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한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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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스 왕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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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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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오토 스벤라이너L
한스 알바르테M
페르디난트 프리히M 엘런 슈타이거M 게오르기 브렌드리크L 파울 에벤스토M
제6대 제7대 대행 제8대 제9대
프란츠 겔로스M 아돌프 호센R 프리드리히 엔리크R 한스 그라스티아M 프리드리히 헤섹R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아르투어 프리스M 에른스트 리스트M 카를 마우어M 게오르기 슈트하르트R 헨리 코펜M
제15대 제16대
하인리히 프론더M 프리드리히 아르티네M
M은 중도파, L은 좌파, R은 우파
취소선은 당수직에서 제명·사망·중도사임한 경우

역대 서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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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카벨 루트베어 루터 한센 프리드리히 플론테임 아르민 슈마허 마르틴 슈왈스
대행 대행 제6대 제7대 제8대
프리드리히 빌턴 발터 로젠 게오르기 브렌드리크 발터 로젠 파울 제바나
제9대
카를로스 폰 룩셈부르크
취소선은 당수직에서 제명·사망·중도사임한 경우
게르마스 왕국 제8-13대 내각총리대신
게오르기 슈트라서 브렌드리크
George Strasser Brendrick
출생 87년 5월
외스터리아 비에니
사망 160년 2월 (72세)
게르마스 베르데니스
거주지 게르마스 브레미아주 브레미아
게르마스 바이에리네주 뮈니헨
재임기간 제8대 총리
110년 6월 ~ 114년 6월
제9대 총리
114년 6월 ~ 118년 6월
제10대 총리
118년 7월 ~ 120년 3월
제11대 총리
120년 3월 ~ 121년 5월
제12대 총리
121년 6월 ~ 122년 1월
제13대 총리
122년 1월 ~ 124년 6월
직업 정치인, 사회주의자
약력 제4대 게르마스 사회민주당 당수
제8-13대 게르마스 왕국 내각총리대신
제6대 게르마스 공산당 서기장
소속 정당 공산당
정치 성향 사회주의 / 좌익
종교 무종교
국민을 탄압하고 기득권의 이익을 챙기려는 부패한 국왕이 있어선 안됩니다! 차라리 국왕을 몰아낸다면 우리는 공화국을 세울 것입니다!
브렌드리크, 121년 총선 유세 중 연설
노동자의 생계를 쥐어짜는 은 사회민주주의가 아니고, 국민의 정당도 아니다.
브렌드리크, 게르마스 공산당 서기장 당시 연설

게오르기 슈트라서 브렌드리크(George Strasser Brendrick, 87년 5월 ~ 160년 2월)는 제8·9·10·11·12·13대 게르마스 내각총리대신이자 제4대 게르마스 사회민주당 당수, 제6대 게르마스 공산당 서기장, 게르마스의 사회주의자, 정치인이다.

외스터리아비에니에서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브레미아로 이주한 후 게르마스 최대의 노동자 명문학교인 게르마스 노동자대학원브레미아 대학교를 졸업했다. 열아홉 살이 되던 시기 브렌드리크는 사회주의를 배우며 왕정에 맞서 가족들과 함께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다 아버지가 투옥되었고, 어머니는 혁명선봉대에 가입하여 비에니로 탈출해 결국 딸과 남게 되었다. 그러다 사회주의와 정치 사상을 더 배우기 위해 정치인이 되기로 결심해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08년 연설을 통해 당 내 좌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잡았다. 이후 사회민주당의 당수가 되며 당의 좌경화와 함께 탈계급정당을 내걸고 총선에서 정치사 역사상 최연소 총리가 탄생하게 된다.

브렌드리크는 급진적인 정책을 통해 각종 정치·사회 개혁을 추진했고, 지주와 자본가, 기득권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농민에게 나눠주는 토지 개혁의 성과를 냈고 정치적으로는 선거법 개정을 통해 비례대표제와 여성, 엘프인 참정권이 적용되었다. 여기에 과거 정치 참여가 가능했던 국왕의 정치 참여권을 박탈하여 정치적 중립을 준수하도록 했고, 정부군 특별조치를 발령하여 군부 쿠데타를 방지하기 위한 문민통제를 대폭 강화했다.

또 국가가 청원기관에서 시민들이 제안한 복지 정책을 지원하게 하는 국가복지정책을 발표해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물론 복지 정책의 성과를 더욱 키워주었다. 덕분에 게르마스의 경제는 어느 정도 회복세를 보였고 현재까지 민주주의와 복지가 크게 성장한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게르마스 인민당과 사민당 내 우파는 그의 집권을 반대했고 급기야 총리 탄핵소추안을 제출하며 탄핵을 시도했으나 공산당, 농민통일당이 탄핵소추안에 반대했다. 심지어 국왕이던 아들러 1세 역시 브렌드리크 총리를 반대했으며 118년 총선 이후 2년을 앞두고 의회 해산권을 발동했다. 하지만 민심은 국왕이 아닌 브렌드리크에 집중되었고 한 때 공화국 발언으로 헌정 사상 최대의 파장을 맞았지만 이는 브렌드리크가 현대 게르마스 좌파의 상징이자 야당에 불과했던 사민당을 22년 간 집권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124년 브렌드리크가 물러나고 파울 에벤스토에게 당수 자리를 넘겨줌으로써 사민당을 탈당하고 정치인으로써의 삶을 그만두다가, 155년 베르데니스 파업을 계기로 정계 복귀를 선언했다. 그는 게르마스 공산당의 6대 서기장이 되어 그동안 지지했던 사민당을 버리고 반사민당 노선을 띄기 시작했고, 사민당의 경제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때문에 사민당 내 우파와 중도파는 물론, 그를 따랐던 좌파 역시 변절자라 비판하는 상황까지 가게 된다. 그러나 159년 12월 췌장암 진단을 받아 건강 상의 이유로 서기장 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결국 160년 2월 베르데니스에서 사망하게 된다.

생애

이념관

브렌드리크는 "반왕정과 반자본주의, 사회주의와 노동평등,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인권과 시민참여"를 4대 원칙으로 보고 있으며 그는 자본주의와 군주제를 부패한 자본가, 왕실·귀족, 지주 세력들에 의한 기득 이념에 불과하다며 사실상 실패할 것이고 사회주의는 이에 대한 변혁적 대안이지만 국민이 주권이 되는 나라가 되기 위해선 민주주의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에 대해선 부분적으로 옹호적이지만, 이오시프 스탈린, 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을 정면으로 비판했고 레프 트로츠키의 사상은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과격한 투쟁을 통한 과두 독재정으로 갈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투쟁에 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데, 계급투쟁으로는 자본가 등의 기득권을 무너뜨리기 어렵고, 계급투쟁이 과격한 양상을 띄고 있어 잘못되면 노동자가 국가의 모든 것을 장악할 수 있다는 위험한 이념이라며 비판했다.

또 브렌드리크는 왕정이 아닌 공화제를 주장했는데, 그는 국왕의 정치적 간섭과 폭정, 탄압을 반대하고 국가원수이자 왕립군 통수권자로써 정치에 관여할 권리를 주어선 안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121년 총선 당시 공화국 발언을 통해 나라 전체에 큰 파장이 일어난 적이 있고 게르마스 공산당의 서기장이 되었을 때도 민주공화국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반면 국가의 계획을 통한 계획 경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본다. 대신 기업가 혹은 사업자가 노동자들의 근무와 임금 수당, 행복 충족 등을 국가의 권고에 따라 노사가 합의해야 하는 노사합의론을 추구하고 있다. 복지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상을 발표했는데 청원을 목적으로 하는 산하기관에서 국민이 복지 정책을 제안할 때 다수의 사람들이 이를 찬성한다면 국가가 시민이 제안한 복지 정책에 적극 응수하고 지원해야 하는데, 이를 민국복지공동론이라 부른다. 이 민국복지공동론을 이용하여 등장한 정책이 바로 국가복지정책(Staatliche Wohlfahrtpolitik)이다. 이 정책으로 인해 총리 집권 1기 이전부터 기득권의 이득으로 문제가 되었던 기존의 복지 정책들을 폐지하고 연금, 노동, 토지, 계층, 기업 개혁과 함께 경제 성장에 주력하는 등의 성과를 냈다.

그러다 후반에 들어서면서 브렌드리크가 사민당에서 공산당으로 넘어와 그동안 보여줬던 자신만의 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자는 생각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여기서 등장한 이론은 민주공화국론으로, 게르마스를 사회주의 국가 내지 민주공화국으로 가되 직접민주주의, 국민의 주권, 자유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와 시민의 평등과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 등의 인권 보장, 민국복지공동론에 따른 복지청원제도, 저소득층·중산층·노동층·농민층의 생존권 유지를 위한 경제 시스템 가동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특이한 점은 자신의 사상과는 달리 국민의 자유권의 내용이 들어있는데, 특히 자유권을 운운하는 극단주의를 배제하고 국민들에게 충분히 자유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이념관을 통해 탄생한 것이 브렌드리크주의이며 170년대부터 현재까지 현대 유로아 좌파, 극좌파 이념의 대표적인 이념으로 불리고 있다. 브렌드리크주의는 반왕정과 동시에 사회적 복지국가, 사회주의, 공화주의를 혼합한 것으로 계급투쟁이 아닌 정치적 변혁을 통한 국민주권, 직접민주주의 도입, 인권과 평등의 실현, 군민교체(君民交替), 민국공동복지론 등을 중점 이념으로 두고 있다. 현재 좌파계열 정당 대부분은 브렌드리크주의를 표방하거나 이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브렌드리크주의는 사회주의와 노사평등, 국민주권과 민주주의, 인권의 필요성과 다문화, 반자본주의와 반왕정의 4대 원칙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온건파라 부르고, 민주공화국론, 민국복지공동론을 포함하여 브렌드리크 총리 시기의 정통 이념을 가치로 삼고 왕정 타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급진파라 부른다.

브렌드리크주의를 내건 대표적인 정당은 게르마스 좌파당, 이베리카 공화좌파당, 프랑키아 민주변혁당, 민주좌파당 등으로, 이 정당들은 모두 원내에 입성한 정당들이다.

평가

긍정적 평가

브렌드리크는 총리 집권 이후 국가복지정책, 국왕법, 비례대표제 도입, 여성 및 엘프인 참정권 시행, 1일 10시간 노동제, 강력한 토지 개혁 등을 이루어내어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사민당이 22년 간 집권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청원을 통한 복지 정책인 국가복지정책은 물론 금융관리법을 통한 업무 정상화, 노사협력제도를 계승한 노동균형안의 성공을 거두며 유로아스피아 전쟁 이후 일어난 베르데니스의 기적을 통해 게르마스를 경제 강국으로 만든 인물로 유명하다.

또 국왕법의 도입으로 왕실은 물론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대거 축소되어 내각으로 넘어오게 되었지만 사실상 국왕의 권한이 남아있었던 의회 해산권의 발동과 탄핵소추안에도 굴하지 않고 인민당과 국왕을 비판하며 야당의 태도에 실망한 국민들의 큰 지지를 얻었고, 쿠데타 및 정국 혼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군부에겐 정부군 특별조치를 발령해 군사 쿠데타 방지를 촉구했고, 이로 인해 문민통제가 강화되었다. 그 후 유로아스피아 전쟁과 그 이후에도 정국 혼란이 일어났지만 현재까지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 나라로 각광받고 있다.

총리 집권 시기 브렌드리크는 그동안 연설에서 발표했었던 정책(국가복지정책, 노사협력제도, 국왕법, 금융관리법, 비례대표제 등)을 단계적으로 실시하도록 했고, 집권 1기에 시행된 정책은 국가복지정책, 노사협력제도, 선거법 개정, 토지 개혁이 전부였다. 하지만 국가복지정책은 시행착오를 겪다가 복지청원청이 설립되며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을 시행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노동, 저소득층에 관한 제안이었다. 브렌드리크는 시민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가복지정책 1호인 노동관리법과 2호인 저소득층지원법을 발표하였다. 정책 3호인 1일 10시간 노동제는 근무시간 단축과 임금 인상을 추진하는 정책이었는데, 자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노동 환경이 조성되어 노동자들의 83%가 이 정책을 통해 노동 문제를 완화시키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다. 2기 이후부터는 국가복지정책을 통해 노동유연성을 통한 고용제도 실시, 실업률 감소를 위해 청년도 취업의 기회를 줄 수 있는 청년취업제, 금융과 신용 관리, 그리고 파산 위기 시 국가 및 금융기관이 합의하여 지원하는 금융관리법, 지주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몰수한 후 다시 농민에게 배급하는 토지환수제를 실시하자 고용률은 4기 집권 당시 39.5%, 경제성장률은 3.5% 증가 경제적 성과를 이룩했다. 5기에서는 사회경제플랜(Sozialwirtschaft Plan)을 발표해 국가·민간·노동자·사업가·정치인 등이 단합해 산업 발달, 금융 시장 관리, 저소득·중산층의 취업을 주 목표로 삼았고, 브렌드리크 이후 에벤스토 내각으로 넘어온 후에도 이를 이용한 경제 성장에 주력한 결과 게르마스는 경제 규모가 25위권에서 15위권으로 크게 올랐고, 전쟁 이후 이루어진 베르데니스의 기적을 계기로 사회경제플랜 이후의 성장률을 보여주어 세계 20위권에서 5위로 훌쩍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줬다. 하지만 2기 이후 국가복지정책에 한계가 드러나고, 노사협력제도 역시 자본가들의 반대로 폐기되자 3기에 접어들면서 해당 정책을 강화하겠다고 예고했는데, 실제로 이 정책을 강화함에 따라 실효성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국가복지정책은 문제점을 핑계로 프리드리히 헤섹에 의해 폐지되며 좋은 정책을 왜 폐지하냐는 우려와 비판이 많았다.

노사협력제도가 폐기된 이후 브렌드리크는 노사협력을 위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 후 집권 4기에서는 노사균형과 경영협력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토대로 노동균형안을 발표했다. 노동균형안은 공공복리의 증진과 노동시장 및 경영 협력의 활성화를 위해 노사 간의 협치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제안으로, 노동권과 경영권에 대한 균형, 임금 상한선, 균형 붕괴 시에 대한 책임 혹은 국가적 중재 등이 담겨있었다. 처음엔 친노동에 가까운 정책이었기 때문에 사업자의 반대가 컸으나 점점 조정되어 사업자와 노동자 간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 결과 노동균형안은 임금 상한선인 8,970 마르크로 결정되었고, 국가노동위원회를 설치하여 균형이 무너질 경우 이를 심판하는 노동배심원을 투입하는 등 각종 사항을 발표했다. 하지만 노동균형안을 두고 여러 지식인들이 이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집권 5기에 들어서면서 노동균형안은 예상과는 달리 사업가와 노동자의 협치를 통해 어느 정도 노동 시장이 안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복지 정책도 좋은 평을 받았다. 당장 1기 중반부터 정년퇴직, 65세 이상의 고령층을 위해 매 2년 50만 마르크를 지급하는 연금 제도를 도입했고, 국가복지정책을 통해 저소득층지원법으로 저소득층 가구, 기초연금자에게는 30만 마르크를, 장애를 앓고 있거나 특정한 저소득층의 경우에도 30만 마르크를 지급받았다. 또 2기에선 국민 건강을 위한 공공 의료 정책인 국가의료정책을 시행해 높은 비용이 들지 않아도 무상 치료와 가정 치료를 지원했다.

그리고 브렌드리크는 집권 이전부터 한번도 바뀌지 않았던 선거법을 개정하기에 이르는데, 지역구만으로는 의회를 유지할 수 없으니 정치의 다양성을 구축하고 군소정당들의 정치적 참여를 위한 목적으로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이후 114년 총선에서는 515석(지역구 358석+비례대표 157석)으로 선거가 치러졌는데, 이후 프리드리히 헤섹이 비례대표제를 폐지할 때까지 계속 비례+지역구 방식으로 선거를 치렀다. 과거에 선거에 참여하거나 투표를 할 수 없었던 모든 여성과 엘프인들에게도 참정권과 선거 참여의 기회를 주어 다음 총선에서는 26명의 여성 후보들이 당선되기도 했다. 6기에 접어든 후 브렌드리크 내각은 국왕의 폭정, 선거 개입 등을 막고자 국왕법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국왕법의 내용은 정치적 중립을 준수하고, 국가원수, 왕립군 참모총장으로써의 활동을 통해 국가의 안전과 생명을 위해 이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되어 있으며 국왕의 정치적 권한이 모두 내각에 넘어갔고, 사면권, 외교권, 불기소권, 법안거부권, 훈장 수여권 등은 국왕에 넘겨주기에 이르렀다.

부정적 평가

다만 브렌드리크가 워낙 사회주의자인데다 반자본주의를 띄고 있는지라 총리 1기 시작부터 사민당의 당 내 갈등이 벌어졌다. 브렌드리크는 총리 집권과 함께 공산당, 농민통일당과 연립 내각을 맺었고 이 때문에 갈등을 촉발시킨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부분이 사회당 출신인 당 내 우파는 브렌드리크에 무조건 반대하고 있는 반면 노동자협의회 출신 + 공산당 잔류파의 당 내 좌파는 브렌드리크의 정책을 지지하는 분위기에 특유의 경제 정책이나 사회 개혁보다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제가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게다가 야당인 인민당도 브렌드리크를 탄핵시키자는 목소리가 커졌고, 중도우파인 중앙당, 심지어 극좌 성향의 노동혁명당도 탄핵에 동조하고 있다.

결국 집권 2기에 사회주의 독재를 우려하여 탄핵소추안을 상하원에 동시 제출했고, 사회민주당은 탄핵소추안을 놓고 갈등이 심화되었다. 상원은 인민당 + 사회민주당 우파 + 중앙당 + 군소정당 등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가결되었지만, 하원에서는 다수의 사회민주당 좌파 + 공산당 + 농민통일당이 반대함으로써 근소한 차이로 탄핵이 불발되었다. 이후 집권 3기부터 5기까지 탄핵소추안을 제출했지만 역시나 부결되었으며 특히 우파가 대거 쓸려나간 3기에서는 사회민주당 좌파는 물론 중도파까지 탄핵을 반대했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독재의 일부가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에 국왕인 아들러 1세는 브렌드리크를 총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정치적 권한이 남아있던 의회 해산권을 무려 4번이나 발동해 사실상 국가원수도 총리 퇴진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원수인 국왕이, 왜 국정에 대한 관리와 외교 활동을 하지 않고 고의로 총리 떨어뜨리기에 집중하는 것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고, 이후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물러나 그의 후임인 아들러 2세가 국왕직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은 계속해서 총선에 승리하다가 118년 총선에서 당 내 우파가 대거 쓸려나가 사실상 좌파는 물론 중도파도 영향력을 키운 셈이 되어버렸고, 결국 121년 사회민주당의 사회당 계열이 게르마스 신사회당으로 분당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사실상 사회민주당의 양 계파였던 노협계와 사회당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는 사이로 치닫게 된다. 후에 신사회당은 인민당에 흡수되며 친왕정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의 대표적인 정책인 국가복지정책과 노사협력제도에서도 비판이 많았다. 처음 정책을 시행했던 집권 1기에 산하 청원조직을 개설하지 않았던 점, 명확하지 않은 사실을 이용해 특정 계층에 이익이 되는 정책을 받아들인 점, 이 정책에 대한 실효성 논란이 대표적이다. 당시 게르마스의 경제는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계급 간의 갈등으로 경제적 타격을 입음과 동시에 경제성장률이 감소했고, 어떤 총리로도 경제를 되살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브렌드리크가 집권하고 국가복지정책이 시행되면서 많은 국민들이 제대로 된 복지 정책을 제안하여 국가가 잘 받아들일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국가 산하 청원조직을 미리 개설하지 않고 정책을 시행했기에 당연히 시민들은 핵심만 빼버린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결국 1년 동안 각 각료들과의 회의를 통해 청원조직을 어떻게 개설하느냐에 대한 의견을 모아 101년 6월 최초의 청원조직이자 국가복지부 산하 기관인 복지청원청이 설립되고 나서야 정책을 제대로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빈곤층, 노동자, 중산층으로 위장한 기득권, 친왕실, 자본가들이 자기들 입맛에 맞는 정책 사안을 만들고 복지청원청에 제출했는데, 총리는 그걸 모르고 이를 실행한 것이 집권 3기 때 알려지자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조사 결과 현재 제출된 정책 사안들 중 5,729건 중 1,143건이 명확하지 않은 사실인데다 의도적으로 총리가 자본주의 정책을 필 것이라는 기득권의 의도가 드러나 있었고, 어쨌든 이것으로 인해 자본가, 기득권들이 득세했는데 여기에 자경대를 조직하여 파업을 무력화시키거나 노동자를 탄압하는 일까지 벌이는 악영향까지 가져오며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더니 기득권이랑 붙어서 일부러 기득권을 득세시킨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 복지청원청은 3기 중반 국가복지정책을 강화하기로 결정했고 기득권, 친왕실, 자본가들의 정책 사안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거나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명확하지 않거나 거짓 정보를 인용한 정책 사안이 드러날 경우 제출자에 징역 3년 이하에 처하는 법률까지 마련했다. 이에 대해 인민당과 중앙당은 해당 정책을 좌파 포퓰리스트이자 표현의 자유 침해 정책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으며 끝내 집권 5기에서 이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이것으로 인해 인민당 지지자들이 결집하는 사례가 일어나며 집권 4기에 비해 그나마 안정적으로 운영하던 집권 5기에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122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다수당을 유지함에 따라 정권 교체를 이루기 힘들어졌다.

노사협력제도에서는 노사합의론을 통해 노동자-사업가 간의 갈등을 끝내고자 하는 정책인데 당시 사업가의 70%가 자본가였고 일반 자본가들과 마찬가지로 국왕에 우호적인 색채를 띄고 있어 반발이 커질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집권 3기가 되면서 공식 사과와 함께 해당 정책을 폐기해야만 했다.

또 공산당, 농민통일당과 연립내각을 맺은 것도 부정적인 관점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초기 공산당은 노동자협의회를 중심으로 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 트로츠키주의 당원들이 꽤 많았고 집권 1기만 해도 마르크스-레닌주의 성향의 장관이 몇몇 있기 때문에 그의 정치관과는 언행불일치라는 비판을 받는다. 농민통일당은 과거 왕정에 우호적인 우파 정당에 불과했는데, 브렌드리크 집권 이후 농민통일당이 반왕정을 빌미로 좌경화를 감행해 내각에 합류한 것으로 드러나 지지층인 지주들의 불만을 샀으며, 때문에 지주들이 인민당을 지지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정계 복귀와 공산당 서기장이 된 이후부터는 왜 사민당 출신 좌파 총리가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을 두고 지지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민당 총리 시절 공산당, 농민통일당과 연립내각을 구성한 것을 그 근거로 볼 수 있다.

총평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04 - 124 정계 입문
무소속 124 - 155 정계 은퇴
공산당 155 - 159 정계 복귀, 서기장 취임
무소속 159 - 160 서기장 직 사임, 정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