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선한
심평국제1대 대통령
임기 1985년 8월 16일~1993년 1월 16일일
전임: -
후임: 박휘근(제2대)
신상정보
국적 아키시오 아키시오 (1947~1985)
심평배달공화국 (1985~1993)
출생일 1939년 2월 20일(1939-02-20)
출생지 강원도 원산시
사망일 1993년 1월 17일 (53세)
사망지 야타마 시, 야타마 지하 벙커
정당 심평배달당
종교 환민교

강선한 (姜鮮漢[1][주 1], 1939년 2월 20일[2] ~ 1993년 1월 17일[3][4])은 심평배달공화국 (이하 심평국)의 지도자이자 정치인이다. 심평국의 초대 대통령 (1985년 8월 15일 ~ 1993년 1월 16일)[주 2]을 지냈다.

달필과 달변을 겸비한 인물로서, <환단고기>에서 비롯된 환민교에 경도되어 이를 바탕으로 한 배달민족 지상주의를 창시하였다. 강선한이 창시한 배달민족 지상주의는 당시 국민당의 차별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었던 신페이 제도한국계 아키시오인재조한국인으로부터 각광을 받았으며, 이들의 지지와 후원을 바탕으로 강선한은 국회의원직에 당선되었다. 이어 심평배달당 내부의 권력 투쟁을 종식시키고 1985년 8월 15일 심평배달공화국을 건국하며 아키시오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였고, 같은해 10월 17일에는 전격적인 나다노 제도 침공을 단행하며 신페이 내전이 발발하였다. 신페이 내전 중 강선한과 심평배달당은 수많은 비한국계 민간인들을 수용소에 가두어 강제 노동에 동원하거나 학살하였다. 또한 "우수한 배달 민족"을 표방하여 장애인과 불치병 환자들 또한 추방하거나 학살하여 전세계의 공분을 샀다.

나다노 제도 전역에서 기습을 통해 승승장구하던 심평국은 유엔군의 개입과 아키시오 침공 작전의 실패로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강선한은 뛰어난 정치 감각을 바탕으로 휴전을 성사시켜 1987년부터 1990년까지 3년 간의 휴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지속되는 인종 차별, 말살 정책과 극도의 독재 정책으로 비한국계와 사회주의자들의 반발을 사, 이라 소비에트신페이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내부의 반군을 막지 못하며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휴전 조약의 만료와 더불어 아키시오군이 신페이 제도로 진입하자 1993년 1월 16일 대통령직을 박휘근 중장에게 물려주고 다음날 새벽 지하 벙커의 개인실에서 권총 자살하였다.

생애

출생과 성장

강선한은 1939년 2월 20일, 일본 제국 조선총독부 치하에 있었던 강원도 원산시에서 태어났다.[2] 아버지 강기태(姜基泰)는 독립군 지하 조직에서 활동하였으며, 강선한 본인은 아버지가 중대장이었다고 회고하였다.[2][주 3] 어머니 박 씨 또한 독립군을 지원하는 주민들 중 한 사람이었고 아버지 강기태를 박 씨의 집에서 숨겨준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5] 북태평양 사학자 줄리어스 힉소스는 방북 중 강선한이 자랐다는 원산의 한 마을을 방문해 청취한 기록을 바탕으로, 강기태가 매우 권위적이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강선한 또한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되었다고 기술하였으나[5] 강선한의 고향 친구로 함께 아키시오로 이민 온 김재승한인협회[주 4]은 "털보 아저씨(수염이 덥수룩했던 강기태를 마을 사람들은 털보라고 불렀다.)만큼 가정에 헌신적인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를 감옥에서 여읜 나는 강선한의 단란한 집안이 너무 부러웠고, 나를 비롯한 또래의 마을 동무들은 털보 아저씨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그가 일본군의 목을 따고 다니는 독립군 투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외려 그가 불한당들에게 맞아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고 여겼다." 라며 강선한의 아버지에 대해 진술하는 등, 강기태에 대한 묘사는 차이가 있다. 경제일을 비롯한 자신의 믿을만한 사람들에게도, 강선한은 아버지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았다.[6] 아명은 태동 (太童)이다. 덩치가 컸기에 "태동"이라고 지었다는 설에 따르면 우량아였던 것으로 보이며, "크게 될 아이"라는 뜻에서 지었다는 설도 존재한다.[6] "조선 사람"이라는 뜻에 "선한" (鮮漢)이라는 이름은 아키시오로 이민한 뒤 스스로 개명한 것으로, 자세한 사항은 후술.

당시 조선총독부가 한국어 교육을 탄압하였기에, 강선한은 이웃한 안변군에 있던 지하 조직의 학당으로 보내졌다. 학당에서는 한국어, 기초적인 산수 외에도 무술 등을 가르쳤다.[6] 여덟살 때이던 1947년, 소비에트군이 진주하고 공산당이 안변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공산화가 진행되자, 반공주의자였던 아버지 강기태는 가족들과 함께 아키시오 이주를 택한다. 1910년대부터 아키시오 정부는 대주주로 있던 신페이 척식 주식회사에서 한국인,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신페이 제도의 탄광업과 임업, 건설업에 종사할 노동자들을 대거 모집하고 있었고, 2차 대전 이후에도 전후 재건 수요와 맞물려 많은 노동자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강기태는 이것에 응하였고, 1947년 11월 야타마 시에 입항하여 아키시오 공화국의 시민권을 발급받고 바로 척식회사가 운영하던 나카우지 탄광 (仲宇地炭鉱)[주 5]의 노동자로 채용되었다.[6]

...강(선한) 형에게 공책을 빌린 일이 있어 돌려줄 생각이었다. 강 형은 자리에 없었다. 형이 싫어해 마지 않던 나까지마 (나카지마 마사히로) 왜말 (일본어) 선생의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강 형의 사물함 안에 갖다놓아야지 하고는 사물함 문을 열었는데, 찢겨진 왜말 교과서가 떨어져나왔다. (후략)

 
오덕구 (전 국회의원), 강선한의 소학교 급우. 자서전 <풀떼기>에서 인용.

1948년 4월, 강선한은 이무민 (李茂敏, 일본어: 李 茂敏 리 시게토시[*])이 교장으로서 운영하던 미령한민소학교 (彌靈韓民小學校)에 2학년으로 편입 입학하였다.[7] 교장 이무민은 한국어 뿐만이 아니라 일본어와 영어에도 능통하였으며, 강선한을 비롯한 학생들에게 영어와 일본어를 직접 교육하였다. 1952년 졸업을 앞두었을 때, 강선한은 한국어 (당시 명칭 조선어) 과목, 산수 (지금의 초등학교 수학) 과목, 과학 과목, 사회 과목 등 대부분의 과목에서 '수' 혹은 '우'의 성적을 받았다. 그러나 유독 일본어에서만큼은 최하등급인 '가' 성적을 받았다. 이는 강선한 스스로가 "왜말은 절대 공부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6]

강선한은 당시 일본어 전담교사로서 훗날 신페이 레지스탕스의 자금지원을 담당한 나카지마 마사히로 (中島政宏, 1910년 ~ 1999년)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 나카지마는 자신이 수업을 할 적마다 강선한은 자신의 아버지 강기태가 독립군 입대 전에 일본 순사들에게 붙잡혀 매를 맞은 일과, 숙부와 고모가 독립군이 된 강기태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해 죽은 일에 대해 한국 말로 크게 외치며 "나까지마는 왜놈 무리다. 왜놈이 어디서 우리를 가르치려 드느냐."며 학생들을 선동했다고 회고했다.[8][6]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주변 사람들의 평가

  • 북웅파김영휘조필제는 강선한을 딱 한 번 직접 만난 적이 있다. 강선한이 한창 한국계 사이에서 이슈가 되던 1982년 6월의 일이다. 강선한의 초대를 받은 김영휘, 조필제는 북웅파의 여러 간부들과 함께 야타마 시심평배달당사를 방문해 강선한과 식사를 하는 기회를 얻었다. 강, 김, 조 모두 죽을 때까지 대담의 내용을 끝까지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북웅파와 심평배달당 사이에 신페이 내전을 앞두고 "모종의 거래"가 오간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기하기도 한다.[9] 다만 두 사람은 강선한을 본 인상에 대해서는 확실히 언급하였다. 식사 이후, <영한신문> (永韓新聞)과의 인터뷰에서 두 사람은 "식사를 하는 동안, 강(선한)의 목소리는 항상 기고만장해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눈동자를 바르르 떨고 있어서 어딘가 불안해보였다. 그가 말하던 내용을 나중에 곱씹어보니 한국말이 무디어진 우리들이 보아도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나불대듯이 엉성한 문장의 나열일 뿐이었다……." 고 밝혔다. 김과 조, 강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오갔건, 그리고 그들이 강을 어떻게 생각했건 신페이 내전 중 북웅파는 심평배달당과 단 한번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 그와 선거에서 경쟁했던 후루카와 아츠시 (1933~2001)는 죽을 때까지 강이 부정 개표로 선거에서 당선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지카와는 자서전에서 "자기나라 말도 제대로 못하고 꽝꽝 소리만 지르는 녀석이 당선되었다. 부정한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하며, 똑같은 방법으로 전쟁까지 일으킨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10] 외도인 출신이었던 후루카와는 심평국 건국 이후 일본계가 수용되기 시작하자 아키시오로 망명했다.[주 6] 신페이 내전 중, 후루카와는 국회의원 시절의 인종 차별 발언이 재조명되어 정치적 생명이 끝장났고, 후루카와를 중심으로 하던 개혁당내 우파 세력들도 함께 매장당했다.

선거 이력

연도명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0 1980년 총선 (야타마 A 선거구) 심평배달당 59.1% 당선 (1위)
1984 1984년 총선 (야타마 A 선거구) 심평배달당 70.4% 당선 (1위) [11]

주해

  1. 여성 이름 같아 보이지만, 나는 조선 사람이다.라는 의미에서 조선의 '선' (鮮)과 사나이 혹은 사람이라는 뜻의 '한' (漢)을 따 지은 것이다. (이상 형태만 외 (2016), 7쪽.)
  2. 강선한의 비서였던 경제일 (慶濟一)은 이렇게 회고했다. "1월 16일 저녁이었다. 대통령 (=강선한)은 벙커에 남아있던 인원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그는 끊임없이 흐르는 땀을 닦고 있었다. 벙커 대통령실 내부에는 잠시 동안의 소름끼치는 적막이 흘렀다……. (중략)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박휘근 중장을 대통령으로 지목하였다. 박 중장은 대통령직 승계를 수락하고 전임자에게 오른손을 뻗으며 최대의 예우를 표하였다. 전임 대통령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방으로 들어갔고……. (중략) 다음날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출처는 <심평국 최후의 날> (와카츠키 노부히로 저, 2008년), 101쪽 ~ 102쪽.
  3. 중대장이었다고 말할 때도 있고 말년에는 대대장이었다고 말할 때도 있는 등 진술이 좀 오락가락했다. 워낙에 어린 시절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강선한은 배달당원들이 동족 패잔병들을 학살한 오오모리 학살 사건을 부인하면서 "그런 일이 사실이라면 독립군 대대장의 말예로서 정말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일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출전은 형태만 외 (2016), 11쪽.
  4. 1941 ~ 현재. 김재승은 정치적인 합의를 통해 차별 조항들을 개선하자는 온건주의자였다. 환민교에 경도되어 무장 투쟁을 주장한 강선한과 의견 차를 빚던 그는 조필제가 있던 한인협회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김영휘, 박동수 등의 주선으로 가톨릭에 귀의한 뒤, 조필제의 은퇴 이후 그의 지역구를 계승하여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현 개혁당 한국계의 시조로, 2010년 정계에서 은퇴. (이상 《소만 (小漫) 김재승 선생, 굴곡진 40년 정치 마감해》 2010년 3월 26일자 영한신문 기사 참조.)
  5. 로고 현 나카오지 시 소재. 내전 중에도 계속 채굴되다가, 1996년 진폐증 문제로 폐쇄되었다.
  6. 사실 같은 나라라서 망명이라고 하기엔 좀....

각주

  1. 《灘野裁判被訴者名團―韓國語版》, 아키시오 대법원, 1995년 3월 26일 초안, 2015년 3월 25일 공개.
  2. 2.0 2.1 2.2 힉소스 (2006), 8쪽.
  3. 《강선한 1월 17일 경 사망으로 판명》, 아키시오 아사히 신문, 1993년 1월 26일 조간에서.
  4. 형태만 외 (2016), 310쪽.
  5. 5.0 5.1 힉소스 (2006), 9쪽 ~ 10쪽.
  6. 6.0 6.1 6.2 6.3 6.4 6.5 형태만 외 (2016), 12쪽 ~ 16쪽.
  7. <1948年彌靈韓民小學校入校者名團> (1948년). 신페이 내전 기념박물관 산하 도서관 소장.
  8. 前「心平レジ」中島政宏氏 回顧録出版 2017-09-29 확인.
  9. 형태만 외 (2016), 351쪽.
  10. 후루카와 아츠시 (2000), <외길 50년>, 181쪽.
  11. 심평배달공화국 독립 선언에 따라 의원직 소멸.

같이 보기

참고 문헌

  • 줄리어스 힉소스 (Julius Hyxos), <강선한, 피의 화신> (Seon-han Kang ― Avatar Of The Blood, 2006년), 2015년 대성사 번역.
  • 형태만 (亨泰晩), <심평내전사> (2011), 영한출판사.
  • 형태만·허버트 로드리고·이스마엘 발데스 공저, <강선한 평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