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본국 민주화 운동 유공자
김민현
金民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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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47년 4월 29일
청하부
사망
1969년 10월 5일 (22세)
국적
월본 월본
가족
아버지 김우경, 어머니
남동생 1명, 여동생 2명
학력
청하우진초등학교 (졸업)
청하중학교 (졸업)
청하북고등학교 (졸업)
교모대학교 (경제학과 / 명예학사)[1]
병역
국가군방위대 육군 상등병 (사후추서)
상훈
국민훈장 백월장 (1976년 사후 추서)

개요

김민현 (金民泫, 1947년 4월 29일 ~ 1969년 10월 5일)월본의 군인이자 민주열사이다.

일생

항쟁 이전

김민현은 1947년 4월 29일 청하부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농부 아버지인 김우경씨와 가정주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 1명과 여동생 2명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1960년 청하우진소학교 졸업, 1963년 청하중학교 졸업, 1966년 청하북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에 국립 교모대학교[2]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김민현씨는 평소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올바른 학생이였으며, 선생이나 주변 어른들에게 공손해 동네에서 평판이 매우 좋은 학생이였다고 한다.[3] 후에 그를 추모하던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도 "의롭게 죽은 민현이가 바로 내가 아는 그 민현이였다. 그는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이후 대학에서 경제학 공부를 하다가 대학 3년생이던 1968년에 징집되었으며, 국가군방위대(국군) 육군에 입대하였고 신설군구에 배치되어 군복무를 수행하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주 평범한 한 청년의 일생이다.

도신설 7.17 항쟁 참여

관본도 최북단에 위치한 관북군에서 평범한 군복무를 하고 있던(당시 일등병이었다) 그는 갑자기 어느 날 도신설군에서 대규모 폭동이 발생하여 진압을 지원하러 간다는 상관의 말을 듣고 도신설(현재의 산원부 일대)에 파병되게 된다. 도신설과 아무런 관련이 없던[4] 그는 상관의 폭동 진압이라는 말을 믿고 도신설군까지 갔으나, 도신설군에서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시민을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분명히 폭동이라 했는데 오히려 우리 국군이 시민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이고 있는게 아닌가?
김민현의 일기 중 발췌

그는 이후 진압 명령에 투입되어 시민들과 대치하게 되었으나, 차마 시민들을 쏘지 못하고 일부로 허공이나 도로에 쏘며 명령에 저항하였다. 이후 그러한 행동이 발각되어 상관에게 혹독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이 일로 인하여 그는 깊은 혼돈과 국군에 대한 배신감에 빠지게 된다. 결국 7월 20일 새벽 그는 탈영하고, 몰래 시민군 본부로 가 시민군측에 귀순하게 된다.

시민군에 합류한 그는 신설 방언을 몰라 처음엔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도신설 주민들의 응원과 동료들의 지지로 힘을 얻게 된다. 이후 육시완 시민군 지휘관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게 되고, 국군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그는 그 점을 이용하여 게릴라 작전으로 시민을 공격하는 국군을 토벌하는 등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실제 전투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막후에서 작전을 세웠고 시민군에게 큰 도움을 주며 항쟁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7월 30일 육시완 지휘관이 전사한 뒤 그는 의지하던 상관을 잃게 되고, 고통을 겪다가 결국 8월 2일 시민군의 항복과 함께 국군에 잡히게 된다.

사망

국군에 잡힌 그는 "배신자", "역적" 등의 욕설을 들으며 구타를 당했고, 강도 높은 수사를 당했다. 이 과정에서 뼈가 부러지고 이가 빠지는 등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군사법원에서 불법적인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으며 항소나 상고를 할 기회도 없이 1969년 10월 5일 비밀리에 총살형으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그 이후

이후 유족에게는 군사고사로 위장되어 알려졌으며, 도신설군 이외의 지역에는 언론통제로 항쟁 소식이 알려지지 않아 유족도 처음에는 그가 군사고사로 사망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시체에서 구타 흔적이 발견되고 여러 수상한 모습이 보이자 그의 아버지인 김우경씨는 군부에 의문사가 아니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군부는 그의 아버지에게 압력을 넣어 통제했고 "역적,빨갱이 집안"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당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김우경씨가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974년 도유 9월 혁명에서 김우경씨는 "민현아! 아버지는 너를 믿는다, 아빠가 포기 안할게"라는 현수막을 들어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유족들에 의해 공론화가 시작되었으며, 1975년 조사위원회 조사 결과에서 "구타와 고문, 불법적인 사형으로 인한 사망"이 확정되어 관련자들이 사법 판결을 받고 그의 공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고향 청하부에서 민주열사로 칭송받았으며 사후인 1975년에는 모교인 교모대학교에서 명예 학사 학위가 수여되었고 1976년에는 국민훈장 백월장이 수여되었다. 이어 1계급 추서되어 상등병이 되었으며 1979년 유해를 찾아내 국립청하충렬사에 이장하였다. 김우경씨는 1985년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라는 책을 썼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김우경씨는 그 이후 기업들, 모교인 교모대학교와 함께 김민현장학회를 세우기도 했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2009년에 사망하였다. 김민현씨의 동생들도 평범하게 거주하고 있는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으며 영화 국군장병에서 그들의 인터뷰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는 군복무 기간동안 일기를 작성했는데, 항복 직전인 8월 1일 자신의 최후를 예감하고 이 일기를 동료 시민군에게 넘겨주어 사라지지 않고 현재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동료 시민군은 그 일기를 애지중지 보관하고 있다가 1975년 이를 공개하여 아버지인 김우경씨에게 넘겨주었다. 이는 7.17 항쟁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되고 있다. 다른 증언이나 기록과 교차검증을 해보면 그의 증언들이 상당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별개로 항쟁 전까지의 평범한 군생활도 실려 있어 당시 군생활도 살펴볼 수 있는 여러모로 좋은 자료이다. 실제로 김민현씨의 일기는 1977년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고, "월본판 안네의 일기"라는 별명도 붙었다. 현재는 7.17도신설재단 홈페이지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으며, 아버지인 김우경씨의 회고록도 담겨져 있다.

평가

월본 군사정권 내의 양심

당시 월본 국군은 군사정권의 영향 아래 상당히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언론통제가 심하던 독재정권 시절이던 만큼 정부 보도를 믿지 않고 자기 소신으로 행동하는 군인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대다수의 장병들은 시위대를 단순히 적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김민현씨는 그런 것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가로 전향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용기의 소유자로 칭송받고 있다. 게다가 당시 국군에서 탈영하여 시민군과의 대치를 포기하고 잠적한 사례는 어느정도 보였어도 국군이 탈영하여 시민군에 아예 가담한 사례는 이 김민현씨가 유일하다시피 하다. 사실 징집된 병사라면 20대 초반의 일반인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상부의 명령에 의문을 품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한 김민현씨가 사실 특이한 경우고 그런 만큼 더더욱 존경받는 것이다.

고향 청하부에서도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다.[5] 도신설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산원부에 위치한 민주화기념관에서는 그의 코너가 따로 있고 소규모 동상까지 설치되어 있다. 이후 청하부와 도신설군이 김민현씨를 우호 관계를 조성하는 데 활용하기도 하였다.

국군장병 개봉

2017년 7월, 그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영화 국군장병이 개봉되었다.

1200만명의 관객을 모으며 대흥행하였으며 7.17 항쟁과 김민현씨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게 되었다.


  1. 경제학과 재학 중 사망하였으나 그가 민주화 운동에 기여했던 공로를 상징하여 1975년 명예학사 학위가 수여되었다. 학위증은 아버지인 김우경씨가 대신 받았다.
  2. 청하부에서 청하대학교 다음가는 명문 취급받는 대학 중 하나(청하부립대, 교모대, 자인대)다. 주로 청하부립대학교자인대학교, 서안대학교, 단아대학교등과 함께 남부의 명문 국공립대로 묶이는 편이다.
  3.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당시 명문 학교였던 청하중과 청하북고였다. 당시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서열화가 되었었던 비평준 시대였다.
  4. 태어나서 군 입대까지 신설지방에 가 본적이 한번도 없으며 청하부 지방 토박이였다.
  5. 정치적으로는 중도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 청하부이기에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청하부는 군사정권 시기에는 앞장서서 반군부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던 도시였으며 단청민주항쟁(단이-청하)이 1974년 대규모로 일어나기도 했다.