울로서 행하며, 또한 우울을 자신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우울증은 귀족에게 단지 행위의 양분이 된다. 때문에 정신적 귀족은 우울성애자이다. 그들은 폭풍을 맞아 외로이 버텨내는 고목이고 그러한 고독을 내심 즐긴다./아이러니하게도 귀족이 우울한 이유는 자신이 귀족이기 때문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라오기 때문이고, 이 책임의 짐이 무거워 찔끔 흘리는 눈물이 그들이 우울하단 증거물인가? 아니다. 귀족이 우울한 이유는 자신을 귀족으로 정의내려주는, 허나 귀족적 가치를 전혀 지니지 않은 반대의 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반대항은 정신적 노예이다. 이 반대항은 사라지지 않으며 결코 소멸시킬수도 없다. 반대로 귀족 또한 그렇다. 왜냐하면 귀족과 노예는 고정된 개념이 아닌 사회상의 농도에 따라 정의의 경계가 유동적으로 내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귀족들만의 유토피아(말 그대로 없는 세계이지만 굳이 가정한다면야)에는 우울증이 없다./그들 귀족에게 주어진 환경이 우울하기에, 귀족은 그러한 암울한 환경을 충분히 알고 있기에 그들의 우울은 즉각적이 아닌 제도나 물질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 귀족의 우울증이 영구적(현실적)인 이유가 이것이다./다만 노예의 우울증은 단순하다. 우선 노예의 우울증은 만성적이지 않고 일시적이다. 그들의 우울은 소비의 부재에서 착안한다. 때문에 그들 노예들의 우울은 귀족과 달리 부차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그렇기에 관념론적이다. 귀족은 우울을 양분으로 삼는 대신, 노예는 우울을 한시코 바삐 소멸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노예는 귀족의 날카로운 극점과는 달리 유순한 평면에 자리한다. 우울은 이러한 광활한 평지에 펼쳐진 만화경에서 산란되고 산란되어 결국에는 사라진다./나는 노예의 우울증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분명한 건 이 글이 이분법을 지나치게 사용하며 일반화를 서스럼없이 하고 있단 점이거나, 더욱이 분명한 것은 의지도 중요하지만 의지가 표출될 수 있는 환경의 조성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특히 후자는 매우 중요하다."
  • "공동체는 설립된 목적을 위반하고 창조적이지 못한 권력행사의 집단으로 변모해서는 아니됩니다. 하지만 모든 유인은 권력의 유인을 내포합니다. 권력의 집중은 공동체에 필연적이지만,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공동체의 초심을 지워버립니다. 목적의 망각을 유보하는 최소절연의 공동체만이 평이한 공동체와 비교해 보다 월등한 잠재성을 가집니다. 저희에게 최소절연이란 도약의 준비입니다. 그 도약은 세계관의 이론화와 세제소의 구제를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단계적으로는 공론 구축과 세계관 이론의 창출이 우선되겠네요."

3.2 창작관

나중, 저스트보드<창작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로서 정리하여 올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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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기반이 마련되었음에도 손이 아직 깨끗한 독자, 더 좋은 작품을 내놓으라며 창작자를 힐난하는 콧대 높은 독자, 자신 직위에 신성성을 부여하여 무언가라도 된 양 행세하는 독자. 이러한 독자들의 역할이란 싸그리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먹는 주제란 것을 인지하여야 한다. 생산과 창작의 조건이 만족되었음에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비천한 처지를 직관하여야 한다. 창작의 대로변으로 주행을 선회하여야 한다.

오롯이 독자의 직위는 없고, 그 직위는 실로 절멸되어야 한다. 순수독자는 자신의 항문을 사용할 줄을 모른다. 창작적 배설의 행위보다 섭취행위에 중점을 둔다. 처먹기만 하지 나오는 게 없는 그들을 누가 구원하리? 순수독자는 전부 죽어 그 역할은 창작의 부차로서, 과정으로서, 거름으로서에 전유되어야 한다. 이 지점 이후의 독자는 창작과정에 참여하는 창작가의 일환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쓸모없이 순수를 꿈꾸었던 독해행위는 전도되어 창작 자체의 형태로 치환될 것이다.

―「순수독자의 절멸을 위하여」 中

  • 창작은 별 거 아니다. 필자는 되려 창작자에 관해 이루어지던 신성화를 아랫바닥으로 전락시키어 천한 '배설'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 창작은 사변적임을 벗어나 근육과 신체적 행위에 관한, 율동적인 것이어야만 마땅하다.
  • 얼마 전 창작계에서 대중적으로 이루어지던 이른바 '그림 그려주는 AI'의 확산은 처음 사진기가 발명될 때의 파급력, 그리고 현상 또한 같다. 사진기가 '무엇이 사실적인가?'라는 질문을 화가들을 비롯한 예술계의 작자들에게 제시했다면, 그림 그려주는 AI는 '무엇이 창작인가?'라는 창작자들에게 제시한다고 본다. 이 때, 벤야민이 등장한다. 기술에 관하여 얼마간 긍정적 입장이었던 벤야민의 경우, 그러한 질문을 비롯한 기술의 경우가 인간이 보다 유토피아적 삶에 접근하는 계기로서 파악한다. 필자 또한 그러한데, 사진기가 발명되고 리얼리즘이 창발된 이후에 피카소를 비롯한 미래주의자들이 등장하고 그들의 파급 또한 확대되었던 것처럼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삶의 질 증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기술이란 짐승에 우리가 타느냐, 그리고 우리가 기술에게 지배당하는가의 카진스키의 반기술주의적 담론 또한 제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기술에게 귀속되지 않으려는 '행동'이 사회적으로 파급되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하는 바,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창작에 주어진 근본적 질문을 딛고서 일어나 보다 나은 미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 모든 세계관은, 특히나 제이위키에서의 세계관은 완성되어도 완성된 것이 아니다. 모든 세계관은 완성품이 아닌 과정으로서의 '과정품'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지속적으로 편집을 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 세계관은 세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외부적이면서도, 그것이 뇌내에서 이루어지고 타인의 간섭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폐적임이 기본되는 특성이다.
  • "해석에 선행하는 인지도 그 때문에 부상한다. 세계는 해석으로서의 세계이다. 이러한 주제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주제를 교육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근본적으로 계몽적(근대적)인 방법이다. 1) 세계에 목적이 있다는 테제를 던지고 반테제와 대안을 제시하는 방법. 2) 세계에는 목적 따윈 없다는 여러 시선을 보여주기. 첫째는 올바른 길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이고 브레히트적이지만, 둘째는 여러 시선을 보여주고 그러한 시선이 사실이라는 점에서 브레히트적임과 더불어 아르토적이다. 창작물은 출판 구조상 계몽적일 수밖에 없다. 계몽적일 수 없다 하더라도, 현 작금의 시대상 자본의 미몽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방법론은 다른데, 계몽이 말하고자 하는 ‘세계에 목적이 존재한다’라는 테제가 아닌 ‘세계에 목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테제를 말하고 있고 이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2번째 안은 계몽적 목적을 함의해도 독자들에게 계서적 교육이 아닌 만남으로서 조우한다."
  • "세계관이 문학의 대안으로서 제시될 수 있는 까닭은 서사적이기 때문에 역사를 훑어가는 계보학에 비교적 친근하다는 데에 있다. (문학이 친자본적이라는 비판은 접어둔다. 문학 내에서도 순수문학이라는 공간이 있고 파스텔톤의 퇴락은 모든 문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계관이 ‘탐험할 수 있는 세계’라는 이름처럼 상품화될 가능성이 있기에) 또한 일상에서 벗어나 세계를 담지하며 변화시킬 수 있는 대국적 시선을 체현하는 것으로서. 또한 세계상을 던지면서 (가속주의처럼)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제안하고, 힌트/정보를 줌으로써 신시대를 제창하는 데에 청사진을 그려볼 수 있도록 한다.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조명한다는 점이고, 그러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세계가 재구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세계는 파레트다 -> 실천적으로 행동해라. (물론 니체주의적으로, 프랑크푸르트의 사회주의적 반성은 불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관점으로서의 세계관과 배경 설정으로서의 세계관이 교차한다. 세계관은 서사로서 넓은 이야기의 맥락에 포함, 즉 이야기가 교훈적으로 사용되었던 미흡한 근대적 특성을 가지면서도 이유 없이 벌어지는 현상의 체현, 벤야민식 신적 폭력과 우연에 적합한 무아적인 ‘세계 그 자체’를 다룬다. 인지되지 않는 무수한 구멍들, 역사의 아이러니나 우연적인 사건은 전통적 이야기의 맥락 속에서는 어색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하지만 전통적 세계관의 창작에서는 그러한 해석의 세계가 무시되었다. 세계관은 개인이 군림하는 구조 때문이며, 해석의 세계라는 방법론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방법론을 가지고 마느냐는 순전히 취향이고 개인적 자유의 문제이다. 윤리를 생각하기에는 세계관의 주제를 선택하는 데의 폭이 너무 넓다.)/전통적인 형태의 이야기는 인물 간의 관계를 다루지만, 세계관은 세계를 다룬다. 때문에 신의 통념적 형태인 일원론적 신, 창작자는 관계를 조망하는 개인적 신보다 세계를 조망하는 서구적 신에 더 가깝게 된다. 개인적 세계관은 해석적으로 독단적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띤다. 이러한 세계관의 개인적 독단성은 무릇 여러 시선이 참여하는 해석으로서의 세계관이라는 지향점과는 과연 상극일까?/간과한 것이 있다. 여러 시선은 창작자의 층위가 아닌 창작물의 보급의 층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해석은 강요의 근대적 문학이 아닌 주어짐의 탈근대적 문학일 때 비로소 독단적이지 아니하여 자유에 가까운 것이다. 세계관 합작을 방법론으로 제시한 까닭은 그러한 창작자의 층위의 여러 시선이 창작물의 층위에서까지 내려옴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정규적인 합작의 예시 말고도 즉석에서 결합한 합작의 예시는 서브컬쳐계의 동인 설정으로 들 수 있다."
  • "세계관 합작은 그래서 지향하여야 할 바로 제시될 수 있다. 신의 시선이 혼자가 아닌 여럿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 ‘해석으로서의 세계라는 사실의 전파’가 목적이라 ‘해석이 교차하는 세계’의 창작 혹은 그러한 현실 세계의 사실 법칙을 마키아벨리즘적으로 그려내고 전파하는 것이 주안점이 되어야지, ‘다양한 해석의 교차’가 아닌 ‘다양한 해석’에만 매몰되어서 해석이 교차하는 세계가 아닌 ‘해석이 통합되고 일원적이게 되어 소기의 목적이 전복된’ 또는 ‘창작자 층위에서의 해석만 난무했던 프로젝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합작이 저 목적의 방법론의 궁극적 지향점이 아닌 제안인 까닭이 합작의 구조적 특성에 있다. 합작은 잘 굴러가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해석적 세계를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면 더 나은 의견 도출과 공유라는 점에서 합작 시스템은 옹호되어야 마땅하다. 이 바닥이 좁아서 다른 작업 세계에 비해 보다 의견 도출과 공유의 중요성은 더욱이 올라간다. 하지만 분명하게도 합하여 작업하는 합작의 구조상 의견 충돌과 트러블, 공유지의 비극과 태만, 나태의 비극의 위험성은 반드시 감수하여야 함이 틀림없다. 합작에서의 창조적 정신은, 그러한 창조적 정신이 배출할 지향점인 아르토적 고통과 비참의 세계(더불어 그러한 처참한 환경을 인지하면서 발돋움의 예상을 하는 것)와는 행위적으로 구분된다. 가령 창조성의 목표가 꼭 비참한 실태의 인지를 꾀함이 아니다. 창조성의 목표는 비유하자면 그저 세계의 주름을 더 접는 일인데, 이러한 주름은 현상이지 윤리적인 범주에 들지 않는다. 굳이 주름이 들어야 하는 윤리의 범주를 꼽자면 이러한 사실들의 자체를 설파하는 윤리인 현상-윤리일 것이다."

3.3 영향을 받은 인물

영향을 받은 인물을 보면 그 사람의 정치적 지형 혹은 면면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그 군상의 면모를 포착하는 절대적인 기제로서 작용할 수 없음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 인물들만, 영향을 받은 대략적 시간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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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물 자유지상주의자이자 아나코 캐피탈리즘의 대부. 군주정에 관한 호혜적 입장과 민주정에 관한 부정적 입장은 이 사람의 저서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에서 영향을 받았다. 후일 이러한 반민주주의적 입장은 니체주의와 결부되어 이념형 전반을 지배했으며 간접민주제를 비롯한 '투표제 민주주의', 대중의 규범화된 객체적 자기결정권에 관하여 무조건적 찬성이 아닌 유보를 택하게 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이 작자 덕분에 2010년대의 말기에는 자본주의적, 친기업적 성향과 더불어 반사회주의적, 반-간섭주의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났음을 인정한다.

광해군 비판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사학자. 그에게서는 근대성과 진보사관에 관한 비판적 문법을 받아들였으며 민주정과 시민사회의 무조건적 옹호에 관해서는 호페의 민주정 비판론을 수용하여 조심스레 접근하였다. 아마 실제 조우한 학자 중에서는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의외로 조선사를 비롯한 한국 전근대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그의 주전공인 조선사와 조선에 대한 시각에 관해서는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사학사와 관련하여 홉스봄이나 에드워드 카에 관한 그의 접근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홉스봄의 시대 3부작에서 나타나는 '대안적 시대구분'에 관하여서는 긍정적인 입장에 있으며, 역사주의콜링우드 간의 변증법적 관계에서 카가 종합, 그 오항녕이 카를 대상으로서 반정립 후 진일보를 꾀하였다면 나는 카를 비롯한 오항녕의 그것을 단순 절충론, 아류주의에 입각한 모험주의라고 생각한다. 즉슨, "사학자는 자고로 유물론자"라고 하는 그의 실증주의적 정의에 찬동하지 않으며, 관념론적이고 낭만주의적 성향이 강한 콜링우드에 비교적 추파를 던지는 편. 그의 말마따나 "해석사실의 구분"에서 필자는 '사실을 먹이삼는 해석'의 측면에 더욱이 가깝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게 사학직에서 드러나는 직업적인, 사실에 기반한 해석의 측면보다 (세계관과 결부되는) 창조적 직능을 중요시한다. 더불어 그의 역사학 개론서 『호모 히스토리쿠스』에서 등장하는 구조와 의지, 우연의 삼원론에 관해서는 '역사적 삼위일체' 내지 (그의 독단적인 면모를 더하여) '교황주의'라고 말하고 싶으며, 그 중 '성령'에 해당하는 '우연'의 무한한 우발성과 창발성을 응원한다.

그의 작품을 다분히 읽어본 바는 없고 미스터리나 괴담을 주제로 하는 커뮤니티에서 드러나는 특유의 세계관 최강자 서열 매기기의 문화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다지만, 그의 공포관과 더불어 스티븐 킹의 러브크래프트 해석에는 영향을 꽤 받은 편이다.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감정은 공포"이며, 또한 "인간이 느끼는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라는 그의 주장에는 일견 동의하는 바이다. 필자 본인의 말마따나 "정보의 점증으로 대표되는 근대와 그 연장인 현재에서의 인지되지 않음, 즉 무인지로부터 발현하는 존재의 불안은 점점 늘어나는 소름, 나아가 공포로 체현된다. 이는 인간 사회가 존속하는 한 영원하다. 심원한 공포를 사람들은 오락 혹 미디어의 형태로 애써 은폐의 형태에서 벗어나 유희로서 즐겨보지만 알 수 없음에서 비롯되는 공포는 영원함은 사실이다. 우리는 이를 깨닫고 크기모를 빙산의 일각에서 다시 사유를 시도하여야만" 하며, 모든 것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다는 관료제적 망상은 허사이지만 반대로 뒤집어 말하여, 동시에 벤야민을 호명함에 다음과 같다: 그러한 허무주의적 환경은 니체적으로 위반을 꾀하는 것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프랑스의 맑스주의자이자 생디칼리즘의 아버지. 폭력과 신화적 혁명론에 관한 관한 호혜적 입장은 이 사람과 카진스키의 전복적 입장의 것을 수용하였다.

프랑스의 극작가. 아마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들께는 「하츠 오브 아이언 4」의 모드 '레드 플러드'의 광기어린 가속주의자로 더욱이 유명할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현실에 존재하는 가속주의를 고찰해 볼 수 있게 하는 징검돌의 역할을 해주었고, 후술할 들뢰즈에게도 '기관 없는 신체'와 같은 이론으로서 영향을 끼치었던 사례를 생각해 보면 필자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셈. 그의 저서 『잔혹연극론』은 극작계에 베르톨트의 것과 쌍으로 길이 남을 명작.

대한민국의 사학자. 사학자보다는 사상가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그의 사상가적 면모로서의 '개벽학'은 대한민국이 21세기에 나아갈 일로를 제시해주었다는 점을 들어 높이 산다. 더불어 필자에게는 후술할 두긴을 연결지어 소개해주었다는 점에서 그를 쉽사리 하등 평가할 수는 없는 셈이다.

이탈리아의 전통주의 철학자. 이병한과 더불어 두긴과 필자를 연결지어준 귀한 인물. 그의 저서 『Ride the Tiger』(1961)는 시민사회와 자본주의가 도래한 후의 전통주의 철학이 세계에 방법론으로서 어찌 기여할지 제시해준 역작. 푸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에서 근대성에 관해 회의를 피력하였다면, 에볼라의 경우는 전통주의의 시선에서 조소를 건넸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지구상에 존재하였던 가장 위대한 국가는 무엇인가? 단언컨데, 딱 잘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피우메 자유국이라고도 불리우는 카르나로 섭정국이다. 그리고 이 국가의 설립자이자 통치자는 상술하였던 단눈치오이다.

독일의 철학자. 최근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인물을 뽑으라면 단연 이 학자를 뽑을 것이다. 작년을 비롯한 최근까지도 필자에게 영향을 미쳐왔고 현재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람. 통념적으로 벤야민에 관해 알려진 철학적 이론인 '아우라'나 '판타스마고리아'를 제치고 필자는 그의 19세기 원사의 고고학적 발굴의 총집합적 작업인 『아케이드 프로젝트』나 그 외에도 지젝이나 아감벤의 폭력에 관한 비판적 친연성에 주목, 또한 그의 종교적 고찰에 관하여 앞으로도 파고 들 계획이 있다.

「곡성」, 「랑종」 등으로 유명한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넷플릭스로 공포영화 자주 보다가 눈에 치이는 감독이었는데, 그가 감독한 영화들의 플롯을 보고 적지 않은 감명을 비롯 영향을 받게 되었다. 앞서 소개하였던 러브크래프트와 같게도 나홍진 감독의 영화에서 인간은 초자연적 존재 혹은 자연법칙에 의하여 결국에는 비극으로 치닫는 전개나 결말을 보여주기 때문. 이는 벤야민의 '메시아적 자연의 리듬'이라는 괴이한 공포의 행복론으로도 연관될 수 있는데, 니체주의에서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고통에 대한 긍정과 초극을 통한 삶의 쇄신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그를 애호할 수 있는 이유를 얼마간 포착해낼 수 있다. 그러한 철학적 논거가 아니더라도 영화 제작 능력,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를 작중에 담아내는 능력만큼은 응당 인정이 필수적인 한국 영화계의 뛰어난 보배이자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21세기 유라시아주의의 대표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 한국에서 '지정학의 기초'나 '푸틴의 책사'와 같은 키워드로 유명해지기 전에 이병한, 에볼라를 위시로 한 의고주의-반서방주의 철학자들을 통하여 일찍이 이 사람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두긴에게서는 서구적 퇴폐에 대한 회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비롯한 자본주의의 일원론적 세계화에 관한 환멸의 논리를 받아들였으며, 그가 주장하는 종교적 복고주의와 앞서 언급하였던 일원적 세계화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다극체제의 도입에 대해서는 재고적 관점으로 접근하였다. 적어도 그가 주장하는 '제 4의 길'은 분명히 사유될 여지가 있으며, '유기적 민주주의'라 주장하는 서방의 자유민주주의의 반대항으로서의 전체주의적 시민독재의 관점을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임지현의 대중독재론과 연관지어서 고찰될 면모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실제로 임지현은 적대적 공생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고찰해내었다). 또한 그가 공산주의파시즘의 극단적 논리 양자를 융합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를 꾀하였다는 점에서 적갈색 동맹과의 동의어, '환상교차로'의 긍정적 가능성을 읽어낼 수 있다.

니체에 이어 맑스에 영향을 받지 않은 작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노동당과 『맑스주의 역사 강의』를 저술한 한형식 선생님과의 접촉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와중, 마르크스에 대한 중요도가 높아졌기에 탐독하고 있다.

4 소속 단체

소속 기간 비고
월간공방.png 2022~ 객원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노동당 마크.png 2022~ -

6 여담

  • 퍼스널 컬러로는 #353535를 사용 중이다.
  • 아프리카 TV의 방송인 BJ감동란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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