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렬하여 보기

A

그로우휠 3편
새로운 부관

강 위의 교량을 건너자 곧 승강장이었다.

14량의 검은 열차가 지붕을 덮인 승강장에 몸을 뉘었다. 열린 객차 문에서는 바쁜 사람들이 쏟아졌고 한적했던 승강장은 어느새 사람으로 붐벼 아렌이 그들 사이를 비집고 나올 정도였다. 복잡한 풍경, 저마다 다른 방향을 가는 사람들. 지붕의 기둥마다 한 개씩 시계가 걸려있는 이곳이 바로 번영과 냉엄이 공존하는 라이프닛의 수도였다.

아렌은 기어코 지긋지긋한 장소에 발을 딛었다며 묘한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숨을 몰아쉰 후 옷맵시를 가다듬자, 이번에는 대뜸 처음보는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누구십니까?"

"하나의 눈을 위하여. 아렌 중장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사복 차림의 키가 작은 남자다. 그녀가 대꾸도 없이 의아한 표정을 하자 남자는 이내 자신의 소개를 한다.

"작전기간 동안 중장님을 도울 반델 소령입니다."

"아. 천개의 창으로서. 반델 소령님, 반갑습니다."

아렌은 기억이 스쳤다. 분명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 총통의 하수인이 한 이야기다. 돌아오면 177번 승강장에서 수행원 하나가 붙을거란 보고였다. 그는 스스로 돕는다고 이야기하지만, 글쎄. 그게 도움인지 감시인지는 영문을 알 수 없다.

"차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노르스름한 이파리가 겨울의 방문을 일러준다. 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며 본 풍경은 그랬다. 집회의 자유조차 없는 이 도시에서 마음을 놓고 대화할 수 있는 상대는 풍경뿐이 아닌가. 한편 앞에서 군더기 없이 걸어가고 있는 남자가 자신의 수행원이란 사실이 그닥 반갑지는 않았다. 작전을 위해서라지만 분명 반델 소령은 총통의 사람일 테니까.

"중장님께서 궁금하신 게 있다면 뭐든 알려드리겠습니다. 말 편하게 하십시오."

그는 흘깃 뒤를 바라보며 아렌을 향해 친절하게 말했다.

"배려 고맙군. 그럼 출신 전선은?"

"산야 전선입니다."

산야 전선이라면, 북쪽에 있는 이민족과의 마찰 지대다. 그 의미는 곧.

"내 평생 근위대를 직접 만나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저도 미인을 모시게 되서 영광입니다."

산야 전선은 대부분의 내용이 대외비인 작전 지역이다. 그곳의 출신이란 건 일반 병사가 아니라는 의미이고, 그건 곧 총통부 직속의 근위대라는 말과 동일하다. 이틀 전 총통이 자신에게 종이를 던져주며 근위대를 투입하겠다고 말한 게 마냥 군말은 아닌 듯 했다.

"귀관 생각에는, 본인이 센스는 있는 편인가?"

"샌들에는 회색 양말. 뭐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과해도 탈이야."

둘은 승강장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왔다. 반델은 장갑을 낀 손으로 뒷문을 열어주었고, 아렌은 그 검은차의 뒷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동생인 부관의 차와는 다르게 정말 아무런 물건도 없이 말끔했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더 어색했다. 마치 새 차인 것 마냥 말이다.

"새차인가?"

"마음만으론 그렇습니다."

차는 격자로 잰 듯한 네모난 건물 사이로 이리저리 오갔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면 비공정 출발 시간은 간당간당 할 테다.

"이제부터는 편하게 물어보셔도 괜찮습니다. 보시면 옆 좌석 검은 가방에 서류가 들어있으니, 그걸로 현황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가방을 열자 서류뭉텅이가 보였다. 원래였다면 동생이 줄 물건들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모든 보고는 귀관을 통해서 받는건가?"

"맞습니다."

아렌은 팔짱을 끼고, 앞만 바라보며 운전하는 반델을 바라본다.

"그럼, 내 부관은?"

"동생분께선 호소니의 다른 지역으로 발령났습니다."

"무슨 이야기지?"

사전에 얘기되지 않은 듣도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반델은 한치의 표정 변화없이 운전하며 마저 이야기했다.

"총통의 명령이십니다. 전임 사령관인 헤반 중장의 자리인 만큼, 중장님의 역량을 보좌할 인원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럴듯 하지만 그럼 처음부터 이야기하면 될 것을. 괜한 생각이 물밀듯 밀려오지만, 따져 묻는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없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동생분께선 새로운 역할을 맡으셨을 겁니다."

"글쎄. 그럼 앞으로는 소령이랑 오순도순 잘 지내면 되겠군."

그 말에 소령은 처음으로 입꼬리를 내렸다.

"하하.. 헤어질 때 너무 정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습니다."


이틀 전,
"이제부터 자네와 함께 작전을 지휘 할, 총통일세."

그 말을 마지막으로 정적이었다.

워렛 자신을 노리는 총구의 수는 적어도 열. 본인이 가진 수의 열배 차이다. 심지어 자신 앞에서 농담이나 툭툭 내뱉던 중년이, 본인 입으로 "총통"이라고 말한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총통이 아니라면 이런 상황이 생길 수 있을까? 진짜가 아니라면 그렇게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을까?

붉은 머리의 중년은 홀짝 커피를 마시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세워 워렛을 바라본다.

"만약 내가 진짜 총통이라면, 자네가 그렇게 원망하는 대상이라면, 쏴야하지 않겠나?"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가 진짜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어야 한다.

"다시 묻지. 출신 전선이 어디인가? 이레프 워렛."

"공화전선."

"그건 반말일세. 그리고 자넨 출신 전선이 없어. 그건 돈주고 산 위조가 아닌가? 본인 누나 뒤나 졸졸 쫓아 다니며, 관료 행세나 한 게 전부일 테지."

중년은 대뜸 일어나 망설임 없이 워렛의 총구를 손뼉으로 틀어막았다. 당황한 워렛은 주춤 물러났고, 총을 뺏어 쥐어선 워렌의 코앞까지 다가가 커피향을 풍기며 말했다.

"전쟁이란, 준비된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야."

그리고 중년은 빼앗은 권총을 자신이 쥐어, 스스로의 관자에 들이민다.

"그리고 난. 내 나이와 권위를 떠나 언제고 그 준비를 해온 자이지. 자네와는 달라."

워렌은 잠시도 중년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리고 와중에도 생각했다.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분명 이 시간에 총통이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다고. 이 상황 모두가 자신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실망이군. 누나와는 달라. 네가 가진 분노는 껍데기인가?"

중년은 영 탐탁치 않다는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그리곤 물에 담배를 지져 담뱃불을 피우고, 푸른빛의 담배를 쥔다.

그걸 바라본 워렌은 뜬금없게도 한 가지 말이 생각났다.

"…. 실내에서는 금연입니다."

그 뜬금없는 발언에 웃음이 터진 중년은 기차가 떠나가라 웃었다.

"그래! 금연이군. 알겠네. 그럼 우선 다시 앉지."

워렛은 오히려 그 호탕한 웃음에 위축되었다.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에 반해 자신은 죽음 속에서 발버둥치는 생쥐같지 않은가. 주먹의 악력은 의지처럼 점차 희미해지고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들은 워렛에게 타협을 강요했다.

"모든 걸 알고있다면, 왜 이렇게 두는 겁니까?"

그 물음에 중년은 끄덕이며 앉았고, 워렛도 앉는다.

"하나 묻겠네. 필요하지 않은 행동을 뭣하러 하겠나?"

"내가 응하지 않는다면?"

"자네가 응할 걸 알기에 내가 이곳까지 행차했지 않겠나? 이 몸께서."

그는 콧바람으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차창 너머의 불빛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워렌을 바라보았다. 워렌이 바라본 중년의 눈동자는 답답한 방처럼 보였다. 너무나 넓지만 텅 비어서, 오히려 숨이 막힐만큼 답답한 방. 어쩌면 그런 분위기가 말에 담겨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정도였다.

"오랜 고서를 읽었네."

난데없이 무슨 고서 타령인가. 워렛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사. 병사는 본인의 가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굳이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군."

중년은 대답도 듣지 않았으면서 절로 끄덕인다.

"가져와."

그가 부르자, 서있던 남자 중 하나가 워렛에게 두 장의 쪽지를 넘겨준다. 쪽지들은 아주 너덜너덜한 상태로, 글씨마저도 수전증이 있는 손으로 쓴듯 곧바르지 못했다. 워렌은 무엇인가 싶어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다, 내용들이 무척이나 중요한 '불사의 마법' 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남은 한 장은 당장 자신의 누나인 아렌을 포함한.. 자신을 돕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담긴 문서였다.

"자네 반응을 보니 아는 듯 싶군. 거기 적혀있는 재료가 맞나?"

"당신. 설마…"

"죄책감 따위 가지지 말게. 이건 기회야. 자유로워 질 수 있는 기회."

워렌은 온 몸의 날 선 신경이 두 눈으로 모였고, 중년. 아니 총통은 말했다.

"이제 상황이 인지됐으면 첫번째 제안을 하겠네."


"나를, 불사(不死)로 만들어주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