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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스 왕립상·하원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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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왕립상원 218.07 ~
제??대 왕립의회 218.07 ~
아르티네 내각
218.07 ~
여당

게르마스 사회민주당
43석·238석

자유민주당
3석·19석
야당

기독교민주당
21석·188석

바이에리네 사회연합
3석·55석

녹색당
5석·67석

좌파당
3석·30석

인민의 힘
13석·27석

사회주의통일당
0석·4석

국민당
0석·3석
무소속 9석·21석
재적 100석·652석
게르마스 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Germaschlands
조치알데모크라티셰 파르타이 게르마칠란트
약칭
사민당, SPG
표어
변화하는 새 시대
(독일어: Sich ändert neue Ära)
창당일
86년 7월
전신
틀:게르마스 사회당
중앙 당사
게르마스 베르데니스
이념
사회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친유로아주의

내부계파:
문화자유주의
개혁주의
진보주의
민주사회주의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
제3의 길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익
당수
프리드리히 아르트만 아르티네
부당수
앙겔라 스콜라
사무총장
게오르기 프레드리크
최고위원
제니 뮐러
루터 폰 마인테
알렉스 코어렌
왕립의회
243석 / 652석 (37.27%)
왕립상원
43석 / 100석 (43.00%)
주지사
11석 / 16석 (68.75%)
지방의회
372석 / 1267석 (29.36%)
이세계 의회
134석 / 2200석 (6.15%)
당색
빨강 (#FF0000)
당가
사회민주주의 깃발 아래
(독일어: Unter der Flagge von Sozialdemokratie)
국제 조직
이세계 진보주의 인터내셔널
(이세계 의회 소속 교섭단체)
EU 교섭단체
유로아 사회민주동맹-민주연합
당원 수
2,122,120명(220년 기준)
청년 조직
게르마스 청년사회민주당
홈페이지

게르마스 사회민주당(독일어: Sozialdemokratische Partei Germaschlands 조치알데모크라티셰 파르타이 게르마칠란트[*], SPG, 에스피기)는 게르마스 왕국의 집권여당이자 사회민주주의,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정당이다. 약칭은 사민당으로, 빨간색을 당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재 국제이세계민주연합유로아 사회민주동맹-민주연합 소속으로 과거 이세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회원이었으나 헤섹 당수가 반공주의를 목적으로 탈퇴하였다.

86년 7월 게르마스 노동자협의회오토 스벤라이너게르마스 사회당과 기타 좌파 단체들과 합병하여 창당한 정당으로,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게르마스 인민당과 으로부터 대항한 유일한 좌파 정당이었으나, 110년 당 내 공산파였던 게오르기 브렌드리크가 당권을 장악하여 당이 좌경화되면서 게르마스 공산당과 연대하며 사회당계의 반발을 가져왔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이후 사민당은 다시 기회를 노리지만 168년 신자유주의를 내세운 프리드리히 헤섹이 당권을 잡고 다시 우경화되지만 173년 헤섹의 사퇴로 다시 중도파가 당권을 잡았다.

그러다 204년 게오르기 슈트하르트의 집권으로 사민당의 당 노선을 제3의 길로 수정하고 다시 우경화를 시도했지만 214년 이후 프리드리히 아르티네가 당권을 잡고 온건한 좌경화를 시도하고 있다.

기독교민주당의 전신인 게르마스 인민당과 함께 가장 오래된 정당으로 손꼽히며, 총 7명의 총리를 배출해 낸 정당이다.

주 지지 기반은 바이에리네 지역을 제외한 도시 대부분으로 특히 베르데니스에서의 지지세가 강하다. 반면 기타 도시 공업 지역, 농촌 지역에서는 기민당과 접전을 벌이고 있지만 바이에리네에서는 바이에리네 사회연합에게 밀리는 분위기로 지지세가 약하다.

역사

창당 이전

게르마스 사회민주당은 게르마스 노동자협의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국가 내에선 자본가들과 왕실, 부르주아들의 위세가 높아지자 오토 스벤라이너 등 마르크스 사상을 배우게 된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75년 7월 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한다.

노동자협의회는 초기 노동조합 설립을 도와주었고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 자본주의 비판 등을 통해 여러모로 영향력이 컸던 단체였으나 나중에는 정치 활동과 파업으로 확대되었고, 제국의회에서 의석을 얻는 등 공산계 정당 중 최초로 의회에 입성했다. 그러던 와중 카를 오크막스가 이끄는 사회당이 영향력을 키워 집권여당인 인민당을 위협하자, 노동자협의회는 사회당은 물론 기타 좌파 단체들과 연석회의를 통해 대중적 좌파정당을 강력히 제안했다. 86년 4월 이뤄진 연석회의에서 사회당이 좌파정당 설립에 찬성했고, 다른 좌파 단체들도 이와 같은 내용에 찬성했다. 그리하여 86년 7월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정하고 사회당과 노동자협의회, 좌파 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베르데니스에서 첫 전당대회를 열었다.

한편 노동자협의회 내 급진 계열은 사민당 소속이 되었다가 100년 탈당하여 게르마스 공산당으로 분당되었다.

창당 이후

88년 3월 인민당 소속 오토 페르디난트 총리에 의해 '반사회주의법'이 통과되면서 사회민주당은 반정부정당으로 규정되었다. 때문에 반사회주의법이 폐지될 때까지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고, 심지어는 군경의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90년 2월 페르디난트 총리의 암살로 반사회주의법이 폐지되고 정치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자 사회민주당은 92년 치러진 총선에서 상원 3석, 하원 8석을 가져가며 돌풍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자본가와 지주, 부르주아들의 탄압을 받던 노동자들의 지지와 부패한 왕정으로부터의 저항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사회민주당은 100년 총선에서 원내 5당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브렌드리크 집권기

그러나 중도파였던 엘런 요제프 슈타이거가 물러나고 공산파인 게오르기 슈트라서 브렌드리크가 당권을 잡아 급진적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워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가져왔으며, 110년 총선에서 상원 77석, 하원 274석을 흭득하여 다수당으로 올라선다. 물론 다수당이 되었지만 후에 게르마스 공산당과 농민통일당과 연대하여 연립내각이 구성되었다. 브렌드리크는 강력한 정치·사회 개혁, 비례대표제 도입, 여성 및 엘프인 참정권 요구, 1일 10시간 노동제 및 임금 인상, 기득권 타파 법률 제정, 국왕의 정치적 중립화 등을 내걸고 급진적 개혁을 추구했는데, 이에 친왕정 기득권 세력들은 총리의 사퇴를 요구하였고, 당시 국왕이던 아들러 1세도 총리의 사퇴를 거듭 요구했다. 당 내 우파 내지 사회당계 역시 총리 퇴진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사회당계는 이미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결국 118년 총선을 앞두고 우파가 대거 쓸려나가 좌파가 크게 약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21년 총선 이후 공산당과의 연대를 빌미로 사회당계 대부분이 탈당을 선언했고, 이들은 게르마스 신사회당이란 정당을 창당해 좌경화된 사민당으로부터 대항했고 특이하게도 좌파 정당 중 유일하게 반공 노선을 띄게 된다. 124년 브렌드리크 총리의 임기가 끝나고 후임인 파울 에벤스토가 당수 겸 총리가 되어 당 내 개혁을 통해 사민당의 좌경화는 끝나게 되었다. 나중에 132년 총선에서 인민당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야당 신세를 지게 된다. 한편 신사회당은 인민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등 점점 좌파 정당으로써의 정체성이 상실되다가 138년 인민당에 흡수되어 완전히 보수로 전향했다.

그런데 유로아스피아 전쟁이 터지자 사민당은 큰 위기에 빠졌다. 집권여당인 인민당 내각은 비리 의혹 등으로 지지를 잃었지만 여기에 전쟁까지 겹치며 큰 위기를 맞은 상황이었는데 결국 해외로 망명하였고 이미 사클레치아군이 베르데니스 코 앞까지 와버렸기 때문에 사민당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을 우려했다. 142년 게르마스가 항복하자 사민당은 사클레치아군에 의해 금지정당으로 지정되었고 사민당 당원들은 미리 만들어 낸 지하벙커에서 지하 활동을 전개했다. 일부는 앵글로카나 중립국에 망명하며 사민당 활동을 펼쳤으며 특히 일부는 레지스탕스인 게르마스 인민해방동맹 산하로 들어가 사클레치아군과 맞서 싸웠다.

전후 처리기

유로아스피아 전쟁 이후 게르마스 국토의 절반이 파괴되고, 베르데니스는 물론 사민당 당사까지 큰 피해를 입어 복구 작업에 나서게 된다. 149년 총선을 앞두고 당 내 좌파는 공산파 대부분이 공산당에 넘어가게 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처하던 정통 좌파(혁명파)는 크게 쇠퇴했다. 그러던 와중 중도파 한스 그라스티아가 당수로 취임해 한스 계획을 발표했고, 사민당은 노동자 중심의 대중적 좌파 정당이 아닌 사회적 시장경제, 자본주의·군주제 개혁, 국민 중심의 민주주의 등을 통한 사회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정당으로 탈바꿈했으며, 기존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과 계획 경제를 사실상 포기하고 시장경제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149년 총선에서 272석을 차지해 기민당을 누르고 제1당으로 차지하게 되는데, 한스는 후에 총리로 취임하여 베르데니스의 기적을 통한 경제 성장을 이룩한다.

헤섹 집권기, 20년 야당기

그러나 155년 경제 성장이 끝나고 한스의 지지율이 급락했으며 160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승리함에 따라 다시 야당이 되었다. 선거 이후 한스는 정계에서 물러나 사민당은 위기를 맞았지만 징치 신인 프리드리히 헤섹이 등장하며 사민당의 당수로 취임한다. 한편 기민당이 경제 추락으로 지지율이 감소하자, 헤섹은 신자유주의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신경제 플랜을 발표한다. 그리하여 164년 총선에서는 기민당의 지지층이었던 보수층이 자연스레 사민당으로 넘어오게 되고, 사민당은 216석을 기록하며 다시 여당이 되었다. 하지만 헤섹이 총리로 집권한 이후부터 신경제 플랜이 종료되고, 재선 이후부터 신자유주의를 강하게 내세우기 시작했다. 헤섹은 국영기업인 게르마스 국영철도항공공사게르마스 의료공사를 민영화시키고 명칭을 GKBNG로 바꾸고, 무노조 경영 계획인 국민경영과 반노동조합법 시행을 촉구하며 친기업, 반노조 성향을 띄게 된다. 또 국가복지정책을 폐지하고 연금 제도는 물론 각종 복지 정책을 대거 축소시켜 국민들의 신뢰도를 잃었다. 한편 당 내에선 헤섹의 행보와 계속되는 우경화로 인하여 당 내 좌파와 중도파가 한스 계획과 사민당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며 비판했고, 결국 헤섹 총리 사퇴를 요구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당 내에서의 서명 운동과 지지율 급락으로 사민당은 침체기에 빠졌고, 헤섹의 정책에 찬성한 기민당과 바이에리네 사회연합은 헤섹과의 선거 협상 과정에서 SPG-CDU 흑적내각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총선에서 연정 참여를 성사시킨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172년 선거에서는 사민당, 기민당의 대안정당인 자민당이 제2당으로 올라서고, 기민당은 제1당을 사수했지만 사민당은 제3당으로 추락했다.

헤섹은 모든 책임을 지고 당수에서 물러났고, 새 당수인 아르투어 프리스가 집권하게 된다. 프리스는 기존의 영광과 사민당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다시 한스 계획과 사민당의 기본 이념을 통한 당 강령으로 환원시켰다. 하지만 헤섹의 정책으로 인해 사민당의 신뢰도가 크게 타격을 입고 기민당과 자민당이 부상하면서 192년 총선까지 약 20년 간 제3당에 머무르며 야당 신세를 져야만 했다.

슈트하르트 집권기, 당 내 개편기

재집권기

내부 정파

게르마스 사회민주당은 케인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민주포럼(Sozialdemokratische Forum), 제3의 길, 중도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중도(Die Neue Mitte),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자유좌파(LibLinke), 문화자유주의, 성 자유주의 외에도 페미니즘, 환경 정책 등의 의제를 포함하는 변화(Veränderung),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노동민주연대(Arbeitsdemokratische Solidarität)가 현재 정파로 있다. 그 중 사회민주포럼은 중도파, 새로운 중도는 우파, 노동민주연대는 좌파로 구분되며 현재 당수 겸 총리를 맡고 있는 프리드리히 아르티네가 중도파로 분류된다. 경우에 따라 변화를 좌파가 아닌 진보파, 자유좌파를 자유파로 구분할 수 있다.

사회민주포럼은 현재 당 내 주류이자 당권파로 당 내 좌파 일부와 제3의 길 반대파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되었다. 당시 당 내 좌파가 민주사회주의 외에도 케인스주의, 과학적 사회주의, 트로츠키주의 등 소수의 이념을 가진 당원들이 존재했으나 케인스주의 계열 좌파가 이탈하고 204년 사회민주포럼을 결성했다. 소수 이념의 세력들 역시 이탈하여 좌파당사회주의통일당으로 넘어갔다.

반면 제3의 길을 추진하던 세력들은 당 내 우파 세력이었던 어젠다 210을 해산하고 새로운 중도로 개편되었다. 이는 현재 내부 정파 중 세번째로 크며 현재까지 당 내 우파로 자리잡았다.

당 내 좌파는 고전적 좌파 성향과 노동 복지 국가 지향, 그리고 토지 개혁, 기득권 타파, 급진적 정치 개혁을 따르는 정파이다. 경우에 따라서 기성 좌파와 신흥 좌파로 나뉘는데 기성 좌파는 노동민주연대, 신흥 좌파는 변화파가 이끌고 있다. 과거 공산파(공산주의), 민사파(민주사회주의), 과학파(과학사회주의), 지상파(자유지상주의), 혁명파(마르크스-레닌주의) 등으로 갈라졌다. 그 중 민사파, 혁명파 대부분은 스벤라이너의 노동자협의회 출신으로, 지상파는 일부가 사회당 출신이다. 이후 공산파 출신의 브렌드리크가 집권하여 공산당과 연대하고,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펼쳤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이후 공산파 대부분이 공산당으로 넘어갔고, 혁명파 역시 대부분 쪼그라들어 소수 계파가 되었다. 헤섹 시기 당 내 좌파는 중도파와 함께 헤섹 반대 운동을 벌였고, 후에 173년 헤섹의 사퇴와 중도파가 집권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민사파, 과학파, 지상파는 좌파연합(Linke Union)을 형성하며 중도파와 양대 계파를 이루었지만, 지상파가 가장 먼저 좌파에서 이탈하며 케인스파가 들어오며 좌파연합이 몰락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좌파연합은 딱 한번 당권을 잡은 후 199년 당수 선거에서 참패하고, 동시에 실시한 부당수 선거 역시 중도파에 참패해 몰락했으며, 좌파연합은 다시 케인스파, 민사파, 소수파로 분리되었다. 한편 지상파는 212년 자유좌파를 결성했다.

214년 당수 선거에서 게르마스의 칼 루스 페르손, 버니 샌더스라 불리는 에리히 벤터가 떠올라 중도파 아르티네 후보와 접전을 벌였지만 벤터가 당수 선거 막판 당 내 좌파에서 이탈하고 변화 214를 결성해 다시금 좌파의 영향력을 잃었으며 결정적으로 아르티네 후보가 아슬아슬하게 승리한 원인이 되었다. 결국 당 내 좌파가 기성 좌파와 신흥 좌파로 분열되어 갈등했지만 215년 케인스파 대부분이 전부 SDF로 넘어갔고, 217년에는 민사파를 중심으로 노동민주연대를 구성함으로써 당 내 좌파의 구도는 사실상 노동민주연대가 유일하다.

당 내 우파는 과거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당 출신 인물들이 주축이 되었으며 최근에는 제3의 길을 통한 사회자유적 시장 경제 체제 수립, 온건한 정치 개혁과 친기업·시장 정책 등을 내걸고 있다. 당 내 우파는 사회당의 전성기를 맞은 호르스트 알펜의 정치, 경제 사상을 지지했다. 그러나 브렌드리크가 총리로 집권한 이후 당 내 우파는 총리 사퇴를 요구했지만 과감한 사회주의, 반왕실 정책을 내걸어 국민의 지지를 받아 총선에서 우파들이 대거 쓸려나갔다. 심지어 공산당과 연대했을 때도 당 내 갈등을 촉발시켜 사회당계 대부분이 탈당해 결국 게르마스 신사회당을 창당해 군주제를 반대하지만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반공 노선을 띄게 되었다. 하지만 곧 야당인 인민당의 괴뢰정당으로 전락했고 신사회당은 138년 인민당에 흡수되어 신사회당 출신 인물들은 전향파로 활동한다.

유로아스피아 전쟁 이후 당 내 좌파가 개편되는 사이 당 내 우파는 소수의 사회당계와 기업인 출신으로 나뉘어졌지만, 160년 인민당에서 탈당한 프리드리히 헤섹이 우파 신인으로 부상했고, 급기야 당수 자리까지 차지하며 좌파였던 사민당이 우경화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168년 총선에서 사민당이 1당을 차지하고, 헤섹이 총리가 되며 우경화 이후 신자유주의 노선을 타면서 친기업 정책을 과도하게 펼친 탓에 지지율이 급락했다. 결국 당 내 좌파와 중도파에게 비판을 받아야 했고, 174년 총선에서 기민당에게 내주며 헤섹 내각이 몰락하게 된다.

이후 우파는 영향력을 상실했고 중도파가 연달아 집권했지만 198년 제3의 길이 떠오르며 우파의 중점 이념으로 삼게 된다. 이후 204년 게오르기 슈트하르트가 총리가 되며 슈트하르트 계획을 발표했으나 결과적으로 게르마스 왕국의 경제는 크게 성장했으나 양극화를 막지 못했고 심지어 극우단체들이 하위층을 테러하는 사건이 터졌음에도 정부의 소극적 조치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했고 자민당과의 연정이 붕괴되는 지경까지 가게 된다.

슈트하르트 퇴임 이후 214년 당수 선거를 앞두고 새로운 중도를 결성했으며, 이를 통해 제3의 길의 영향력이 아직 약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슈트하르트는 벤터의 부상으로 3위를 기록해 안타까운 실패로 거듭났고 218년 아르티네가 총리가 되며 중도 성향의 자민당과 연정을 다시 제안했을 때 유일하게 연정에 찬성했다. 그러나 새로운 중도가 갈수록 영향력이 감소하고 있는데 제3의 길 모델보다는 기본소득, 생태주의 정책 등이 힘을 얻고 있어 앞으로 당 내 우파가 어떻게 될 지 전망된다.

주요 인물

역대 당수


역대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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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제5대
오토 스벤라이너L
한스 알바르테M
페르디난트 프리히M 엘런 슈타이거M 게오르기 브렌드리크L 파울 에벤스토M
제6대 제7대 대행 제8대 제9대
프란츠 겔로스M 아돌프 호센R 프리드리히 엔리크R 한스 그라스티아M 프리드리히 헤섹R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아르투어 프리스M 에른스트 리스트M 카를 마우어M 게오르기 슈트하르트R 헨리 코펜M
제15대 제16대
하인리히 프론더M 프리드리히 아르티네M
M은 중도파, L은 좌파, R은 우파
취소선은 당수직에서 제명·사망·중도사임한 경우

역대 부당수

역대 사무총장

역대 배출 총리

역대 배출 부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